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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8일 [연중 12주간 금요일]
마태오 8,1-4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늘도 원하게 할 수만 있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나병 환자가 어떻게 끝까지 믿고 희망하며 주님 앞에까지 나아왔는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치유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그리스도께서도 원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언가 좋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도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못 할 게 없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가 더는 로마에서 박해받지 않게 하였습니다.
바로 통일 전쟁에서 막센티우스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임박하자 콘스탄티누스는 태양 위에서 십자가 표징을 보았고 꿈에 이 표시를 하면 승리할 것이란 계시를 받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군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였습니다.
희망을 북돋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북돋아 주시는 희망에는
성취의 믿음도 포함됩니다.
이때 그러한 희망을 품는 이들은 가슴이 뜁니다.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것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어린 농부 소녀였던 잔 다르크도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도록 하느님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믿었습니다. 천사에 의해 계시받았다고 믿는 그녀에게 프랑스 왕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하느님께서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성취될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허물어진 다미아노 성당에서 “내 교회를 재건하여라!”라는 목소리가 십자가에서 들려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모아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고 그렇게 가난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의 창설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에 취해있던 교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탁발수도회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교황은 꿈에 라떼라노 대성전을 성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받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회의 회칙을 승인합니다. 이렇게 나중에야 예수님께서 하신 교회를 재건하라는 목소리는 작은 다미아노 경당이 아니라 물질주의로 허물어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넣어주는 꿈은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꿈을 꾸는 이는 정말로 성취될 그 기대감에 취해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켈리 최는 10억이 넘는 빚을 진 노처녀였습니다. 이때 ‘시크릿’이란 책을 60번 읽었습니다.
이 책은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동안 성공한 모든 사람의 주장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때 켈리 최는 꿈을 정하되 가슴이 뛰는 꿈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면 하늘로부터 오는 꿈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27년간 옥살이하였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게 나온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난 견뎌낸 게 아니라 준비한 거라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그 꿈이 하늘에 준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하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게 된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게 되어 그 꿈으로 벌써 가슴이 떨려야 합니다.
가슴이 떨리는 꿈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8일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복음: 마태 8,1-4
그날이 오면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가장 가련하고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을 꼽자면, 첫 번째로 꼽을 사람들은 바로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사제로부터 나병 확진을 받는 순간, 그들은 성밖으로 강제 추방 당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만 해도 억울한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부정을 탄 사람이니만큼 성 밖에 나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혹시라도 인기척이라도 나면 사람들에게 주의하라는 표시로 이렇게 큰 소리로 두 번 외쳐야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으로 한 나병 환자가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 나병 환자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다는 그 자체가 위법이었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나병 환자라는 표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멀쩡한 옷도 찢어 입어야 했습니다.
머리도 풀어 산발을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윗수염도 가려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마치 성 밖 토굴 속이나 무덤가에서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더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그였습니다.
인생의 막장 앞에 선 그였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최후의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모든 법적 장벽과 인간이 정한 규정을 무시하고 인간 세상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더 이상 그의 머릿속에는 율법이고 전통이고 필요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만을 믿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음으로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 사제들 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도망갔을 것입니다.
좀 나은 사제라면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겠죠.
“이러면 안 되지. 자네 이거 불법인 거 잘 알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서로가 좋을 일 하나도 없네.
힘들겠지만 꾸준히 약 먹고 치료에 전념하게.
그리고 나중에 병이 진정되면 그때 한번 만나세.”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와 진물투성이인 그의 몸에 다정하게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위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건강하고 순결한 예수님과 병들고 불결한 인간이 만납니다.
고상하고 맑은 정신의 예수님과 좌절과 원망뿐인 한 인간이 만납니다.
위엄으로 가득 찬 영광의 예수님과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린 한 사람이 만납니다.
빛과 어둠의 만납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입니다.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 결과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피부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과 대면할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순간은 참으로 축복된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지은 모든 죄와 허물, 어둠과 상처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과 마주치는 순간 화로 위에 던져진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강론>
(2024. 6. 28. 금)(마태 8,1-4)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1-4)”
1) 여기서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도,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아직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져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은 나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모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권능만 믿고 자비를 안 믿는다면,
예수님에게 복종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는 믿지만 권능을 안 믿는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아닌 것이고, 그러면 그것 또한 믿음이 아닙니다.
2) “내가 하고자 하니”의 원문은, “나는 원한다.”인데, 그 병자가 청하지 않았어도 당신이 먼저 원하신 일이기 때문에 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자비와 권능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권능은 있지만 자비가 없다면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자비는 있지만 권능이 없다면,
원한다는 말이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은 곧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우리가 자비를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가엾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깁니다.
3) 누가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가엾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2-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4) “예수님께서는 왜 병 자체를 없애시지 않고,
병자들을 고쳐 주기만 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바뀐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예수님께서 주신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병자들에게 일시적인 진통제만 주시고 그친 일이 아니라,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고, 그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상의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 자체는 아직도 수수께끼, 즉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