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북부 주민들 “남쪽으로”… 당나귀 수레-도보로 필사 탈출
[중동전쟁]
이스라엘, 가자 북부 주민 대피령
피란민 차량 몰려 도로 극심한 정체… 칸유니스 등 남부도시 난민 넘쳐나
환자-임신부 등은 대피 못하고 남아… 이스라엘, 수도-전기 차단 고통 가중
‘당나귀 수레’ 타고 탈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본거지인 가자지구에 지상 작전을 예고하며 주민 110만 명에게 대피 통보를 한 가운데 주민들이 필사의 탈출에 나섰다. 13일(현지 시간) 도로에는 담요와 매트리스를 가득 실은 차량들이 몰려 정체를 빚었고 일부는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가자시티=AP 뉴시스
“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 북부의 거점도시 가자시티에 살았던 건축가 카리만 마슈하라위 씨(27)가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전한 피란 심경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지상군 투입이 임박해지자 13일(현지 시간) 50여 명의 가족, 친지들과 가자지구 남부로 피란길에 올랐다.
마슈하라위 씨 일가는 피란 첫날 야외에서 쪽잠을 잤다. 다음 날에는 남부 라파의 한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지만 이곳에도 이미 30여 명이 있어 사실상 거주지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로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며 험난한 피란 생활을 토로했다. 거듭된 공습과 구호물자 부족 등으로 가자지구 전체의 인도주의 위기 또한 고조되고 있다.
● 당나귀-도보로 필사 탈출
한국 세종시와 비슷한 면적 365km²의 가자지구에는 230만 명이 거주해 인구 밀집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중 이스라엘의 지상군 공격이 집중될 가자지구 북부에만 약 110만 명이 산다. 강제로 이곳을 떠나야 하는 주민들은 물, 식량, 생필품 부족은 물론이고 육로 탈출구 폐쇄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현재 가자지구 도로 곳곳에는 담요와 매트리스를 가득 실은 차량이 한꺼번에 몰려 극심한 정체를 빚고 있다. 차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이용하거나 아예 도보로 이동 중인 사람도 많다. 현지 소셜미디어에는 “가자지구 남쪽으로 이동할 운전사의 전화번호를 구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같은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가자지구 북부 주민이 대거 몰려온 남부의 중심 도시 칸유니스 또한 피란민으로 넘쳐나 혼란이 상당하다.
탈출 과정에서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 떠나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스라엘은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미 주요 탈출 통로에도 공습이 가해지고 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피란 행렬을 공격해 13일에만 최소 70여 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다쳤다고 주장했다.
가자시티 주민 아흐마드 오칼 씨(43)는 WP에 “남쪽으로 이동하는 민간인이 공습의 표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두렵지만 남쪽으로 가는 길에 아내와 아이들의 목숨을 걸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또한 “인구가 밀집한 전쟁터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물, 음식, 숙박 시설도 없이 이동시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고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 남은 주민 고통도 극심
이동이 어려운 고령 환자, 임신부, 장애인 등은 아예 대피조차 못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4일 성명을 통해 “의료진과 환자의 강제 대피는 재앙적인 현지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규탄했다.
실제 가자시티의 알꾸드스 병원 측은 14일까지 대피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아직 시설 폐쇄를 거부하고 있다.
이슬람 구호단체 적신월사 측은 “투석이 필요한 중환자, 인큐베이터의 신생아 등 수백 명에게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며 당장 피란을 갈 수 없다고 했다. 적신월사 관계자 또한 환자가 대피하지 않는데 자신들만 떠날 수 없다며 남아있겠다는 입장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내 식수와 전기 공급 등을 차단한 것 또한 남은 주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은 깨끗한 수돗물을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로 인해 출산이 임박한 최소 5000명의 임신부 또한 식수와 출산에 필요한 물을 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 비상 발전기조차 여의치 않은 일부 병원에서는 의료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제사회의 구호품 또한 운송 통로가 막혀 거의 전달되지 않고 있다.
하마스가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인은 물론이고 가자지구 주민까지 ‘인간 방패’로 이용하기 위해 주민 대피를 막는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돈다. 이스라엘군은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하마스가 주민들의 피신을 막고 있다. 관련 증거를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마스가 대피소에 머물다 남부로 피신하려던 일부 주민의 자동차 열쇠 등을 압수했다는 것이다. 하마스 측은 이에 대해 “이스라엘의 가짜 선전전”이라며 민간인 이동을 막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윤다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