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
언어우드선교사의 기도문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고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와 함께 인천에 도착하였다.
내한 3일 만에 의료선교사 알렌을 도와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1886년에는 고아학교를 세웠는데 이 학교는 경신학교를 거쳐, 1915년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초대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 한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어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1887년 황해도 소래를 비롯한 평양, 의주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하였고 이때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외국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적대적이었는데요.
하지만 언더우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 전파라는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1916년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해서 한국을 위해 기도하며 후원하였고, 1919년 11월 13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소천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어떤 사람인가요?
언더우드 선교사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입니다.
아명은 원두우이며, 세례명은 존 헤론(John Heron)입니다.
출생지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턴이고, 보스턴 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과 컬럼비아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교인 보스턴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했으며, 국제선교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었나요?
언더우드 선교사는 아내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 항을 경유하여 부산항에 도착했는데요.
이 때 배 안에서 큰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 위기에 처하자 두 사람은 구명정을 타고 탈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장으로부터 자신들이 탄 구명정은 너무 작아서 다른 승객들을 태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결국 다시 항구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언제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나요?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에 도착하였는데요.
이날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양 문물이 들어온 날이기도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 정동에 있던 자택 한 채를 제공받아 그곳에서 약 2년간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름다운 선교 활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믿음과 헌신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859년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1884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885년에 장로교 목사로 서품되었고 그의 선교를 시작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즉시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언더우드 부부는 언어 장벽, 문화적 차이, 정치적 불안정을 포함한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임무에 전념했고 전국에 교회, 학교,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그의 아내 릴리어스,
그리고 자녀들은 다음 몇십 년간 기독교 전파와 한국의 교육과 의료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언더우드 가족이 언어적인 장벽, 문화적인 차이, 정치적 불안정성 등 많은 과제를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선교사명에 헌신하며 한국 전역에 교회,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였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한국에서 최초로 서양식 병원을 설립한 것입니다.
1904년에 릴리어스 언더우드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병원은 한국인에게 필요한 의료를 제공했습니다.
미국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언더우드 가족이 교육한 한국의 의료 전문가들이 이 병원을 운영했으며, 현대 의료의 모범사례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의 노력으로 많은 한국인들의 건강과 안녕이 개선되었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은 교육의 현대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전역에 몇 개의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중 1885년에 설립한 배재학교는 지금은 배재 고등학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배재학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육 기관이었으며, 한국 학생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이 학교는 교육의 모범사례였으며, 졸업생들 중에는 정치, 비즈니스, 교육 등의 분야에서 지도자가 되어 갔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은 한국어로 성서 번역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한국 학자들과 함께 한국어 성서
번역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는 한국인들이 자신의 언어로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성서 번역은 한국어의 언어학적 특성을 고려하였으며,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번역체로 작성되었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은 또한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기여하였습니다.
한국의 전통음악, 무용, 예술 등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한국 문화의 보존과 발전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언더우드 가족의 선교사 역할은 그저 그런 선교사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며, 1919년 3.1 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또한 한국의 교육 체제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여, 현재의 한국 교육체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의 선교사 활동은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한국은 현대적인 의료시스템과 교육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언더우드 가족의 선교사 활동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은 한국의 문화, 예술, 음악, 그리고 기타 다른 측면들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가지고, 한국의 인구들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한국에서의 일상생활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한국인들과 미국인들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언더우드 가족은 또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언더우드 가족은 성경 공부와 복음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였습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을 위한 교육과 기독교 선교 활동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의 선교사 역할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한국교회는 현재 세계적으로도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러한 성과는 언더우드 가족의 선교사 활동과 복음 전파 덕분에 가능한 것입니다.
언더우드 가족은 또한 인류애와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데에도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건강과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의료 봉사와 사회복지 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많은 한국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의 선교사 활동은 또한 한국에서의 외국인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한국에 온 외국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통해 한국에서의 외국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의 선교사 활동은 그들이 진정한 인류애와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며,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들의 선교사 활동은 미국과 한국 사이의 동맹 관계와 같은 국제적인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세계 평화와 번영을 실현하는 데에도 기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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