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을 이고 지고 로케이션 촬영지를 돌던 패션 에디터 생활을 마무리하고 뷰티 에디터로 자리를 옮겼을 때, 나는 반짝반짝한 피부를 갖게 될 거라는 상상으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채 3개월도 안 돼 그 꿈은 바스러졌고 수시로 피부과를 드나드는 신세가 됐다. 이유는 ‘화장품을 너무 많이 발라서.’ 얼굴을 4분할하여 각기 다른 화장품을 바르며 직업적 열정을 불태우자 피부는 붉고 더러워졌다. 스킨 두 가지, 에멀전 두 가지, 세럼 네 가지, 크림 두 가지 등 당시 한꺼번에 테스트했던 화장품의 개수는 어마무시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러블을 진정시키는 화장품이나 각질 제거제, 붉은 기를 잡아준다는 프라이머를 추가했다가 문제를 키우기도 했으니 무식해서 용감했던 시절이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피부 갱생의 여정을 거쳐 얻어낸 결론은 ‘덜어내기.’ 단 1개의 저자극 크림을 얼굴 전체에 펴 발라 사용하면서 피부 건강을 되찾기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현재 나는 다섯 단계로 스킨케어를 한다. 워터 에센스, 피부 면역을 높여주는 탄력 세럼, 쫀득한 제형의 크림, 아이크림, 마지막은 자외선 차단제다. 덜어냈다더니 아직도 꽤 많이 쓰고 있는 거 아니냐고?
‘바디 버든’이 핫 키워드로 떠오르자 여성들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화학 물질 덩어리로 우리를 속여왔다니!’ 화장품 브랜드가 원망스러울 거다. 하지만 모든 화장품이 장삿속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다. 메이크업을 깨끗이 지울 세안제, 유수분 밸런스를 잡아주는 보습제 등은 고대 이집트 때부터 계속된 피부 건강 비법 중 하나다. 물론 세월이 흐르며 지속성과 발림성을 개선하고 효능을 상승시키기 위해 많은 과학적 진화를 거듭한 결과, 현재의 ‘화학 물질’이 됐음도 인정한다. 안 바르면 미모를 잃고 바르면 독이 된다는 계륵 앞에 놓인 솔루션은 도대체 뭘까?
화장품으로 망친 피부를 다시 화장품으로 회복한 경험자, 많은 화장품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중견 기자, 그리고 익명을 요구하는 복수의 연구원들과 인터뷰를 해온 칼럼니스트로서의 결론은 이러하다. ‘스킵보다는 스마트 케어가 옳다.’ 단계를 줄이는 데 너무 집착하면 놓치는 것들이 생긴다. 건너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화장품 각각의 사용량을 줄이는 것이다. 쓸 건 쓰되 조금씩 쓰라는 거다.
1 토너 대신 미네랄 워터
토너는 피부결을 정돈하고 다음 단계에 바르는 제품의 흡수를 돕는다고 알려져 있고, 그건 팩트다. 하지만 이 말은 곧 토너의 역할은 보조에 그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디 버든이 우려돼 몸에 닿는 화학 물질을 줄이고자 한다면 과감히 생략하고 미네랄 워터 스프레이를 화장솜에 적셔 부드럽게 닦아내자. 결을 정돈하면서 온천수의 피부 힐링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2 이름 말고 기능으로 고른다
세럼, 에센스 그리고 앰플은 이름만 다를 뿐 실체는 같다. ‘에센스는 기본이니까 챙기고, 앰플은 집중 케어라니까 덧발라야지!’ 하지 않아도 된다. 비슷한 점도의 제형 중 브라이트닝, 안티에이징 등 자신이 얻고 싶은 기능을 하나 선택하면 된다. 나의 경우 피부 코어를 잡아 외부 변화에 흔들림 없이 항상성을 유지시켜주는 제품을 선호한다. 요즘같이 자극이 많은 시대에는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3 다른 텍스처, 다른 기능을 각각 1개씩
물에 잘 녹는 성분은 워터 타입 제형에 넣고, 기름과 친한 성분은 에멀전이나 크림에 넣을 때 가장 힘이 세진다. 같은 성분도 각기 다른 제형과 만나면 함량과 효능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또한 제형은 곧 물리적 보습력과 직결된다. 하이드로 에센스가 아무리 좋아봤자 크림이 갖는 묵직한 수분 보호막과 영양감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니 에센스는 기능 위주로, 크림은 보습력이 좋은 제품을 덧바르는 식으로 활용하자.
4 아이크림은 따로
눈가 피부는 여타 얼굴과 구조가 다르다. 더 얇고 피지선이 발달해 있지 않은 데다 메이크업을 하고 지우며 반복적인 자극을 받는다. 따라서 아이크림은 다른 제품보다 고보습, 고영양으로 설계되며 무엇보다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눈물의 pH에 맞춰 중성에 가깝게 만들어진다. 이런 아이크림을 얼굴 전체에 바르라는 케어법도 모순 아닌가?
5 하이브리드 제형은 도움이 된다
히알루론산의 분자를 더 작게 쪼갤 수 있게 되고, 비타민 C를 코팅해 낮에도 항산화 세럼을 바르게 만든 것처럼, 화장품의 제형도 발전하고 있다. 크림 한 통을 넣었다는 ‘크림 스킨’이나 에센스 제형이지만 크림과 같은 효과를 낸다는 ‘물 크림’이 대표적이다. 이런 하이브리드 제품은 단계를 줄이는 데 확실히 도움을 준다. 하지만 직접 써보고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크림 스킨을 사용하고 나서 피부가 훨씬 촉촉해졌지만 이 외 단계를 생략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을 받지 못했다. 지성 피부인 후배는 물크림을 사용하고 나서 화장이 훨씬 잘 받는다며 프라이머를 사용하지 않게 됐으나 기능성 에센스를 포기하진 못했다. 제품명보다는 사용감이 우선이다. ‘크림’이라고 써 있어도 그것이 진짜 크림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써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