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47
■ 3부 일통 천하 (70)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9장 여섯을 하나로 (1)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소진(蘇秦)은 머릿속으로 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친구라면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대문을 열자마자 연(燕)나라에서 데리고 온
심복 부하 하나를 불렀다.그 부하의 이름은 가사인(賈舍人).
가는 성(姓)이요, 사인이란 집안 일을 돌보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됨이 성실하고 신중하여 소진(蘇秦)은 조나라에 와서도 늘 곁에 두고 부렸다.
가사인(賈舍人)은 소진이 열국 순방을 떠나려는 줄 알고 달려와 말했다.
"염려마십시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습니다."
"아니네. 열국(列國) 순방은 연기되었네. 나는 당분간 여기에 머물 것이네만,
대신 자네가 좀 할일이 있네.""하명만 내리십시오. 무엇이든 처리하겠습니다."
"지난날 나와 동문수학한 친구 중에 장의(張儀)라는 사람이 있네. 그는 위(魏)나라 대량 사람이라,
아마 지금쯤 대량(大梁)에서 지내고 있을 것이네."
"자네는 곧 장사꾼으로 변장해 대량으로가 장의(張儀)를 찾아보게나. 부탁이란 다름이 아니라........"
소진(蘇秦)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한참 동안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알겠는가? 일을 마치고 한단(邯鄲)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또 음성을 낮추어 속삭였다."내 말대로 행하되, 조심하고 또 조심하게. 결코 눈치채여서는 안 되네."
"명심하겠습니다."다음날 가사인(賈舍人)은 소진에게서 1천 금을 받아 상인으로 변장한 후
위나라 도읍 대량(大梁)을 향해 떠났다.
장의(張儀)
그 역시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안고 귀곡 선생 문하를 떠나 고향인 위(魏)나라
대량으로 돌아왔다.능력으로 치면 장의(張儀)가 소진보다 한 급 위였다.
'내가 태어난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치리라.'그러나 그 결심은 혼자만의 꿈에 불과했다.
그는 각방으로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무도 그를 천거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을 직접 추천하는 자천(自薦)의 글을 써 위혜왕에게 올려보기도 했으나 위혜왕(魏惠王)은
그 글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실망한 장의는 위(魏)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남방 대국 초(楚)나라에서 나의 꿈을 펼쳐보자.'
그는 집안을 정리하여 아내와 함께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초나라 왕은 초위왕(楚威王)이었고, 재상에 해당하는 영윤은 소양(昭陽)이라는 사람이었다.
장의(張儀)는 소양을 찾아가 스스로 문객이 되기를 청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양은 장의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다.
이 무렵 초나라의 수도는 언영(鄢郢)이었다. 언영은 원래 약(鄀)이라는 땅이었으나,
춘추시대 말기 오자서에 의해 도읍인 영성이 함락당하자 초소왕(楚昭王)은 도읍을
약 땅으로 옮기고 이름을 언영으로 바꾼 것이었다.지금의 호북성 자충현 일대다.
초위왕(楚威王)은 야심이 큰 왕이었다.
즉위하자마자 오기(吳起) 때 키운 군사력을 바탕으로 매년 전쟁을 벌여 영토를 조금씩 넓혀갔다.
BC 336년(초위왕 4년)에는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에 초위왕(楚威王)은 소양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화시(和氏)의 벽(璧)'을 하사했다.
벽이란 곧 둥글게 다듬은 옥(玉)이다.'화씨의 벽'은 유명하다.
여기서 잠시 그 유래를 살펴보자.
초(楚)나라가 아직 왕호를 사용하기 전인 BC 750년 경의 일로 춘추시대가 막 태동한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 초나라 임금은 분모(蚡冒).초(楚)나라에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있었다.
변은 지명이요, 화는 성(姓)으로 변 땅에 사는 화씨(和氏)라는 뜻이다.
그는 형산(荊山)에서 예사롭지 않은 옥돌 하나를 주워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인 분모(蚡冒)는 옥공을 불러 옥돌을 감정해보게 했다.그런데 그 대답이 뜻밖이었다.
- 이건 옥(玉)이 아니라 그냥 돌입니다.- 네 이놈,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을 옥이라 속였으니,
어찌 무사하길 바라겠느냐. 당장 저 놈의 왼쪽 다리를 끊어라!
이렇게 해서 변화(卞和)는 다리를 잃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그 후 분모가 죽고 그 아들 웅통(熊通)이 왕위에 올랐다.그가 초무왕이다.
초무왕(楚武王)은 춘추시대 최초로 왕호를 사용한 임금으로, 초나라를 일약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군주이기도 하다.변화(卞和)는 또 초무왕에게 형산에서 주운 옥돌을 바쳤다.
초무왕(楚武王)도 옥공을 불러 감정해보았으나 결과는 역시 보통 돌이라는 대답이었다.
초무왕 또한 화가 나 변화의 오른쪽 다리마저 끊어버렸다.
초무왕이 죽고 초문왕(楚文王)이 왕위에 올랐다.변화(卞和)는 초문왕에게 자신의 옥돌이
보통 돌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나 두 다리가 끊어져 능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형산(荊山) 아래서 옥돌을 가슴에 품고 사흘 낮 사흘 밤을 통곡했다.
어찌나 눈물을 많이 쏟았던지 나중에는 눈물 대신 핏물이 흘러내렸다.
'화씨(和氏)의 혈읍(血泣)' 이라는 말이 있다.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피눈물을 쏟는 경우에 쓰는 말인데, 이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친구 한 사람이 그런 변화에게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대는 두 번씩이나 옥돌을 바치려다
두 다리를 잃었다. 그런데 또 어찌하여 그것을 바치지 못해 피눈물까지 흘리는 것인가?
그대는 그토록 상을 받고 싶은가?변화(卞和)가 얼굴색을 바로하고 대답했다.
- 내 어찌 상을 타기 위해 이 옥돌을 바치려 할 것인가. 나는 다만 이 귀한 옥돌을 보통 돌이라고
감정한 그들을 원망할 뿐이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사기꾼이라 손가락질 하고 있네.
-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는데 내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의 옳음을 증명하지 못해 그것이 슬퍼 울고 있는 것이네.
변화(卞和)가 피눈물을 흘린다는 소문이 퍼져 초문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초문왕(楚文王)은 사람을 보내 그 옥돌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옥공을 불러 감정을 하게 했다.
옥공(玉工)은 돌을 유심히 살펴보다다가 칼로 돌의 겉부분을 깎아냈다.
그러자 아름다운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그것은 정말로 세상에 보기드문 옥돌이었던 것이다.
초문왕(楚文王)은 옥공을 시켜 둥근 고리 모양의 벽(璧:구슬)을 만들고, 그것을 '화씨(和氏)의 벽'
이라고 이름 붙였다.아울러 변화의 정성에 감동하여 그에게 대부의 국록을 내렸다.
지금도 양번시 근교에 있는 형산(荊山)에 가면 포옥암(抱玉巖)이라는 바위와 석실이 있다.
두 다리가 끊긴 변화(卞和)가 옥을 품에 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74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