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상한 그녀가 나름 흥행에 성공한 듯 합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있으니 걍 간략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아들만 바라보며 사시던 할머니는
대학교수로 성공한 아들에겐 마음의 빚으로 항상 가슴 한구석이 먹먹한 분이시고,
며느리에겐 과거의 유물로 화해가 불가능한 극복 대상이며,
잉여인 손자, 손녀에겐 호불호가 갈리는 분이십니다.
이 할머니가 우연한 기회에 정체불명의 사진관에서 사진촬영 후 20대
젊은 시절의 외모로 돌아가게 되고,
그것을 기회로 할머니는 젊은 시절 해보지 못한 가수의 길을
잉여 음악가인 손자의 도움으로 걷습니다..
이러한 젊음이 주는 달콤함이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전개되다
손자를 위해 다시 늙음을 선택을 하고, 잉여 손녀가 자기 대신 가수의 길을
걸으며 나름 해피엔딩으로 마감합니다.
저는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으로 노래를 꼽았습니다.
잉여 가수인 손자는 음악 장르로 저항의 상징인 록을 선택했습니다..
그것도 하드 록 계열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음악을 들은 20대 할머니는 자신을 보컬로 영입하려는 손자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음악은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니들 음악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흘러나오는 곡이 포크 송으로 분류되는 세샘트리오의 “나성에 가면”입니다.
저의 짧은 음악 상식으로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포크 송은
미국의 중산층 등장과 함께 10대들의 저항을 노래한 록이 유행하기 전
미국 중산층에게 광범위하게 퍼진 음악 장르입니다.
흑인의 고단한 삶을 노래한 흑인 포크 송 계열은 나중에 재즈로 진화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백인들의 포크 송은 당시 중산층의 편안함에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이 중산층의 편안함이 일렉트릭이 첨가되며 가벼운 록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입니다.
포크송으로 대표되는 할머니의 기존의 보수적 가치는 일렉트릭 사운드로 분칠된 음악처럼
20대 처녀로 인하여 재조명됩니다.
할머니의 보수적 가치가 젊은 20대 처녀에 의해서 현재 시간에서 소소한 헤프닝으로
미화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20대 할머니는 꼬마 아이를 대상으로
꼬추를 따먹는(?) 성추행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지하철 애기엄마를 대상으로 개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망언(?)을 함으로써
수치심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할머니로 대표되는 보수적 가치는 이렇게 현대적 감각을 덧씌운 것만으로 매우 훌륭한 것이 되었으며,
그 가치에 의해 모순된 삶을 온 몸으로 버틴 생활인으로써의 며느리는 속 좁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를 가장 무기력하게 만든 것은 알 수 없는 손자의 자작곡입니다.
할머니의 말처럼 알 수 없는 장르이겠지만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마당에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라야할 손자의 노래는 안타깝지만 저에게도 알 수 없는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 우리가 익숙한 노래를 잉여인 손녀가 할머니를 대신하여
멋지게 부르며 나름 화해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노래가 이 영화에서 매우 위험한 상징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분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구한말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분이 그렇게 훌륭하기만 했다면 왜 나라가 망했냐고..
그 당시 살았던 우리 조상님들의 모든 삶을 부정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지만
싫든 좋든 그 분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기존 가치와 상황이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되어도 흘러간 물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에 의식적으로 느낄 수 없지만 그것이 DNA처럼 우리의 삶에
녹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거가 아무리 훌륭한 듯 보여도 현재까지 살아남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 당시
역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보수적 가치가 아무리 20대 처녀에 의해 다시 생산되어도 흘러간
가치가 현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가치가 필요합니다.
현재의 허접한 노래는 아무리 설득력이 없어도 또 다른 새 노래의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과거의 노래로 새 시대의 감성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요즘 새롭게 나타난 수상한 그녀는
과거 아버지와 쥐새끼의 성장 정책을 교묘하게 합성하여 474 정책으로 리바이벌합니다.
그 성장 정책에 실행적인 노래는 여전히 부동산 경기 부양입니다.
흘러간 이 노래가 과거 충분히 고속 성장하는 한국에 적합한 가락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한계가 명확해 보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일렉트릭을 넣으며 계속 변주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제도 한계가 보임에도 말입니다.
손자의 새로운 시도가 미미하게 보이지만, 틀림없이 새로운 혁신으로 나타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과거 자기 복제가 결국은 서태지가 등장하면 한순간에 끝날 것입니다.
글보니 서태지도 이젠 오래된 과거네요..
하지만 서태지 데뷔 무대에서 당시 심사위원에게 최악의 혹평을 받은 것을
직접 시청한 당사자로 그 당시의 흐름을 직접 체험한 세대로써 저에겐 현재네요.. ㅋㅋ
과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아파트가 달콤했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달콤함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흐름에선 말입니다.
첫댓글 ㅎㅎ
추천 3 !!!
재밌는 표현 잘봤습니다.
The door라는 영화에서 타임머신류의 영화와 차별화하여 참신했던 기억이 있는데 비니님의 글구들도 참신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요즘 좋은 글이 많이 올라옵니다.
무슨 내용인가 했는데 공감은 갑니다. 과거는 과거에 맞는 실정이 있듯이 지금은 지금에 맞는 실정이 있습니다. 대입을 해서 통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문화 컨텐츠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부동산은 과거의 트렌드와 맞지 않습니다. 설득력 있는 의미있는 글 입니다.
글을 아주 잘 쓰시네요..비유도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