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질러라 / 이계인
언제부턴가 나의 버킷리스트 중 제 1순위는 바닷가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혼자 살아보기였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자주 동해안으로 1박 2일 정도 콘도에 가서 쉬고 회를 배불리 먹고 오곤 하였다.
언니가 남해에 몇 번 내려갔다오더니 동해안의 바다와는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며 한번 가볼 만하다고 추천해주었다. 몇 번 내려간 경상남도 남해는 가는 길에 보이는 산의 모양도 바닷물의 색깔도 느낌도 동해안의 그것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내가 자주 보던 동해안의 산이 남성적으로 선이 굵은 반면 남해 가는 길의 진주쪽 산들은 동해안의 그것들과는 완연히 다른, 선도 섬세하고 여성적인 느낌을 받았다. 가는 길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나에게 남편은 아줌마 감성에서 소녀 감성으로 돌아왔다며 놀려댔다.
바닷물의 색도 에메랄드빛으로 내가 꽤나 자주 다녔던 동해안의 맑은 물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처음 내려갔던 때가 늦가을이라 그랬는지 쓸쓸한 햇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에메랄드빛에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내 가슴은 먹먹해져 눈물이 한참동안이나 내려 민망했다. 남편은 힐링이 제대로 되는 것 같다며 부끄러워말고 실컷 울라고 한참을 시야에서 사라져 주었다.
그리고 늦가을인데도 파, 시금치 등이 심어져 있는 초록빛 밭에 완전히 내 마음을 빼앗겼다.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었냐며 감탄을 연신하다 집으로 돌아온 탓인지 서울에 와서도 에메랄드빛 바다가 생각나곤 하였다.
큰딸의 결혼식이 끝나고 들어가서 살 아파트도 수리를 끝냈고, 남해에서 누가 나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서둘러 내려갔다. 마침 그곳에는 서울서 내려온 아는 언니들 몇이 집을 사서 살고 있었다. 며칠을 그곳에서 쉬고 있자니 조그만 집 한 채가 매물로 나왔다고 하였다. 맨발로도 다닐 수 있는 정원도 있고 잔디가 깔린 집을 꿈꿔왔던 터였는데. 그 당시 남해 붐이 일어서 그런지 나온 집도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려 나간다는 부동산사장의 말에 마음이 급해져 나는 계약을 해버렸다.
이튿날 남편에게 통보하듯이 얘기했더니 남편도 그렇게 원했던 일이니 살아 보란다. 남편은 서울에 직장, 게다가 능력있는 시어머니가 돌봐주실 테고 작은 딸도 분당에서 혼자 독립하여 직장생활 잘하고 있으니 나는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과감한 결단을 내린 적은 없었다. 내심 내 자신을 시험해 보고도 싶었다. 겁이 많고 의존적인 내가 시골에 혼자 그것도 연고도 없이 견뎌낼 수 있을지 내 자신도 궁금했다.
마침 집주인도 울산으로 발령이 났다며 빨리 이사하길 원했다. 남편은 나에게 필요한 살림리스트를 보내라며 며칠 지나지 않아 피아노까지 싣고 완전 이사짐만한 분량의 짐을 트럭에 싣고 내려왔다. 남편은 3일쯤 시골집에 머물며 필요한 것들을 보살펴주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 다음 날부터 진한 커피를 곁들인 간단한 빵을 먹고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있는 대로 크게 틀어놓고 아침을 마친 후 2~3분이면 걸어서 도착하는 독일마을과 그 아래로 보이는 너무나 멋진 바다구경을 하며 산책하고 또 우리 집에서 5분이 안 걸리는 바닷가를 걷고 집에 와서 일고 싶었던 책들을 읽으며 꿈같은 나날을 보냈다.
이상하게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고 그 자유가 행복하기만 했다. 내가 4월부터 남해에서 살기 시작한 지 6개월 이상이 지나자 날씨가 쌀쌀해지고 그곳 생활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몇 번 서울을 다녀갈 때마다 서울의 매연과 소음이 싫었는데 어느 날부터 서울 한복판의 소음과 매연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백화점 갈 일이 있었는데 이게 웬일이람 강남공기가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긴데 혼자 시골 내려가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잘 나가실 때 평택 근처에 정미소와 많은 논과 밭 그리고 집 뒤에 작은 동산까지 있는 시골집을 사셔서 먼 친척에게 맡기고 칠 남매 중 아래로 세 자매만 여름, 겨울 방학에 일주일가량 놀다오게 하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렇게라도 시골생활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의 인생에 어린시절 추억은 얼마나 삭막했을까를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 시절이었다.
넓은 평상에 누워 모기향 피워놓고 아름다운 별들을 올려다보며 아름다운 꿈을 꿨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서울서는 깨워도 못 일어났던 내가 시골에 내려오니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를 기대했던 일들….
30여 가구 되는 조금만 마을의 이웃들이 우리의 논과 밭, 정미소에서 일하므로 우리는 갈 때마다 공주 대접을 받았다. 그런 아름다운 기억들이 내게 시골생활을 동경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 속의 남해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젊은 여자(?)가 무슨 사연이 있어 혼자 내려왔느냐고 호기심 어린 눈들로 바라보고 몇 번 눈인사라도 하면 하나같이 그 질문을 해댔다. 그리고 강산이 수없이 변한 만큼 시골사람들도 예전처럼 순수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나에겐 나의 아버지만한 재력도 또 무시 못할 만한 그 무엇도 있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보낸 6개월도 나의 남편이나 딸들은 뜻밖에 오래 있었다며 기특하다고 하였다. 바퀴벌레 앞에서도 얼음이 되어 꼼짝 못하는 나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아는 그들이기에 칭찬 아닌 칭찬도 들었다.
삼사 년이 지난 지금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저지른 일들은 내 일생에 너무나 훌륭한 추억거리가 됐다. 그때 내가 이것저것을 계산하며 아무것도 못 했다면 지금쯤 ~할껄, 껄~ 아쉬워하며 못한 일을 후회했을 테니까.
그 일 이후로 나는 너무나 용감한 전사가 되었다.
그래, 뭐든 저질러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