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성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볼 수 없는 형상, 알 수 없는 소리가 당신에게 선택을 강요할 때, 우리는 두려운 혼란에 빠져버릴 것이다.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은 절대 권력을 지닌 타자에 대하여 우리는 도데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6. 25전쟁 중 깜깜한 밤 누군가 전짓불을 들이밀며 너는 좌익과 우익중 어느 편이냐고 물어왔을 때의 공포스러웠던 원체험을 가진 소설가 ‘박준’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작중 화자인 나는 그가 왜 현재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고 소설쓰기를 중단하고 정신병원에 있는 지 추적해 간다.
잡지사 편집장인 나는 박준이라는 소설가가 쓴 3편의 소설을 읽고 그의 병인이 공포스러웠던 전짓불 체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박준의 주치의 김박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만 김박사는 박준의 진술을 끌어내기 위해 진술법을 고집하다가 끝내 전짓불을 박준에게 들이미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고 박준은 결국 병원을 탈출하고 만다.
1971년에 발표된 이 작품이 현재 우리 사회의 권력의 속성을 이야기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동일성을 지향하는 권력이 배제의 폭력성을 드러낼 때 쓰는 작동기제는 무서우리만큼 <소문의 벽>과 유사하다.
소문의 벽은 지배이데올로기 프레임의 은유이다.
전짓불을 가진 존재(권력)가 자신의 정체는 감춘 채 미디어를 통한 지배 이데올로기 담론(소문)을 만들어 내어 우리들을 그 프레임(소문의 벽)안에 가두어 두며 선택을 강요한다.
일찍이 벤담은 파놉티콘 –일방향으로 죄인을 감시하는 원형 감옥-을 이야기하며 ‘시선이 권력이다’라는 메시지를 설파했다.
또한 빛(이성)을 소유한 사람이 빛을 들이밀 때 계몽은 억압이 되거나 또 다른 야만이 될 수 있다고 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경고했다.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은 이처럼 빛이 가지고 있던 희망과 구원의 기의(씨니피에)를 그것이 어떻게 배치되는 가에 따라서 억압과 공포의 기의(씨니피에)로 작동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벽’은 경계이고 억압이다. 당신이 소문의 벽안에 갇혀져 있다고 상상해 봐라.
그리고 소문은 당신을 동일자의 장안으로 포섭하려 하는데 소문의 진원지는 알 수 없고 저 쪽의 정체는 모호할 때, 당신은 생존하기 위해 (현재적 시점으로는 편안하기 위해) 저 쪽 심판관의 구도속에 갇혀버릴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삶은 지배이데올로기가 안내하는 익숙한 세계속으로 타성화되고, 식민화 되어지지만 정작 자신은 원래 그 쪽이었다고 믿는다.
빛은 누구에게나 온누리에 평등하게 비쳐질 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된다.
그 빛이 어둠을 잉태한 채 일방향으로 비쳐지면 세상은 권력의 비대칭에 놓이며 그 빛은 억압과 공포의 메시지가 된다.
소설 속 주치의는 지배 권력의 가치를 대변하는 장치로 읽혀진다.
진술을 거부하는 환자에게 진술을 강요하는 아이러니는 체제의 반복일 뿐, 인간적 관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접속을 거부한다.
국가는 가치를 제도화하고 그것을 반복함으로서 그 가치를 유지 심화시킨다.
그러나 학교가 많아야 교육이 되고 교도소가 많아야 교도가 되고 병원이 많아야 국민들이 건강해 지는 건 아니다.
진정한 교육과 교도와 건강은 우리들 삶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일상에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가치를 독점하고 소문의 벽을 통하여 그것을 강요하며 우리들의 표현도 검열당하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소설 <소문의 벽>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작중 주인공 박준이 스스로 미친 척하며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소설이 던지고 있는 문제제기에 대한 대안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청준은 소문의 벽안에 갇혀 자신이 진술이 갇혀버린 그 왜곡된 상황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청준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스스로 미쳐버리는 건 아닌 지 물어보고 있다.
하지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그 기준은 권력이 다수의 합의라는 상식과 통념으로 결정하는 바,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소수자 되기일 것이다.
체제의 억압과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자발적 소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체제의 권력이 아니라 진실의 권력에 서서 소문의 벽을 부수고 열린 자유의 광장을 만들기!
첫댓글 ?#$%&? 아이고, 어렵다. <소문의 벽>은 작년 문학시간에 가르쳤던 작품인데 사실 가르치면서도 잘 모르겠어서 시험문제도 내지 않았던 작품인데 에고, 보거스 설명을 읽으니 더 모르겠다. 근데, 거스야, 같은 업종종사자끼리 우리 최소한의 상도의는 지키자. 수학 샘이 문학을 논하면 난, 난 어쩌라는.... 패악? 연금도 줄어든다는데. 쓰바.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성, 의식은 이미 타자성에 지배되고 있으니 진실에 가까이 가기가 어렵다고 봐요. 저는 감정이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진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활짝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 슬픔에 겨워 소리없이 우는 모습, 화가난 모습, 또 복사꽃처럼 수줍어 고개숙이는 모습, 그 중에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은 부모가 아이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짓는 모습,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서로 바라보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요. 말로 나오기 전의 어떤 것, 그것이 아닐까요. 어떤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말 이전의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본 영화 중에 <Closer> 라는 영화가 있는데,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거짓이라며 진실을 요구하는 두 연인의 슬픈 이야기입죠. 시간 나시면 보거스님 한번 보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