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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중국 수도 베이징의
스페인 대사관에 탈북자 25명 진입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자 25명이 2002년
3월 14일 중국 수도 베이징의 스페인대사관에 진입,
난민 지위 부여와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다.
여섯 가족22명과 별도의 개인3명 등 모두
25명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오전9시52분
쯤 베이징 중심가의 싼리툰 대사관 구역에
위치한 스페인대사관 부근까지 관광 버스
를 타고 와 관광객 차림으로 대사관 정문에
접근한 뒤 정문 앞에 있던 중국인 경찰을
밀치고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이날 철저한 사전 준비를 거쳐
기습적으로‘거사’를 단행했다.이들이 스페
인대사관 진입에 성공하는 데는 외국 인권
단체와 인권 운동가들이 조직적으로 지원
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현장 부근에는 미국의 CNN방송과
AP통신 등 일부 외국기자들이 미리 연락을
받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의 진입을
취재했다.
이들은 한국행을 요구하다 15일 중국측
에 의해 추방돼 필리핀에 체류하다가 18
일 낮 12시40분쯤 대한항공 KE-622편
으로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을 출
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 2011년일본 원전 ‘방사능’ 비상
14일 위성이 촬영한 후쿠시마 제1원전 현장. 연기가 나는 것이 원전 3호기 외곽건물 폭발 현장이다. 그 왼쪽으로 2호기, 1호기(12일 폭발)가 보인다. /AP연합
▶ 2010년작곡가 박춘석 타계
원로 작곡가 박춘석(80)씨가 2010년 3월 14일 오전 6시 서울 강동구 둔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박씨는 지난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중이었다.
작곡가 박춘석(왼쪽)과 가수 이미자
KBS 방송가요대상, KBS 가요ㆍ가사ㆍ음반기획상, MBC 10대가요제 특별상, KBS 가요대상 작곡상, 제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1994), 옥관문화훈장(1995) 등을 수상했으며 2009년에는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박춘석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작곡가, 지구레코드사 전속작곡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 거성레코드사 사장 등을 거치며 1950~1980년대 한국 가요계를 이끌어온 그는 국내 대중가요 개인 최다인 2천700여 곡을 작곡했고,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천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2001년에는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밖에도 1960~1970년대 패티김, 이미자,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가 박춘석 사단의 멤버였다. 고인은 이들과 함께 ’가슴 아프게’ ’공항의 이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비내리는 호남선’ ’초우’ 등의 히트곡들을 만들엇다. 그의 노래는 대중음악의 예술적 가치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씨의 명성은 일본으로까지 이어져 1978년 12월 일본 콜롬비아측의 의뢰로 일본 톱 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도 곡을 취입해 외국인 최초로 신곡을 써준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특히 1964년부터 시작된 가수 이미자와는 콤비는 팝과 재즈분위기를 풍기던 박씨의 작풍을 트로트로 변화시켰으며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를 비롯해, 30주년 기념음반 타이틀곡인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무려 500여 곡을 통해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1954년 '황혼의 엘레지(노래 백일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 박씨는 ’아리랑 목동(박단마)’ ’비 나리는 호남선(손인호)’ ’삼팔선의 봄(최갑석)’ ’사랑의 맹세(패티김)’ 등을 발표하며 인기 작곡가로 부상했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ㆍ베니 김 등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 1년만에 중퇴하고 이듬해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12인조 악단을 결성해 미8군 등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졸업 후 악단을 재정비해 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장이 됐다.
박씨는 1930년 5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의병(義秉), 춘석은 아명이다. 네살 때부터 풍금을 쳤으며 봉래소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스스로 독파했다.
▶ 2003년판소리 신동 김주리양.판소리 9시간20분 연창.최연소.최장시간 신기록 수립
▶ 2003년이창동 문화부 장관,
“기자실 폐지” 발표 후 논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2003년 3월 14일 취임 후 첫 기자 회견을 통해 ‘신 취재지침’ 을 밝힘으로써 세간을 뜨겁게 달구었다. 기자실을 폐쇄하고 기자들의 문화관광부 사무실 출입을 제한하며, 공무원이 취재에 응했을 경우 그 내용을 즉시 보고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기자 회견에 대해 문화부가 언론과 관련된 주무부서임을 감안하면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노무현 정부식 ‘언론 길들이기’ 의 신호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며 시대에 역행한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신 취재지침’ 의 내용인 즉,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겠다는 브리핑제·관계공무원 접촉을 방해하는 사무실 방문 금지·취재의 자유경쟁 막는 ‘공평의 원칙’·기자들과 공직자들의 소통을 차단·적극적 취재협조 막는 취재통보제와 실명제가 그 취지였다.
이 같은 발표에 대해 찬반으로 그 의견이 분분했으나, 있으나 마나 한 기자실을 없애는 게 ‘개혁’ 을 기치로 취임한 새 장관에게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돼야 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도 제기되었다.
▶ 2002년 3월 14일 중국 수도 베이징의
스페인 대사관에 탈북자 25명 진입
▶ 1999년평생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재야운동가 계훈제씨 별세
▶ 1997년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
31대 신문협회 회장에 선임
▶ 1995년러시아 소유즈 TM21우주선 발사
▶ 1994년일본 신문제작 컴퓨터화(CTS)
선구자 엔조지 지로 별세
▶ 1994년상문고 교사들,
상문고 비리를 공개하는 양심선언
▶ 1991년낙동강 페놀오염사건
오염규탄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구지역 시민단체들.
1991년 3월 14일 대구 시민들은 수돗물에서 나는 악취에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2주일 전에도, 또 2년전 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대구시 상수도 본부의 답변은 "상수도물의 세균 오염을 막기 위해 염소 소독을 지나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수돗물에서 검출된 것은 클로로페놀이었다. 상수도 원수에 함유된 유해물질 페놀이 소독약품인 염소와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낙동강 상류의 구미공단과 김천 일대에 산재한, 합성수지-의약품 제조공장 100여곳이 페놀을 원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대구를 포함한 영남지역의 1000만 시민들은 불안 이전에 분노를 느꼈다. 페놀은 염료나 수지를 만들 때 쓰이는, 특유의 냄새를 지닌 무색 결정. 염소와 결합할 경우 화학변화를 일으켜 클로로페놀이 되는데, 농도 1ppm을 넘으면 암 또는 중추신경장애 등 신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극약으로 분류된다. 단순한 악취소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식수원이 죽음의 강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조사결과 두산전자 구미공장 등에서 공장 폐수를 낙동강에 쏟아버린 사실이 속속 확인됐다. 두산전자는 5개월 동안 300톤 가량을 방류한 것으로 조사됐다. 수돗물 오염의 여파는 낙동강 하류인 경남, 부산에까지 번졌고 두산그룹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하천의 수질관리와 수원지 관리의 문제점이 전면적으로 부각됐고 환경처 장차관이 인책 경질됐다.
▶ 1989년교직원노조건설특별위원회 발족
▶ 1985년학도 호국단 폐지
▶ 1983년니메이리 수단 대통령
▶ 1980년이슬람공화국 헌법에 의한
이란 국민의회 총선 1차투표실시
▶ 1980년한미1군단, 한미연합야전군사령부로 개칭 발표
▶ 1979년개헌심의위 발족
▶ 1979년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SS-18 개발
▶ 1975년멕시코 대학생 반정부 시위
▶ 1975년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서 첫 강의
▶ 1973년제2차 남북조절위 평양에서 개최
▶ 1972년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
▶ 1966년`강강수월래`를 무형문화재로 지정
▶ 1963년횡보 염상섭 사망
한국 근대소설사 초기부터 활동하여 1960년대 초까지 인간의 삶을 세밀한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묘사한 소설가 횡보(橫步) 염상섭(66)이 1963년 3월 14일 사망했다.
한국문학사에 리얼리즘을 구축했던
소설가 횡보 염상섭.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0년, 당시 신문학운동의 전위적인 동인체였던 '폐허'에서 문학활동을 시작한 그는 1921년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한국 근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연 이후 `삼대` `만세전` 등 28편의 중단편과 1백50편에 이르는 단편, 평론 101편, 수필 30편 등을 남겼다.
그의 소설은 종횡무진의 현실 비판적인 시각과 당시 서울 중류계층이 사용하는 다양한 생활어휘들을 풍부하게 담아 사실주의적 문체를 보여주었고,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는 등 한국 근대문학의 뼈대를 세웠기에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높은 봉우리이기도 하지만 동아일보 창간멤버와 조선일보 학예부장,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해방 후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초대 주필은 정지용)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서도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염상섭은 일제하 게이오대학 재학 중 독립운동 때문에 일본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 사회주의와 친일을 모두 비껴가는 중도의 길을 걸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식민지 현실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하지만 평론가들은 '남북을 통튼 최고의 작가'로 염상섭을 꼽는다.
원래 호는 제월(霽月)이었지만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하다고 친구들이 '횡보'라는 호를 붙여주었을 정도로 호주가였다. 남이 권유하면 일부러 딴짓을 해 횡보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술에 관한 일화는 이밖에도 많은데 사망 직전에도 부인이 정종을 숟가락에 떠서 입 안에 넣어주어 죽는 순간까지도 술을 머금고 숨졌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세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과 장편 `삼대`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도 `두 파산` `일대의 유업` `짖지 않는 개` 등의 단편과 장편 `취우` 등이 있다. 특히 그의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소설로 평가되며, 그후의 대부분의 소설은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되었다.
▶ 1963년FAO, 기아가해방에 관한 인권선언
▶ 1962년세계 18개국 군축위 개최
▶ 1961년시인 변영로 사망 -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에 중점
▶ 1960년동서 10개국 군축위 개최
▶ 1958년소련, 핵무기 실험 발사
▶ 1951년일본, 상의원 길내내각 불신임안 가결
▶ 1950년한국은행법 국무회의 통과
▶ 1944년급행열차 전폐
▶1944년연합군, 몬테 카지노 폭격
▶ 1939년존 스타인벡, 소설 ‘분노의 포도’ 출간
빈민계층과 경제권을 빼앗긴 소수민족들의 이야기와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글을 써 온 존 스타인벡이 1939년 3월 14일 그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를 출간했다. 책은 출간 즉시 정치-사회문제로 비화됐다.
존 스타인벡
농업의 기계화로 농토에서 쫓겨난 이동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변천하는 사회 양상과 함께 그린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결함을 고발해 소설에 등장한 인물들과 상황이 실상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스타인벡은 이주민들의 분노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다고 해서 제목을 분노의 포도로 정했지만 이 표현은 성서 요한묵시록 14장 19절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에 대해 농장주들은 ‘검은 악마적 차조물’, ‘증오를 주제로 한 파괴적인 책’이라며 맹비난했고, 오클라호마 출신 하원의원은 국회에서 탄핵연설까지 했으며 대부분의 도서관은 정치적이고 외설이란 이유로 이 책을 금서로 정했다. 스타인벡은 이주민들의 참상을 증명하는 보고 기사를 사진과 함께 ‘라이프’지에 실어 반론을 펼쳤다.
사회적인 논란속에서도 ‘분노의 포도’는 초판이 이미 50만부나 팔려 나갔고 정부가 캘리포니아의 철새 노동자에게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인간의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는 평가와 함게 그에게 1940년도의 퓰리처상을 안겨주었으며 1962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 1937년무솔리니 리비아 방문
▶ 1920년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작가 행크 케트첨 출생
▶ 1917년러시아 임시정부 수립
▶ 1912년창덕궁 박물관 준공
▶ 1908년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출생
▶ 1900년미국, 금본위제 채택
▶ 1883년 독일 사상가 칼 마르크스 사망
공산주의 운동의 사상적 기반 제공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트리에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강요로 본 대학 법학부에 등록했지만 마르크스는 법학보다는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법 공부에 흥미를 잃은 그는 음주와 교제로 시간을 보냈다. 4살 연상의 귀족집 딸 예니 폰 발레스타인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열애에 빠진 예니는 귀족 장교와의 약혼을 파혼하고 마르크스와 약혼한다. 귀족과 중산층, 연상연하의 파격적인 결혼이었다.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마르크스는 젊은 헤겔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헤겔 변증법에 흥미를 갖게 된다.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투스의 자연철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딴 그는 ‘라이니셰 자이퉁’지에 정치 평론을 쓰면서 정치 기고가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체제 비판적인 그의 글과 급진적인 매체는 경찰과 정부의 눈엣가시가 됐다. 러시아 군주제를 비판한 글로 라이니셰 자이퉁은 폐간됐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가 참여한 ‘독일-프랑스 아날’지 역시 첫 호를 끝으로 폐간했다.
1844년 8월 파리의 한 카페에서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다. 평소 그의 글을 관심있게 지켜봐왔던 엥겔스는 스스로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쓰기도 한 사상가였다. 두 사람의 만남과 이후 엥겔스의 40여년에 걸친 지원은 마르크스를 당대 최고의 사상가로 만들었다. 유럽 공산주의 운동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발표된다.
마르크스는 1849년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엥겔스의 지원 없이는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면서 그는 주요 경제학 저작들을 써냈다. 대영박물관 열람실이 그의 서재고 집필실이었다. <자본론> 1권은 1867년 출판됐다. 그는 그 후 15년에 걸쳐 <자본론> 2·3권을 써냈지만, 이 책들은 사후에 비로소 출판된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14일 런던 자택에서 기관지염과 감기 등으로 사망했다. 간발의 차이로 임종을 놓친 엥겔스는 장례식장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하기를 멈췄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평온한 얼굴로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가족과 공산주의 지도자 등 10여명만이 참석한 장례식이었다. 마르크스의 무덤은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다. 거대한 흉상 아래에는 저서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어떻게 변역할 것인가다.”
▶ 1879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출생
- 이론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 1434년 오늘,
세종 16년 각 섬에서 방목하던 소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3년 뒤 송아지 1 마리로 상환하게 하고 혹시 소가 죽더라도 가죽만 회수하고 책임을 묻지 말라 하명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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