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 독일군, 아르덴 고원 돌파5 주 만에 파리 함락(1940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1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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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독일군, 아르덴 고원 돌파
5주 만에 파리 함락(1940년)
요약 폴란드를 분할 점령 후 독일은 덴마크와 네덜란드를 정복한 후 프랑스 침공 계획을 수립했다. 최종적으로 히틀러가 아르덴 고원 돌파를 결정하여 대부분의 기갑부대가 아르덴 고원에 투입되었다. 독일군은 진격에 성공하며 5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했다.
독일, 프랑스를 대상으로 전격전의 위력을 발휘하고자 나서다
독일 기갑부대가 아르덴 고원을 돌파하고 있다.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후 소련은 핀란드를, 독일은 덴마크와 네덜란드를 정복했다. 그 후 독일은 1940년 5월 10일 프랑스를 침략, 처음으로 약소국 아닌 강대국을 대상으로 전격전의 위력을 발휘하고자 했다.
프랑스 공격의 주공을 아르덴 고원 돌파로 확정하다
1939년 10월부터 히틀러 지시로 프랑스 침공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 독일군 수뇌부는 언제 어디서 주공을 실시할 것인가, 여러 안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히틀러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안은 A집단군 참모장 만슈타인 장군이 제의한 아르덴 고원 돌파였다. 히틀러 자신도 비슷한 방안을 구상하고 있던 중, 마침 군 내부에서 그런 방안을 제시해오자 크게 환영했다. 이 안에 대해 참모총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노장파 장군들은 반대하고 나섰지만, 구데리안과 같은 기갑부대 지휘관들이 긍정적인 답변을 했을 때 히틀러는 결심을 굳혔다.
전격전
전격전을 펼치고 있는 독일군 전차들.
아르덴 고원, 연합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장소로 꼽히다
아르덴 고원은 최대의 기습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적절한 장소였다. 첫째, 연합군은 1차대전 때의 슐리펜 계획과 같은 기동을 예상, 그에 맞춰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삼림지대인 아르덴 고원은 일반적으로 기갑부대가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곳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침공 직전에 프랑스군 최고사령관 가믈랭(Maurice Gamelin)은 마지노 선을 우선적으로 강화했다. 유일한 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제7군은 가장 왼쪽의 네덜란드와 연결할 수 있는 곳에 투입했고, 영국 원정군은 벨기에에 배치함으로써, 연합군 배치는 만슈타인과 히틀러가 예측한 대로 최대로 약점을 노출시킨 상태에 있었다.
아르덴에서 주공을 실시하는 계획은 적진중앙을 돌파해 해협까지 진출함으로써 전략적으로 적 배후를 마음껏 유린시킬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슐리펜 계획의 '망치머리' 개념과 구별해 흔히 '낫질' 계획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독일, 아르덴에서 주공을 하면서 다른 방면에서도 공격해 연합군을 혼란스럽게 하다
5월 10일 침공에서 독일군은 대부분의 기갑부대를 아르덴 고원에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부 네덜란드와 벨기에 방면에서도 무서운 속도로 공격했다. 연합군은 처음부터 '망치머리'인가 아니면 '낫질'인가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어지러운 상태에 빠져들었다.
독일, 순식간에 네덜란드 군과 에벤 에마엘 요새를 함락시키다
낙하산 부대들이 주요 교량을 점거하고 헤이그와 로테르담 등을 향해 기갑 및 보병부대가 신속히 진출함으로써 나흘 만에 네덜란드 군을 굴복시켰다. 네덜란드 군은 1830년 이후 처음으로 싸워보는 전투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한편 보크(Fedor von Bock) 장군이 지휘한 B집단군은 보병으로만 구성되었지만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에벤 에마엘 요새에 정예의 낙하산 부대와 특수공병을 침투시켜 36시간 만에 함락시키고 말았다. 프랑스군과 영원정군은 벨기에를 구원하는 작전에 주력하고 독일군 기동에 대해 슐리펜 계획을 반복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페도어 폰 보크
2차 대전 초기, B집단군을 이끌고 대단한 성과를 올린 장군.
주공 부대의 지휘관 롬멜과 구데리안, 눈부신 활약으로 돌파에 성공하다
주공 부대인 A집단군의 선두부대로서 아르덴 고원에 투입된 9개 기갑사단은 3개 군단을 이루어 삼림지대를 뚫고 지나갔다. 5월 12일 뫼즈 강에 이른 선봉부대를 지휘한 사단장 롬멜(Erwin Rommel)은 디낭(Dinant)에서 교두보를 설치했다. 공병들은 부교를 설치하고 탱크가 건너는 동안 기관총 보병들이 맹활약했다. 롬멜 휘하 보병들은 약 70%나 되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주력부대인 기갑부대의 진격로를 개척하고 독일군의 뫼즈 강 돌파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슈투카
전격전에 투입되어 큰 활약을 펼친 독일의 슈투카 항공기들.
다른 도하지점인 스당(Sedan)에서는 더 완강한 저항을 받아 뫼즈 강을 건너는 데 애를 먹었지만, 기갑군단장 구데리안(Heinz Guderian) 장군의 용감한 지휘로 교두보를 마련하고 돌파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 기갑부대, 적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프랑스 서쪽 해안과 브뤼셀까지 도달하다
이후 독일 기갑부대들은 적으로부터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해협까지 경주하는 것처럼 신속히 진격했다. 최고사령부는 기갑부대들이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침공개시 일주일째 되는 17일경 구데리안은 상급부대로부터 하달되는 '수색정찰' 명령을 무시하기 위해 일부러 무전기를 꺼버린 채 서쪽으로 질주했고, 20일에는 해안의 아브빌(Abbeville)에 도달했다. 이 무렵 B집단군은 브뤼셀을 함락시켰는데, 모든 것이 계획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독일 진격
연합군은 대혼란을 겪으며 붕괴되고, 독일군은 믿을 수 없는 성과를 초기에 달성하다
연합군은 초기에 약간 저항했을 뿐 그 후로는 대혼란을 겪으며 붕괴하고 말았다. 프랑스 정부는 가믈랭을 해임하고 웨이강(Maxime Weygand)을 등용했으나, 그가 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전투는 끝나 있었다.
독일군은 초기에 너무 큰 전과를 얻은 데 대해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구데리안은 '거의 기적'이었다고 언급했으며, 기갑부대들이 속속 해안 항구들을 장악했을 때 히틀러, 국방군 최고사령부, 육군 최고사령부는 모두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하고 걱정했다.
연합군, 독일군이 기갑부대에 휴식을 주는 동안 장비 대부분을 버린 채 탈출하다
독일군 수뇌부는 26일 볼로뉴를 점령하고, 28일 벨기에가 항복해오자 오히려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동안 눈부신 활약을 한 기갑부대에게 약간의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나머지 작전을 보병과 공군에게 맡겼다.
덕분에 1케르크로 철수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 총 34만 명(프랑스군 12만 명)은 6월 4일까지 그곳으로부터 영국으로 철군할 수 있었다. 영국 입장에서는 병력을 무사히 구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것은 무기와 차량 등 장비를 거의 버린 채 탈출한 치욕적인 패배였다.
덩케르크 철수
덩케르크 해변을 빠져 나오고 있는 영국 군인들.
독일, 낫질 계획과 전격전으로 5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하다
이후 독일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 전투에서 연합군이 패배한 이후 마지노 선은 마치 좌초된 전함처럼 버려졌다. 독일군은 6월 13일 파리를 점령하고, 3일 후에는 1차대전 영웅 84세의 페탱이 이끈 프랑스 정부가 항복하고 말았다. 1차대전 때 '슐리펜 계획'이 6주 만에 프랑스를 함락시키려다 실패한 데 비해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은 '낫질 계획'과 전격전으로 고작 5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 대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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