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3-17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3-17 /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여러분에게 주실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사모하며 착실하고 분별력있게 기다려야 합니다. 14)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이 전에 몰라서 악한 일을 저지르던 그 옛 생활로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15) 이제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초청해 주신 분이 거룩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주께서 ㄱ)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ㄱ. 레19:2) 17) 여러분의 기도를 듣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는 결코 불공평하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행한 모든 일을 정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부터 하늘나라에 들어갈 날까지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아가십시오.
구원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신 은혜를 인하여 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삶은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사욕"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온갖 욕심은 거룩과 무관하며 또한 그 삶을 방해합니다. 베드로는 이를 영적 무지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는 거룩의 삶을 추구하며 연구해야함을 강조합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13-14) 옛날 동양에서는 보통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걸을 때나 옷이 끌림으로 방해를 받을 때에 끌리는 부분을 허리춤으로 올린 다음 끈으로 동여맸습니다(출 12:11). 베드로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말한 것은 핍박 중에 두려움에 흔들리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며 냉철하게 즉시 행동할 준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사람이나 핍박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전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 영적으로 죽어있던 때에 따르던 사욕을 버리고 순종의 자녀로 살기를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옛 사람의 성품이 거룩한 삶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가 되라(15-17) 하나님은 거룩을 명하십니다. 경건치 않은 세상의 본을 따르는 대신 우리의 삶은 우리를 부르신 분의 거룩한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레위기 11장 44절 말씀을 인용하여 "주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나그네로 있을 때가 거룩을 이루는 삶을 살기에는 더 좋은 기회의 때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 때를 은혜를 소망하는 때로 삼고,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동 속에 신실한 목적이 들어있는지, 지혜로운 마음으로 하는지, 그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세상에 머물고 있는 시간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는 참된 안식을 결코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진정한 본향을 사모하며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적 용 : 당신에게 있어 신앙생활에 근신해야 할 부분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십시오. 당신은 일어나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위하여 갈망하는지요(레 11:45; 19:2; 마 5:48).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거룩함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내 의지가 아닌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만 하나님은 만나주십니다. 거룩함은 믿음과 함께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소중한 성품임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구원에 합당한 삶 PART I
벧전 1:13-17 / 조정의 목사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13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1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사도 베드로가 그동안 1~12절에서는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에 대해 찬송했습니다. 처음 인사말부터 복음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태초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실 것과 예수께서 피뿌림으로 구원하실 것을 미리 예정하셨으며, 우리가 바로 그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 12절까지가 그런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자부터 신약의 전도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러므로”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엄마는 자녀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말하면서 엄마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합니다. 신약의 많은 성경이 이와 같은 구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을 찬송하고 설명합니다. 로마서 11장까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한 저자는 롬12:1에서 “그러므로”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엡4:1에서도 그 전까지 복음에 대해 강조하다가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삶,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골3:1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음과 은혜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오늘 말씀이 부담스러운 의무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충분히 묵상하시고 그것에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본문 말씀을 시작하길 원합니다.
13절에서는 세 가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으니 이 세 가지를 순종하라,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은 “온전히 바랄지어다”(13)이고, 두 번째 명령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이며, 마지막 세 번째 명령은 “두려움으로 지내라”(17)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성도들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 구원의 은혜를 맛보았다면 그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다”는 허망한 기대가 아닙니다. ‘눈이 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학교가 쉬었으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강한 확신으로 그것이 당연히 일어날 것을 믿으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감정 뿐만 아니라 의지로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했는데 “온전히”라는 말도 역시 ‘완벽하게’ ‘완전히’라는 말입니다. 은혜를 ‘완벽하고 단단하게 붙들어라’, ‘마음을 고정시켜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조금의 의심도 불확실함도 없습니다. 이것을 히6:19에서는 “영혼의 닻”이라고 표현했고, 골1:23에서는 “터 위에 굳게 서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삶에 이런 확신과 소망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소망과 기쁨이 있는가, 강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은혜”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라고 하는데, 그런 큰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중심이므로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지?’라고 생각하며 그 사실에 놀랍니다. 우리는 마땅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의 밭에도 비를 주시고 그들의 건강을 붙들어주시며 우리의 매일의 삶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바라라고 했던 은혜는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있을 특별한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1:10) 은혜는 바로 예수님이 고난과 영광을 통해 이루실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가져다 주실 은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4)와 같이,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5)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 구원의 즐거움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구원의 절정, 최고의 기쁨과 축복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기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좀 지쳐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만 기억하고 그것만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천국을 떠올리면 지긋지긋한 이 세상을 벗어날 도피처로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베드로가 온전히 바라고 소망하라는 이 “은혜”는 그것 이상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최고에 이르는 상태, 완성된 구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예언자들이 간절히 알기를 원했던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통해 어떤 은혜가 임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것을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된 구원의 모습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소망과 기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과거의 구원의 즐거움을 상기해서 그 미약한 즐거움으로 겨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소망이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바라며 누릴 수 있고 또 누리게 될 구원입니다.
약1:6-8에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며,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 마음을 두고 염려하기 때문에, 마음에 정함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10)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구원이 이뤄질 그날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구원에 합당한 성도의 자세는, 그것을 기다리고 소망하며 확신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소망을 붙들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13) “동이다”는 말은 단단히 졸라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겉옷은 길이가 길어 어떠한 행동을 취할 때 옷을 가다듬고 띠로 둘러매었습니다. 또한 유월절에 피를 바르고 마지막 식사를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준비된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깨어있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정신을 차려라’,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깨어서 한 가지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도 베드로가 그것을 기억하고 썼는지도 모릅니다. 비유로 말씀하실 때 주인이 곧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시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6)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르게 분별하라”(롬 12:2),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라”(마 6:33), “죄와 헛된 것들을 벗어버리라”(히 12:1), “위의 것을 생각하라”(골 3:2-4), “진리의 띠를 띠라”(엡 6:14). 우리의 여러 잡다한 생각들, 마음과 정신을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가다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과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잡아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그 살아가는 모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와 같습니다.
딤후3장에서는 말세를 가리키며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신의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것이라고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 계속해서 말씀은 들으나 경건한 삶은 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배우나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다른 것들도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시에 사랑하고,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정함이 없고 경건의 능력이 없으며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사로잡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에 앞서 새로운 사람을 입으라고 한 것처럼,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꾼 뒤에 순종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가져다 주실 구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교회 안의 많은 분들이 “주님이 계신다”, “하나님을 바라봐라”,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부 열심히 해라”, “세상에서 살려면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영적인 가치를 바라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말세의 때와 같이 하나님과 동시에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근신하라”(13)는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술에서 깨는 것이고 또렷하고 멀쩡한 상태를 말합니다. 앞에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하여 마음과 생각을 정돈했다면 이제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열심히 동여매도 곧 느슨하게 풀어지게 만드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오늘날 ‘너도 진리이고 나도 진리이다’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세상의 시작은 진화론이라는 주장을 대부분의 신학교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많은 철학과 속임수들이 믿는 자들의 생각과 사고를 흐트러뜨리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하라”(딤전 6:20). 이것은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해도 ‘내 생각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흡수한 거짓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우리는 주일에 말씀을 듣고 마음의 허리를 동인 뒤 다음날이 되면 사람들로부터, 미디어를 통해,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으로 수만 가지 거짓된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정돈된 마음을 흩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베드로가 사용한 “근신하라” 즉, 술에서 깨듯이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죄악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 심리학, 문화, 영화, 드라마 등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것들은 진리가 아닌 거짓에 취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1:23),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2).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나는데 필요한 것은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갓난 아이처럼 복음에 합당한 삶과 구원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고 우리를 늘 깨어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지만 나는 공부하는 체질이 아니다’, ‘공부는 중요하지만 피곤해서 못하겠다’,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을 공부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이 독한 세상에서 어떻게 취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밤늦게 자고, 그 말씀을 읊조리기 위해 새벽녘에 깨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질 구원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구원에 합당한 삶에 첫 번째 행동은, 장차 우리에게 주실 은혜, 즉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지 못하는 것은 수많은 세상의 방해들이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키우는 방법도, 잘못된 가르침에서 피하는 방법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늘 묵상하시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베드로전서 1장 13-17 / 이장우 목사
성경을 볼 때에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설교 제목을 삼아도 중요한 단어를 중심으로 설교제목을 삼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중에 무슨 단어가 중요하게 여겨집니까? 저는 제목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제목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 단어를 중요하게 여겨서 설교의 흐름도 그렇게 전개를 하고자 합니다만 정작 전체의 흐름을 알려면 가장 중요한 단어가 ‘그러므로’라는 말입니다.
13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한 모든 것을 까닭으로 하여 이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2절까지 한 번 더 요약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각 지역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 편지 한 것입니다. 비록 흩어진 나그네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먼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가 다 나타납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일로 인하여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이제 본격적으로 증거 하려고 하니 먼저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통하여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시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는데 그 보호하심이 얼마나 완벽한가 하면 믿음의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정금같이 연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증거 하여 놓았고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한 것입니다.
방금 요약한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므로’ 하면서 다음의 말씀을 전개하여도 알 수가 없는 내용들입니다.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지금부터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계속되는 말씀에 아멘이 되시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예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면 하늘의 소망보다 땅에 소망을 두고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부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13절입니다.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한복이나 두루마기를 입고 먼 길을 가거나 일을 할 때에 허리에 끈을 묶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에서 허리에 끈을 매는 것에 대하여 출애굽기 12:11절을 봅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의 종살이를 하고 이제 하나님의 언약대로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하는 때입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짐승이나 사람이나 간에 초 태생의 수컷이 죽임당하는 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되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잡은 어린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서 먹게 되는데 먹는 모습이 허리를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먹어야 하는 것입니까?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떠나야 하기 때문에 허리에 띠를 띠고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허리를 동인 것입니다. 식사를 하다가도 신호만 떨어지면 바로 떠나는 자세로 먹는 것입니다. 이때에 허리를 동이는 것은 옷을 묶기 위하여 허리를 동이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를 때는 애굽에서 떠나기 위하여 허리에 끈을 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른 이 시대의 성도들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1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마음의 허리만 동일 뿐만 아니라 근신까지 하여야 합니다. 근신이란 술 취하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입니다. 세상이나 다른 것에도 마음 빼앗기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하시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다 불에 살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시에 허리에 띠를 띠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동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와 함께 하늘에 속한 영원한 기업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러므로’를 통과하여야 된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된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비록 자신이 땅을 향하여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말씀 앞에 회개하면서 다시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모습을 성경 한곳에서 더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12:35-40절입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도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혼인잔치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는데도 종들이 그렇게 깨어 있으면 그 종들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드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여도 마땅히 할 것뿐인 종에게 주인이 친히 허리에 띠를 띠고 종을 섬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28절에서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섬김을 먼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피 뿌림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랑함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주님 고대가를 부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또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역시 1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가 있습니다. 이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미 1-12절에서 성도에게 주어진 은혜와 또 약속된 은혜가 있습니다.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셨는데 그 소망은 하늘의 영원한 기업이며 그 기업을 받음과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 마름의 허리를 동이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가져올 은혜’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성도에게 주어질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이것은 이미 약속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몸의 부활과 하늘의 기업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일 낮에 보고 있는 고린도후서 3:18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이 가져올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성도에게 주셨고 또한 친히 마련하셔서 가지고 오실 이 은혜를 기다리기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를 알고 나면 은혜를 갚자는 식으로 나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 우리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져올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도 한량이 없지만 또 가져올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란 지금 우리의 몸으로는 다 받을 수가 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몸이 되어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의 형상과 같이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주의 영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14-16절입니다. 여기서도 ‘그러므로’를 붙여야 되겠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기다리는 자는 알지 못할 때에 사욕을 쫓던 것을 본 삼지 말고 순종하는 자식처럼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성경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다면 자식이 공부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서도 사주고 함께 매도 들고 상도 주면서 공부하도록 만들어내고야 마는 것이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마시겠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를 성령으로 구별하여 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이 구별입니다. 이 썩어질 세상에서 구별하여 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거룩이 없습니다. 이렇게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거룩하게 하신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마음 자세가 바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도입니다. 우리가 흔히 거룩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통하여 거룩을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먹는 것과 입는 것까지 구별되게 하였습니다. 먹는 것도 땅에 붙어서 기어 다니는 것을 먹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물고기도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어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먹을 수 있고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이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붙어사는 것은 먹지 못하게 하시 것입니다. 땅에서 떨어져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거룩이라 구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마음을 보십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간에 그 마음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보시지 않고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기에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의 구별이 아니라 속의 구별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속의 구별이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겉으로도 드러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찾은 것은 이 땅의 고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마음의 허리를 다시 여미고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산 소망의 요청
벧전 1:13-17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다.
잠 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재물에 마음을 두고 따라가는 사람은 망한다. 왜 그런가? 그 소망은 죽은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람의 소망은 산 소망이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 곧 산 소망을 가진 자에게는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요일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구별, 분리’를 뜻한다. 구별이란 말은 ‘하나님께 속했다’란 의미도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나타내고 있는가? 그러지 못하다. 여기에 갈등이 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현실의 삶 속에 주저 앉기 싶상이다. 그래서 거룩함과는 관계 없이 그냥 하늘의 소망만 가지고 산다.
그러다 보니까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형식적 신자, 세속화된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갈등의 문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초기 시대 성도들에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산 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이 땅에서의 삶보다 천국에서의 삶을 더 사모했다. 세상에서 자기 왕국 만들기 보다는 주님의 나라 건설에 더욱 헌신했다. 그래서 궁켈이라는 신학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이교세계와의 도덕적 생활의 차이는 매우 컷다’라고 말했다. 박윤선 박사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강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랜 질병에 장사 없다’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길어짐으로 인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되었다(6절). - 목숨의 위협, 극한 가난과 질병, 배고픔, 심리적인 갈등, 절망감, 도덕적 해이함등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하기 위해 써 보낸 것이 본 서신의 목적이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힘겨운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거룩함을 위해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거룩을 지키는 방법
1.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할 것.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 마음의 무장, 긴장감.
2)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자세.
3) 끝까지 온전히 바람
2. 사욕을 본받지 말 것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 알지 못할 때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사욕을 본받지 말고 - 사적인 욕심, 육체의 정욕, 자기 중심, 자기가 왕
3.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될 것
벧전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 우리를 부르신 자가 누구인가?
2) 거룩의 표준을 하나님으로 삼고 닮기를 원해야 한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요청.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두려움으로 지낼 것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 2)그분과의 관계 3)현재 자신의 신분 - 나그네(흩어진 나그네)
헌신자에게 임할 복
1) 은혜 - 미래적. 칭찬과 영광과 존귀(7절)
벧전 1:13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
2) 거룩 - 완전한 성화
벧전 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3) 상급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믿음을 지켰던 요셉 - 꿈
시 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산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거룩한 삶을 위해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2)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이전의 삶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
3)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긴장감)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 -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의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부터 20세에 걸쳐 하나님 앞에서 70개의 결심문을 작성하고 매일, 매주, 매달, 그리고 매해 그 결심문에 의해 자신의 삶을 점검하면서 평생을 살려고 했다.
에드워즈의 자서전에서 "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순전하고 달콤하고 복된 복음의 법칙에 따라 살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서 진보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거룩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37.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내 가 자신을 부인했는지 등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또한 매주 말, 매월 말, 매 연말에도 그렇게 하자.
그가 죽은 지 약 150년이 지난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의 삶을 연구해 본 결과 후손들은 모두 873명이었다. 그 가운데 대학총장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목회자와 성직자 100명, 군장성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국가 공무원 80명, 국회의원 5명, 미국 부통령 1명, 그리고 260명의 평범한 신앙인들로 살고 있다.
적용 : 이번 한 주간, 욕하지 말자, 거짓말하지 말자. 거룩한 입으로.., 비방, 비난하지 말자!
지금은 허리를 동이고 신앙생활 때입니다
벧전1:13-17 / 김진수 목사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출12:11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라는 말에서 왔을 겁니다. 긴 의복을 허리띠로 졸라매는 것처럼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겁니다. 뭡니까? 교회생활은 광야생활과 같다는 거잖아요 광야생활은 자그마치 40년 동안 자신과의 싸움이요 환경과의 싸움이요 불신앙과의 영적싸움이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도 다르지 않지요. 예수 믿고 시작된 교회생활에서의 사단과의 영적싸움은 우리가 생명 다하기까지 치루 게 될 것이고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은 유혹도 이겨야 하고 어려움도 감당해야 하고 핍박도 있을 것이고 사단이 틈을 노리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이끄시는 대로 조심조심 교회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에서 40년 광야생활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삶의 태도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신약성도들에게 요구되고 있음을 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그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수많은 싸움을 겪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압박을 당하잖아요. 이 싸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뼈가 마르고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실패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깨어지는 가정 갈라서는 식구들 사업의 실패로 오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위기 그런가하면 목사와의 갈등 성도간의 갈등 자신과의 갈등 같은 신앙의 위기도 있잖아요. 이런 싸움들을 겪으면서 교회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뭐라고요?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이 허리에 띠를 띠고 구름기둥 불기둥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았던 것처럼 마음의 허리를 동임으로 내 욕구가 아닌 하나님의 욕구를 따라 사는 용기를 갖게 하지요. 마음의 허리를 동임으로 더 이상 내가 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라가잖아요. 그 가는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믿음으로 따라갑니다.
홍해를 향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됩니까? 거긴 길이 없는데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길이 아닌 곳을 향하여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뭡니까? 마음의 허리를 동였으니 갈 수 있다는 거지요 그 길을 가길 잘했습니다.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도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내 임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뭘 경험하게 됩니까? 바다에 길을 내심처럼 길을 내시더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살지 말자고요 지금 우리는 마음에 허리를 동이자고요 그리고 영혼의 귀를 하나님께 기울이고 주님께 늘 가까이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근신하라고 말씀하지요. 근신하다는 헬라어 ‘네폰테스’는 ‘술 취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술 취하는 것처럼 사람을 후회하게 만드는 일이 있을까요? 술에서 깨고 나면 후회가 밀려옵니다. 근신하라는 말 역시 허리를 동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말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어떻게 하랍니까?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이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에서 온전히 라는 말과 끝까지라는 말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끝까지 온전히 주실 은혜를 소망하라는 말씀이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미래에 확실한 보장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끝까지 온전히 주실 은혜를 소망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주시는 은혜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날 순간순간 현재에 계속주의 은혜는 주어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4절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예수 믿기 전에 삶이 어떠했습니까? 순전히 인간적 사욕을 위해서 살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예수 믿는 지금의 삶은 어떻다고 말씀하십니까? 순종하는 자식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자식으로 산다는 거지요 그 하나님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이 15절에 뭐라는 건가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 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하나님은 거룩하시지요. 그러니까 그분께 순종하는 자녀인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을 이뤄야 한다는 겁니다. 거룩은 두 가지가 있어요. 의식적인 거룩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거룩입니다.
의식적 거룩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요. 그리고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물 항아리에 물을 받아서 종들이 손과 발을 씻어주는 정결예식을 말하는 이것은 의식적 거룩입니다.
관계 속에 드러나는 거룩은 하나님이 거룩하심처럼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거룩해 지는 것은 노력과 수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소유하게 되는 겁니다. 18절과 19절 보세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 거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저 천성에 임할 때까지 절대로 변하지 않지요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써의 거룩한 생활을 이루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부 클레멘트는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거룩함과 일치하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16절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기록되었으되 앞에 헬라어 ‘왜냐하면’ ‘디오티’가 있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것이 뭘까요? 레11:44절에서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 독생자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모든 불결함을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당신의 거룩하심을 모든 믿는 자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된 예수 믿는 우리를 성도라고 말씀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곳을 성전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재단에 기구들을 성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거룩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7절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 두렵고 떨림으로 지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아니시므로 자기백성인 성민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우상과 풍속을 쫓아갈 때 징계하셨습니다. 성민이 믿음을 저버리고 원망하면서 살아갈 때도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들이 잘못 살아갈 때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집고 넘어가셨습니다. 왜요? 저들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함이 나타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 데요 이 말은 공정하게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신분과 조건 등에 구애되지 않으시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니까? 참 진리이시니까 그리고 선악의 절대 기준이 되시니까 그러므로 그분의 판단은 공평정대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인생은 선과 악이 뒤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별하는 그분의 방식은 한두 가지의 죄로 말미암아서 거룩한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치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분하시는가요? 그가 예수 믿어 성령의 사람인지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인지로 나누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예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괜히 거룩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을 이루며 살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수3:5절에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기이한 일들을 하나님이 언제 행하세요.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거룩하게 할 때입니다. 너무도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울수록 우리가 필요한 것이 뭐예요? 죄를 멀리하는 거룩함입니다. 그 기이한 일은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지요. 죄를 미워하고 주의 거룩하심을 닮아갈 때 우리를 가로막고 서있는 난공불락도 무너지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대적이 기승을 부립니까?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왜 그렇게 커 보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쇠해서인가요? 아니지요 우리의 거룩이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여리고성의 물건들을 따로 훔쳐놓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거룩이 훼손된 아간이란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모두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이라는 작은 성에서 참패를 당한 겁니다. 교회의 싸움은 거룩을 잃어버리지 않는 데서 승리합니다. 성도들 각 사람이 거룩으로 살아갈 때 가정을 지켜낼 수 있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룩이 사라지면 연약한 교회가 되고 힘없는 가정이 되는 것임을 알아 강한 교회 든든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삶
벧전 1:13-17
우리는 주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아버지와 같이 거룩하게 되고 그분과 같이 높은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삶처럼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이전의 더러운 죄의 삶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정결한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주님의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 거룩한 삶을 품어야 합니다. 죄를 싫어하고 정결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더러운 행실이 어떻게 큰 문제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해도 부지중에 죄에 빠지는 것이 우리의 약함입니다. 그런데 아예 거룩하게 살려 하는 마음이 없고 그저 자신의 욕심대로 세상 풍조대로 삽니다. 죄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독이 되는 음식을 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를 피하고 미워하고 죄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벗어나려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심각한 어둠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눈이 멀고 감각이 둔하게 된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죄는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죄에서 벗어난 자들이요 죄를 미워하는 자들이요 더 이상 죄를 허용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아주 강하고 죄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이 점에서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할 수도 있고 낮은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지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야 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하든 부하든 지식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거룩한 삶을 알지 못하고 이것과 상관없이 살고 있다면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 것이고 그 나머지 삶은 다 헛된 것입니다. 건강도 부도 지식도 명예도 다 헛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이 어리석은 지 모릅니다. 자신이 죄에 빠져 있으면서 추구하는 모든 행복과 성공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위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거룩한 삶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삶의 중심입니다.
거룩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축복하십니다. 삶이 불순종으로 더럽혀 있으면 아무리 축복을 주시려 해도 주실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원리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에 주어질 은혜는 거룩한 자들을 위한 것이지 더러운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얻을 은혜를 바라는 자들은 당연히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인생은 지금 여기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다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사실상 장차 나타날 세계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복을 누린다 해도 장차 주께서 임하실 때 그의 진노의 심판 아래 처하게 된다면 이는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 이 땅에서의 행복만을 붙들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현재 누리는 복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행복을 위해서 그들이 행한 죄로 인해서 당할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얼마나 좋은 것을 누리는가 하는 것보다 더 장차 주께서 임하실 때 그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담대히 설 수 있는 사람은 주의 피로 구속함을 얻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삶을 산 사람들만이 주님의 오심을 환영할 수 있고 이들만이 그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삶 가운데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산 사람들은 주님의 오심을 즐거이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모든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장차 오셔서 주실 은혜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비록 많은 즐거움을 누리지 못해도 주께서 장차 임하셔서 주실 놀라운 은혜를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거룩하게 하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장차 주께서 오셔서 주실 은혜를 사모하면 할수록 더욱 거룩한 삶을 향해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고 오직 거룩한 백성들만이 그 영광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이전의 더러운 행실에 더 이상 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행한 욕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전 알지 못할 때' '사욕을 따라'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을 때 보이는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그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욕심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것들을 원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런 우리 안에 주신 건강한 소원을 그의 간악한 속임수로 더럽힙니다. 우리 안에 욕심을 품게 하고 이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이전에 우리 안에 이렇게 불순종과 죄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욕심이 있었고 그 욕심이 이끄는 대로 죄악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거룩이란 이 욕심을 따라 행하는 삶에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욕심을 따라 행하는 삶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행복이 우리의 욕심에 따라 살 때 주어진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단의 속삭임에 따라 행할 때 즉 욕심을 따라 행할 때 죄에 묶이고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순종이 복입니다. 순종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주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가 아니고 자신의 감정이 아니고 그분의 뜻이 자신을 주장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것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말씀에서 어긋난 것들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 뜻이 아닌데도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 뜻이 아니라면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통해 더욱 더 거룩해지려는 소원이 강해지고 또 말씀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는 능력을 경험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은 새로운 인생의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 오실 때 놀라운 영광과 존귀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라시니 거룩하십시오
베드로전서 1:13-16
제가 3월 1일부터 두 달 간 안식월을 갖습니다. 다음주에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하는 데요, 설교는 하지 않아서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두 달 설교를 쉬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은 좀 더 집중해서 들으십시다.
지금 한국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문제가 심각한 거 같아요.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보니까, 오후 4시 기준(한국시간)으로 24시간 만에 229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누적 확진자가 433명이었어요. 5일이나 확진자가 없었는데, 이단인 신천지와 관련해서 대구와 청도에서 무더기로 나오고, 그게 전국으로 퍼져가고 있어요. 그에 반해 독일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어서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16명의 확진자가 나왔는데, 그중 14명이 바이에른이고, 2명은 우한에서 온 독일교민이 비행기에서 나와서 격리되어 있어서, 현재 바이에른 외에는 확진자가 없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독일에서는 너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한국을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세요. 무엇보다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확진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또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이런 모든 것이 관리가 잘 되어서 예배마저도 인터넷으로 드려야 하는 상황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제 말씀을 볼게요. 원래 오늘 말씀은 조금 넓게는 1:13-25절로 끊거나, 아니면 1:13-2:3절로 끊어서 읽어야 하는 말씀이에요. 우리가 지금까지 1:3-12절에서는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잖아요, 그리고 이어지는 13절부터 25절까지 또는 2:3절까지는 그 소망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에요.
오늘은 그 첫 번째로 ‘거룩’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해요. 16절을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성경 아래의 주석을 보면 레위기 11:44, 19:2, 20:7, 이렇게 구약에서 인용된 것이라고 주석이 달려있는데요,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에요. 이미 그 이전 레위기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주시기 전에 시내산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신 말씀도 ‘거룩하라’는 거였어요. 출애굽기 19:6절이요,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그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인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룩이 빠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거룩하십니까. “너희도 거룩하라”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드세요. 지난 금요일에 제자훈련에서 나누었던 주제도 거룩이에요. 제가 제자훈련을 하면서 우리가 ‘거룩’이라는 단어에 대해 갖는 두 가지 반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한 부류는 아예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고, 연약하고, 거룩함과는 거리가 머니까, 거룩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속해 있고, 나와는 별 관계없는 말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아마 대부분이 그럴 거예요.
또 다른 한 부류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고, 우리는 그럴만한 힘도 없고 여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교우들이에요. 아무리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삶의 절망감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있고, 가장의 무게로 어깨가 짓눌려 있는데 실직을 하기도 하고, 여전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 때문에 힘들어 하는 청년들도 있구요, 이런 상황에서 매번 넘어지는 데 어떻게 거룩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냐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디에서, 그냥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 없이 사는 거 1번, 이 땅의 삶이 거룩을 생각하며 살기에는 녹록치 않아서 늘 넘어지면 살아서 힘들다는 거 2번, 어떻습니까. 손 안 드신 분들은 3번, 다 거룩한 분들인가요.
허리를 동이고 은혜를 바라며
오늘 말씀을 하나씩 살펴볼게요. 우리가 이미 베드로전서를 읽어오면서 말씀 속에서 깨달은 것들이요,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은 내가 만든 소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소망이고, 하늘에 둔 소망이라서 썩지도 더럽지도 쇠하지도 않는다, 그 소망은 지금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 그러니 우리 하늘의 소망을 이 땅에서 살아내자, 그리고요, 13절이 ‘그러므로’ 이렇게 시작해요.
“그러므로”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소망을 살아내려면 은혜를 바라라는 거예요. 베드로는요, 우리가 어떻게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그 시작을 은혜에서 보는 거예요. ‘온전히 바란다’에서 ‘온전히’는요, 흐트러짐 없이 집중하는 것을 말하구요,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있고, 이미 결과가 나올 것을 알아요. 내가 할 일은 그 결과를 향해 흐트러짐 없이 나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온전히 바라는 거예요. 뭘요, 은혜를,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은혜를 바랍니까. 그 은혜를 알면 결국 승리할 수가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구원은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결국 승리하고야 말, 예수께서 이미 구원의 승리를 선포하셨고, 우리도 그 은혜를 따라 승리할 것이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흐트러지지 말고, 그 은혜를 사모하자, 어떻게,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이 말은요, 유대인들에게는 관용적으로 사용되던 말 중에 하나에요.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를 할 때보면 네 번에 걸쳐 포도주 잔이 돌아가면서 아주 천천히 식사를 하고 성찬을 나눕니다. 그런데, 첫 번째 유월절 식사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게 언제 시작되었냐면요, 출애굽기 11장을 보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을 탈출하도록 계획을 알려주시면서요,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리고는 식사를 하게 하시거든요. 그게 유월절 식사에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먹냐면요, 출애굽기 12:11절을 읽어볼게요,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어떻게 먹으라고 하시냐면, 허리에 띠를 띠고 먹어라, 신도 신고 먹어라, 지팡이도 손에 잡고 먹어라,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언제라도 뛰어 나갈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구요, 한 발이라도 늦으면 유월절 대탈출이 허사가 될 수도 있으니, 너희의 최선을 다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안 하면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준비해라,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 유대인들은 허리에 띠를 맨다는 말을 영적으로 준비하다, 무장하다, 이런 뜻의 관용구로 사용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1:35절에서, 천국을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이렇게 말씀하시구요. 베드로는 그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이렇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어요. 그렇게 큰 복음의 은혜에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 은혜가 진짜 우리의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요, 기대하고 준비하고 영적으로 무장하고,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을 향해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은혜를 은혜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실패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하신 일들 중 가장 큰 일을, 가장 귀한 일을 알지 못한 채, 다른 것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가 진짜 가슴에서, 내가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코스타를 다녀왔는데요. 이번에는 코로나의 두려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를 못했어요. 그런데요, 모인 청년들이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는지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은혜를 찾겠다고 모인 거예요.
강사들이 한국에서 많이 왔는데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한 분은 비행기에서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그 강사가 기도하면서 무엇을 생각했겠어요. 입국을 거부당하면 한국에 갔다가 바로 다시 돌아와야 겠다는 것이었어요. 또 한 강사는 어려운 이들을 길거리에서 섬기는 분인데요, 그러니 좀 저렴한 비행기를 타려고 중국을 돌아오는 것을 미리 끊어 두었어요. 그런데, 이번 바이러스 논란이 생기면서, 그건 고스란히 날려버리고 다시 비행기를 끊어서 왔어요. 또 한 분은 티켓팅을 하면서 이름을 잘못 적었다는 거예요. 그 비행기도 경유를 해서 들어오는 건데, 한국에서는 보내 줄 수 있지만 경유하는 곳에서는 리젝트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급히 또 아주 비싼 가격에 다시 비행기를 끊어서 왔구요. (참 모자란 강사들이 많지요. 그런 거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좀 잘 난 거 같아요.)
물론 자신들의 실수도 있지만, 그들이 그런 실수나 어려움 앞에서도, 놓지 않고 먼저 생각한 것이 이 유럽 땅의 청년들이에요. 이렇게 자기 돈 들여서 섬기는 거거든요, 그러다 돈도 두 배 세 배 더 들고, 당황스런 일이 생기고 하면, 실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생기면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청년들이 있는 곳에 가겠다는 마음,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어떤 상황에서도 허리를 동이고 은혜를 얻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모이는 데, 안 좋을 리가 없지요. 청년들이 은혜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거룩함으로
그런데요, 그것으로 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허리를 동이고 노력해서, 그 은혜를 바라는 마음이 나타나야 할 삶이 있어요. 그게 ‘거룩’이에요. 너희는 지금 순종하는 자녀다, 지난주에 신정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자녀는 부모는 닮는다고 하잖아요. (이번에 코스타에서 강사들이 예리를 보고 이쁘다는 거예요. 누구를 닮았냐고 물어요. 아니 보면 모릅니까, 제가 그 앞에 있는데, 왜 절 보고 묻습니까. 당연히 아빠를 닮았지요. 그래서 그렇다고 말해주는 데 놀라기는 또 왜 놀랍니까.) 그런데, 외모만 닮나요, 아니에요. 성격도 닮고 성품도 닮습니다. 나는 안 그랬는데, 도대체 내 아이들은 왜 저럴까, 답답하시죠. 여러분이 그랬어요. 여기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대로 순종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예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욕심을 갖지 말라는 거예요.
그 대신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거룩’이에요.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아멘. 거룩이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이니까, 자녀인 너희도 거룩하라, 이 말씀이에요.
여러분, 거룩이 뭘까요. 이 거룩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하기오스’인데요. 이게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카도쉬’ 라는 단어에요. 이 카도쉬의 의미를 보면 두 가지의 뜻이 있어요.
하나는 ‘분리되다’ 이런 뜻인데요, 이게 오늘 본문의 14-15절에서 나오는 의미에요. 너희는 예전의 그 욕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옮겨가라, 이거요. 거룩하다는 것은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욕심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 가치를 두고 그 안에서 살려고 하던 내 육신의 성품이 내려놓아져야, 그래야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거룩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룩의 또 하나의 뜻은요, ‘빈틈없이 좁혀진 관계’ 이런 의미도 있어요.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가 하나님과 빈틈없이 좁혀지면 그게 거룩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빈틈없이 좁혀질 수 있을까요, 가까이 가면요, 가까이 간다고 해서 틈이 안 생기나요. 생기죠.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안기는 거예요. 푹 안기는 거요. 완전히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게 거룩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약해서 거룩함을 이룰 수 없다, 당연히 안 되죠. 우리가 무슨 수로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있겠어요. 그게 어떻게 노력으로 되나요. 그런데, 방법이 있어요. 내가 주님 품에 완전히 안기는 거예요.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힘 있게 안으시는 그 가슴에 안기는 겁니다. 그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방법이에요.
결국 거룩은요, 내가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비전의 문제이고, 방향의 문제이고, 내가 지금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가, 내 삶에서의 가치의 문제에요. 보세요. 구약에서는 거룩하려고 애썼는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은혜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어요. 우리더러 이미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거룩한 존재에요. 나는 거룩한 존재다, 거룩함이 나의 정체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하신 가장 큰 일이다,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얻은 거룩함은 하나님으로부터이니,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돌리고, 하나님의 품에 나를 완전히 맡기는 거예요. 그때 내가 할 수 없는, 나는 본질상 죄인이고 나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거룩을 하나님께서 함께 이루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를 창조하시고, 십자가로 죽기까지 구원을 이루시며 우리에게 거룩하다 하셨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신 그 하나님이, 이제 지금 우리에게 거룩하라 하시면 거룩하면 됩니다. 안 된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몰라서입니다. 나를 와락 안으시는 하나님께 나를 맡기면, 그때 우리는 이름만 남은 말로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즉 ‘행실’에서도 거룩하게 되는 거예요.
코스타에서요, 금식을 하며 중보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어요.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지금 누군가가 내어 놓은 피 토하는 죄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데요. 그 젊은이들 속에 통곡하는 기도의 외침이 있어요. 욕심에서 죄악에서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구별되게 해 달라는 그 뜨거운 외침이 얼마나 진실하게 들리던지요. 고백이라도 외치기라도, 하나님이 팔을 벌리시면 가려고 발버둥이라도 치잖아요. 결국 그들을 살리게 될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거룩하다고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자녀처럼 순종하고 거룩하라고, 자녀니까 가슴에 꽉 안겨 더 이상은 벗어날지 말라고, 그게 자녀의 삶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라시니 우리 거룩한 행실을 사십시다. 내가 하는 발버둥이 아니라, 세상에서 돌이켜 구별되어 주님 품에서 이루는 거룩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함께 거룩을 살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