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으로 도주하다
공산당(共産黨, 이하 중공(中共)에게 밀려 청두(成都)까지 후퇴(後退)한 국민당(國民黨, 이하 대만(臺灣)은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1949년 12월 7일 대륙(大陸)을 포기(抛棄)하고 타이완(台灣)으로 본거지(本據地)를 옮겼습니다.
이른바 국부천대(國府遷臺)였는데, 이때만 해도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곧바로 대륙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개월 전에 빼앗긴 난징(南京)을 여전히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수도(首都)라고 주장(主將)했고 일부 부대(部隊)와 총사령부(總司令部)를 시창(西昌)에 계속 남겨 놓았습니다.
↑베이징에 입성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대만으로 가기 위해 상하이에서 배에 타는 국민당군
하지만 잠시라는 희망(希望)이 착각(着角)으로 밝혀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時間)이 필요(必要)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 4월 시창이 함락(陷落)되었고 5월 1일에는 하이난(海南)도 빼앗겼습니다.
하이난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어서 대만에게는 타이완과 더불어 그나마 제대로 된 저항 거점(抵抗據點)이라 할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헤엄까지 불사(不似)하며 바다를 건너온 중공군의 상륙(上陸)을 막지 못하고 두 달 동안의 치열(治熱)한 격전(激戰) 끝에 패(敗)했습니다.
↑하이난 상륙을 위해 조악한 장비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는 중공군
그렇게 중공은 대륙을 완전히 석권(席卷)했습니다.
이제 대만에게 남은 거점(據點)은 타이완뿐이었습니다. 만일 이곳마저 함락(陷落)되면 지난 4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국공내전(國共內戰)은 중공의 완벽(完璧)한 승리(勝利)로 막을 내리게 될 상황(狀況)이었습니다.
당연히 중공의 다음 목표(目標)는 유일(有一)한 미점령지(未占領地)인 타이완이었습니다.
해협(海峽)을 사이에 두고 타이완과 마주 보는 푸젠성(福建省) 일대로 중공군 주력 부대(主力部隊)들이 속속 전개(展開)하기 시작(始作)했습니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의 이동로. 결국 타이완으로 도주했습니다
타이완 해협(海峽)의 폭(幅)이 하이난 해협보다 7배 넓은 150여km에 이르러도 지금까지의 전과(戰果)를 보았을 때 중공군의 상륙(上陸)은 크게 문제 없어 보였습니다.
이제 막 냉전(冷戰)의 대립(對立)이 시작되던 중이었지만 당시 미국은 대만의 부정부패(不正腐敗)와 무능(無能)에 이골난 데다 그동안 국공내전(國共內戰)을 군벌(軍閥)들의 헤게모니 다툼 정도로 보고 무관심(無關心)하게 대했습니다.
이제 선박(船舶)의 수배(受配)가 완료(完了)되면 중공군의 상륙 작전(上陸作戰)이 시작(始作)될 예정(豫定)이었습니다.
↑타이완 해협 일대로 병력을 전개 중인 중공군
이처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危機)에 몰린 대만이 극적(劇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계기(契機)는 6월 25일 발발(勃發)한 한국전쟁(韓國戰爭)이었습니다.
그 동안 적극 대응(積極對應)을 자제(自制)하던 트루먼(Harry S. Truman, 1884년 5월 8일~1972년 12월 26일)은 전쟁(戰爭)의 배후(背後)인 소련과의 체제 대결(體制對決)에서 밀릴 수 없다고 판단(判斷)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 참전과 더불어 견제 차원(牽制次元)에서 대만에도 지원(支援)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해 10월 중공이 한국전쟁에 뛰어들면서 타이완 상륙(上陸)은 불가능(不可能)해졌습니다.
↑상륙 훈련 중인 모습
1953년 한반도(韓半島)에서의 총성(銃聲)이 멈추자 최대 60만에 이르던 북한 주둔 중공군(北韓駐屯中共軍)은 단계적(段階的)으로 철군(撤軍)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대만에게 다시 위기(危機)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중공군은 한국전쟁을 경험(經驗)하면서 전력(戰力)이 확충(擴充)되고 작전 능력(作戰能力)도 향상(向上)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미 해군의 저지(沮止)를 뚫고 바다를 건널 수 없었습니다.
결론적(結論的)으로 한국전쟁 참전으로 중공은 타이완을 침공(侵攻)할 수 있었던 절호(絶好)의 기회(期會)를 놓친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이 북한에서 철군하면서 대만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렇다고 대만을 그대로 놔줄 수도 없었습니다.
마치 신발 속으로 돌처럼 거추장스러운 이곳을 정리(整理)해야 두고두고 후환(後患)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다만 현실적(現實的)으로 침공(侵攻)이 불가능(不可能)하니 대신 심리적(心理的)인 효과(效果)를 노려 진먼섬(金門島)을 먼저 점령(占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울릉도(鬱陵島) 두 배 정도 크기인 진먼은 타이완에서는 150km 떨어진 반면 본토(本土)와의 거리는 4km에 불과(不過)해서 마치 중국의 턱 밑에 위치한 송곳 같은 존재(存在)였습니다.
↑진먼섬은 타이완 보다 중국 대륙에 가깝습니다
1949년 10월의 구닝터우 전투(古寧頭之役)에서 승리(勝利)하면서 대만이 차지(次知)한 후 수 차례 충돌(衝突)이 이어졌으나 중공이 한국전쟁이 참전(參戰)하며 잠시 소강상태(小康狀態)에 빠졌습니다.
이때 대만은 진지 보강(陣地補强)과 더불어 병력(兵力)을 증파(增派)했고 그냥 놔둘 수 없다고 판단(判斷)한 중공은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포격(砲擊)을 개시(開始)했습니다.
이를 제1차 해협 전투라고 언급(言及)하는데, 이제 막 한국전쟁을 매조지 한 미국의 입장(立場)에서 확전(擴戰)은 곤란(困難)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