가월(佳月)
어제는 십오 년 전 같은 학교 근무하던 동료들과 시내 횟집에서 저녁 자리를 가졌다. 고정 인원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이 함께했다. 퇴직한 분이 넷이고 현직이 셋이었다. 연령으로는 칠십대 중반부터 내가 막내급이다. 교장으로 퇴직한 분이 셋이고 명예 퇴직한 교사도 있다. 나이가 내보다 두세 살 아래인 동료가 연락책을 맡아 모임 장소를 주선하는 총무를 면치 못하는 처지다.
지난해 여름 이후 자리니 거의 반 년 만에 얼굴을 보았다. 내가 시내 상남동으로 나가 보는 유일한 모임이다. 나는 이런 모임이 아니면 상남동 번화가를 나가볼 기회가 없다. 모두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었다. 전보다 달리 요즘 시국에 대한 얘기가 많이 오간 듯했다. 나는 관심사가 아니라 별 달리 꺼낼 얘기가 없어 경청만 했다. 두어 시간 맑은 술이 여러 잔 오간 뒤 자리를 파했다.
밖으로 나오니 상남동 분수대 일대는 휘황찬란한 빛의 거리였다. 낮에는 볼 수 없을 알록달록하고 형형색색 전구들이 반짝거렸다. 외국의 어느 거리를 보는 듯 이국적인 풍광이었다. 밤이면 그런 빛의 향연이 가을부터 봄까지 계속되는 모양이었다. 분수 광장이니 아마도 여름철엔 시원한 분수가 뿜어져 솟구치지 싶었다. 날씨가 몹시 추운 밤이라 각자 정해진 차편으로 귀가를 서둘렀다.
일행 가운데 한 분은 동읍 주남저수지 근처까지 가야했다. 몇 해 전 교장으로 퇴직한 분이었다. 중년부터 주남저수지 인근 아트막한 언덕에 그림 같은 목조주택을 지어 전원생활을 했다. 국립 사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이후 박사 학위도 받은 것으로 안다. 평교사로도 열정 있게 보냈겠지만 장학사와 학교 관리자로 인품과 능력을 발휘했다. 나하고는 이 분이 교감으로 재직할 때였다.
이 분이 혼자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가야하기에 내가 그곳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버스정류소로 같이 걸으면서 잔 더 나누기로 의기투합했다. 지난 연말에 이 분이 내가 사는 근처 아파트 상가로 와서 나하고 또 다른 동료와 셋이서 잔을 같이 기울였다. 그때 자리에서 이 분이 나에게 숙제를 내어주었다. 내가 그럴 위치가 아님인데도. 이 분은 자신에게 어울릴 호를 하나 붙어달라고 했다.
주점으로 찾아들어 생굴을 안주로 삼아 소주를 더 나누었다. 그때 이 분이 나에게 준 숙제 얘기를 꺼냈다. 호는 자신보다 연배이거나 스승이 내려줌이 당연한데 연하인 내가 풀기엔 어려운 숙제라고 운을 떼었다. 그러면서도 이 분이 나에게 호를 붙여 달라고 한 명분도 이해는 되었다. 이 분은 평소 나의 동선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내가 산행 산책을 즐겨하고 글을 많이 쓰는 것까지도,
호는 그의 인생 역정을 짧은 두 글자에 함축해 담아야 한다. 그의 심성을 드러내거나 보완하기 위한 호도 그럴 듯하다. 가장 손쉽게 따 올 수 있는 것이 그가 태어난 고향 산천에서 찾으면 된다. 산이나, 시내나, 들판이나, 바위 이름에서 취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의 명언 경구에서 앞뒤로 축약시켜 두 글자를 조합해도 좋다. 때로는 그의 성정을 겸손하게 보완하는 구절도 쓴다.
이 분은 선대가 경북 청도 한재 골짝에 사셨다고 들었다. 이후 밀양 평촌 들판으로 나와 다시 진해에 정착했단다. 청소년기는 진해에서 마산으로 열차를 타고 통학했고 대학은 대구에서 다녔다. 태생지였던 큰 고개라는 ‘한재’와 평평한 들판이라는 ‘평촌(坪村)’이 떠올랐다. 그런데 한재와 평촌은 이 분에게 유년기를 보냈어도 지금 아무런 연고가 없고 특별히 부여할만한 의미가 없었다.
이 분이 현재 사시는 곳이 동읍 가월 부락이다. 가월(架月)은 저수지의 갯버들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른 달을 의미한다. 가(架)는 시렁을 뜻한다. 저녁에 뜨는 달만이 아니라 아침에 뜨는 해도 그렇게 보일 곳이다. 월출과 일출이 운치 있는 마을이다. 나는 이 분에게 가월(架月)을 살짝 비틀어 ‘아름다울 가(佳)’ 자를 써서 가월(佳月)로 붙임이 어떠실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마음에 들러나. 18.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