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과 전격전 전술 히틀러와 스탈린의 폴란드 분할(1939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11.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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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과 전격전 전술
히틀러와 스탈린의 폴란드 분할(1939년)
요약 독일군은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선보이며 폴란드를 침략하였고 이에 히틀러를 견제해 폴란드에 영토보존을 약속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전에 폴란드 분할 점령을 위해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히틀러와 스탈린은 폴란드 침공에 성공하며 그 뜻을 이루었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으로 경각심을 갖게 된 영국과 프랑스, 폴란드에 영토보존을 약속하다
1938년 9월 뮌헨에서 영국과 프랑스 수상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만나 그들과 악수했을 때만 해도 독일은 이미 히틀러 소망대로 '한 민족, 한 공화국, 한 총통'을 이루었기에 이제 더 이상 무력점령할 곳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6개월 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이 거주하지 않는 땅도 점령함으로써 팽창정책의 본색을 드러냈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비로소 그대로 두었다가는 무법자 히틀러 앞에 유럽 전체가 위태롭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선 동유럽 약소국들에게 독립보장을 위한 외교적 조치의 일환으로써 1939년 3월 폴란드에 영토보존을 약속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폴란드를 분할 차지하기 위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다
사실상 이 약속은 소련의 지원 없이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8월에 히틀러와 스탈린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소 불가침 조약
독소 불가침 조약문에 서명하고 있는 양국 대표들.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때 히틀러와 스탈린은 둘 다 그 조약이 오래 가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동상이몽으로 다만 폴란드를 분할하는 데 일시적으로 이해가 일치했을 뿐이었다.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을 일단 유보하고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 몰두하자는 것이며, 스탈린은 동부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루마니아 등을 일단 확보하고 난 다음에 시간을 벌어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자는 속셈이었다.
폴란드를 침략한 독일에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했으나 6개월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략했다.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발발했다.
폴란드 침공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순식간에 점령했다.
선전포고를 하고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준비가 없어서 폴란드를 위해 실제로 아무것도 해주지를 못하고 6개월 후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할 때까지 속수무책인 상태로 있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가짜 전쟁(Phony war)이라고 일컬었다. 사실상 폴란드를 위한 지원은 2차대전 내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독일, 신속한 기동력과 타격력을 가진 전격전이라는 획기적 전술을 선보이다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독일은 전격전(電擊戰)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을 선보임으로써 온 세계를 경악케 했다. 번개처럼 신속한 기동력과 타격력을 보여준 장면을 보고 당시 언론들은 최초로 '전격전(독일어로는 Blitzkrieg)'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하인츠 구데리안
독일 기갑사단의 창시자이자 뛰어난 장군.
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승전국보다 훨씬 앞선 공격이론을 개발했는데, 그 핵심은 탱크와 항공기를 이용해 적진을 신속히 돌파,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항공기는 적 통신시설과 지휘부를 폭격하고, 지상군이 진격하는 동안 화력지원을 강화시켜주며, 나아가 병력과 물자공수 기능을 수행했다. 한편 탱크 부대는 보병의 지원을 받으며 장애물을 돌파하고 적진 깊숙이 신속히 진격하는 것이었다. 전술의 원리는 3S, 즉 기습(Surprise), 속도(Speed), 화력의 우세(Superiority of Fire) 등 세 가지 요소를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1차대전에 비해 기술적으로 훨씬 개선된 무기들을 사용하다
새로운 전술은 새로운 발명품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1차대전 때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개선된 무기들을 사용했다. 탱크와 항공기의 속도와 화력, 그리고 장갑능력이 대폭 발전되었고, 대전차포가 등장하고 야전용 박격포가 채택되었으며, 휴대용 기관단총이 개발되었다. 또한 수송수단이 기계화되고 방독면과 위장술이 개선되었다.
1차대전식으로 싸우려 한 연합국, 독일의 전격전에 무기력하게 당하다
이러한 공격전술은 그 자체가 갖는 위력보다는 폴란드나 프랑스 · 영국 등 연합국 측에서 그러한 전술을 전혀 채택하지 않고 막연히 1차대전식으로 싸우려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차이가 크게 났기 때문에 더욱 위력을 발휘했고, 소위 전격전에 성공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차대전 승전국들은 미래의 전투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 채, 여전히 1차대전 때처럼 역시 방어가 중요하고, 방어를 이길 공격은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요새로 마지노 선을 구축했는데, 그것은 1차대전 때라면 난공불락이었겠으나 새로운 전격전에는 무력했다.
마지노선
프랑스가 독일의 위협에 대비해 구축한 전선이나 무용지물이 되었다.
영국인 풀러와 리들 하트, 전격전 이론의 선구자였으나 독일인들에게만 높이 평가되다
전격전 이론의 선구자들은 사실상 풀러(J. F. C. Fuller)와 리들 하트(B. H. Liddell Hart)와 같은 영국인들이었다. 그들의 저술은 서유럽에서는 읽혀지지 않고 오히려 독일 군인들이 높이 평가하고 탐독했다. 서유럽 국민들은 전격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비싼 값을 치르면서 그 위력적인 공격전술을 배우게 되었다.
독일군의 전격전, 폴란드 침략에서 위력을 선보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을 가한 폴란드 침략에서 독일군은 전격전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먼저 독일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의 급습 폭격은 폴란드 공군에게 이륙할 틈을 주지 않고 적 항공기를 단 이틀 만에 모두 파괴했다. 그리고 철도와 주요도로를 공중 폭격함으로써 폴란드 지상군의 기동을 막았다.
폴란드 군인
폴란드의 군인들이 독일 공군의 폭격에 대비하고 있다.
1차대전식으로 병력을 배치한 폴란드, 독일과 소련에 간단히 점령당하다
폴란드군은 전선 전체에 걸쳐 약한 곳도 강한 곳도 없이 병력을 균등하게 배치했다. 1차대전식의 병력배치였다. 독일군은 남쪽과 북쪽에서 대규모로 포위하고 선봉의 기갑부대는 간단히 전선을 돌파함으로써 삼각 포위망을 형성했다. 침략 18일 만에 독일은 인구 3,300만의 폴란드를 점령했다. 폴란드군은 전사 7만 명, 부상 13만 명, 포로 70만 명의 큰 손실을 입은 데 비해, 독일군 손실은 전사 11,000명, 부상 3만 명과 실종 3,400명에 불과했다.
폴란드군이 독일군에 저항하는 동안 소련군은 동쪽부터 파고들어왔으며, 9월 29일 히틀러와 스탈린은 폴란드를 동서로 분할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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