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양에게 순종함으로
벧전 1:18-25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18-25 /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조상들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려고 대대로 물려받은 전통에 매여 헛되이 애쓰던 그 길에서 여러분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다 잘 아는대로 금이나 은 같은 것으로 값을 치르고 얻은 것이 아니라 19)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써 얻은 것입니다. 20)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이루려고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시고자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형상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21)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22) 여러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기심과 증오심에서 벗어나 영혼이 정결해졌으므로 이제는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부터 깊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23) 여러분은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생명은 곧 썩어 버리지만 거듭난 이 새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새 생명은 인간 가운데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24) ㄴ) `모든 인간은 풀포기처럼 허무하고 인간의 모든 영화와 권세도 들에 핀 꽃들과 다를 것이 없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ㄴ. 70인역 사40:6-8) 25)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파된 기쁜 소식입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 심오한 감정에 호소합니다. 하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를 보는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경멸하는 사람이 받을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18-21) 베드로는 구원받기 이전의 삶을 "너희 조상이 유전한 망령된 행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한 생활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던 죄의 본성을 따라간 삶이 바로 망령된 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허하고 무가치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무가치한 삶으로부터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을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없어질 금이나 은과 같은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창세 전에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구별되지 못한 삶을 산다면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는데 있어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라(22-25) 구원의 은혜 안에 있는 자는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사랑을 이루어 나가야합니다. 거룩은 사랑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구호가 아닙니다. "뜨겁게"라는 말은 '계속해서, 변함없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행하려면 단순한 다짐이나 결단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기 위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은혜는 가식이 없는 참된 사랑을 이루는데, 이 거듭남은 영원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베드로는 이를 "썩지 아니할 씨"라고 말합니다. 나 스스로가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맺는 씨가 심겨졌다는 것입니다. 변질되지 않는 사랑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적용: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망령된 행실 중 어떤 것들이 끊임없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지 살펴봅시다. 영혼이 깨끗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순종은 믿음을 시험하는 가장 좋은 척도이며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섬김 행위보다도 우선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든든한 믿음으로 사는 길은 오로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길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
벧전 1:18-25
1. 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소 자기의 몸이 건강하다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간혹 이상 징후들을 느낄 때도 있지만, 생각하기를 “괜찮을거야 아직 젊은데 뭐” 하며 시간을 끌다가 큰일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별 것 아닌 증상에도 병원을 찾는 건강 염려증 환자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몸은 언제 탈이 날지 모르는 매우 예민하고 약한 생물체임을 잊지 말고 정기 검진을 받아야 좋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인생 길도 정기적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옳은 길을 걷고 있는지, 가치롭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지, 내 잘못된 성품으로 이웃에 폐해를 끼지는 것은 없는지 등을 살피는 시간들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주간부터 피서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방학과 함께 휴가를 얻어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피서라 하는데 주로 더위를 피하여 시원한 곳에 가서 쉬다가 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기회를 통하여서도 자기 삶을 돌아보며 점검하는 기회가 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피서가 피정이 된다면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피정'이란 '피세정령(避世靜靈)'의 줄임말로 '세속을 피해서 영혼을 정화한다'는 의미입니다.
2. 우리의 망령된 행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러 받은 전통을 매우 귀하게 여겼고 그 물러 받은 규례를 따라 살면 다 옳은 사람이 될 것이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습관 안에서 그들은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는데 오늘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것을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망령된 행실”이란 영어 번역에서는 “the empty way of life”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공허하고 빈 인생 길이란 뜻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는데 돌아보면 공허한 것이었고 아무 의미 없는 삶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한 허무주의적 표현이 아니라 이것은 곧 유대인들에겐 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결국 이런 죄의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로몬의 전도서엔 너무도 정직하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3b)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3b-11)
베드로 사도도 이런 인생임을 알고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24-25a)
이처럼 인생의 길이 망령된 행실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사람은 구원자를 찾습니다. 이것이 곧 피정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 있으면 우리의 진상을 옳게 보지 못합니다. 잠시 세상을 떠나 우리 영혼을 정화시키는 피정의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3. 구원자 예수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인 존 스톳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고, 그 구원자가 곧 그리스도 예수임을 인정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우리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공허하고 헛된 길을 가는 우리 인생을 구원할 것은 은도 금도 아닙니다. 그것 역시 없어질 허무한 것입니다. 아무리 금은으로 우리의 인생 길에 수를 놓아도 그 길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금은으로 수를 놓으면 놓을수록 오히려 더 허무해 질뿐입니다.
우리 인생을 예쁜 비누 물방울로 비유해봅시다. 그 물방울은 빛이 비추어지면 더욱 영롱한 무지게 색깔을 내며 아름다워 집니다. 바람을 불어넣으면 더욱 깨끗한 색깔을 띄며 커집니다. 그러나 커지면 커질수록 물방울은 얇아집니다. 곧 터지기 직전입니다. 그러다가 바람이나 매우 미세한 작은 흙먼지와 충돌해도 순간에 터져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연약한 인생을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19절)
그 피만이 인생의 공허하고 헛된 걸음을 씻어주시며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인생의 모든 죄 값을 대신하여 흘리신 피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찬 184장 2절)
4.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참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21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많은 철학과 종교들이 이것을 연구하고 탐색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고 주장합니다. “절대 타자”로 “절대 선”으로, “절대 진리”로 현학적 표현으로만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우 실제적이고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얻은 계시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십니다. 인생들은 죽음 때문에 평생을 종노릇하며 삽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최대의 과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이전엔 죽음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우리를 얽매어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죽음을 이기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어 우리 모두의 부활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여기에 우리 인생이 참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자리를 얻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자살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카드 빚 때문에 주로 일어납니다. 돈 때문에 일어난 일을 죽음으로 갚으려고 합니다. 돈을 넘어선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나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이다”는 부활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3-4)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참소망입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실린 글입니다.
희망이란 /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노신(魯迅)의 《고향》 중에서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희망의 길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걷고 또 걸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부활의 그 길을 만들어 냅시다.
썩지 아니할 영원한 복음의 말씀
벧전 1:18-25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1:18-19)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이란 한마디로 '죄'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나 완전하게 해방되는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유한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점없고 흠없는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드리신 영원한 속죄제사로 인해 된 것입니다. 짐승이나 가축의 피로도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사함받거늘...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린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어찌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하고 깨끗하게 씻기지 못하리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1:20-21)
예수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으로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아버지 품 속에 계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자신을 밝히 드러내셔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원, 예수님의 신부로서의 소망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1:22)
구원과 거듭남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순종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곧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의미하며, 이웃을 향한 사랑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만족시키는 완전한 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과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우리 영혼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1:23)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 즉 살아있고 항상 있는 영원한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헤어지고 없어지며 유한한 것들이지만, 천지가 없어진다해도 결코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죽을 몸과 영혼을 온전히 구원하기에 충분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4-25)
풀이나 꽃과 같이 잠시 보이다가 시들어버리는 존재가 인간의 육체입니다. 이 육의 몸으로는 결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되어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보혜사 성령하나님으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세상 끝에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전해 준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완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이상 잠시 거하다 사라져버릴 안개같은 인생이 아니라... 세세 무궁토록 주와 함께 왕노릇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으로 거듭남
벧전 1장 18-25절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정말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속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냥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뀝니다. 더 나아가 가족관계를 바꾸고, 동네를 바꾸고, 국가를 바꿉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에너지입니다.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소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에서 종교개혁으로 넘어가면서 기독교인들은 정권을 바꿉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사야 60장의 말씀을 통해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종식시켰습니다. 19세기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여자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평신도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수례바퀴를 움직였던 위대한 인물들만이 아니라 각각의 개개인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온갖 속박과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잘못된 상식과 통념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정말 혁명의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18절 말씀이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오랜시간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습과 형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통과 관습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것이 사람들을 얽매이게 만들고 괴롭히는 무서운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자고로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 자기 신분을 알고 주어진 환경에서 조용히 순종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 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참된 자아와 자유를 망각하게 만들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헛된 생활 방식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분을 우리들을 모든 억압과 관습과 전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모든 율법으로부터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유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혁명으로 다가오지만 그 옛날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는 이 소식이 얼마나 혁명적이었겠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 주인이나 노예나 다 똑같이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는 그렇게 우리들을 힘들게 했고, 괴롭혔던 온갖 전통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등등.. 이것은 그야말로 사회적 혁명이고, 문화의 혁명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했던 그 당시 종교적인 배경으로 봤을 때,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엄격했고, 교회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담이 무너졌습니다. 교회의 견고한 형식과 틀이 깨지고 외부인들이 자유롭게 넘나들며 정말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거보다 더 큰 혁명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큰 혁명은 그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22절입니다. 교회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이 서로 깨끗한 마음으로 거짓 없이 서로 사랑하게 됐다고 합니다. 출신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가문도 다른데 모두가 청결한 마음으로 즉,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깊이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가족을 바꾸는 것보다 더 큰 혁명은 바로 마음을 터놓고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혁명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그 안에 담긴 영혼을 깊이 볼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정말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내면으로부터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유명한 시집 제목은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입니다. 사랑하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좀처럼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친구들끼리도, 이성친구에게도,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사랑은 시작한다는 게 맘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사랑을 시작하세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설령 또 다시 상처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들을 신뢰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쉽게 사라지고 없어질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생명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에게도, 우리들의 친구들에게도,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썩지 아니할 씨앗을 서로에게 심겨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전파된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들 가슴 속에 씨앗을 심겨졌습니다. 그 씨앗이 우리들의 가슴 속에 썩어져 하나의 열매를 맺었고, 우리는 다시 그 씨앗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겨줘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식
베드로전서 1:18-21 / 조정의 목사
그동안 베드로전서 1장 1-17절의 말씀으로 ‘구원에 합당한 삶’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고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2)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이제 18-21절에서는 믿는 자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너희가 알거니와”) 그 앎의 내용, 지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말씀과 연결되어서, 구원(성화)을 이루는데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거룩함에 이르는 지식입니다.
최근 교회에서 야고보서를 공부하면서 마음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참된 믿음의 삶’이 어떠한지를 배우고 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실망스러운 부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 의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말씀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이던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뚜렷한 두 가지 구원론이 있었는데, 바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입니다. 당시 구원받은 유대인들 중에 여전히 율법주의가 묻어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화의 과정을 이뤄가는 중에 율법에 매여 하나님의 은혜를 뒤로 하고 ‘반드시 거룩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행위를 강조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복음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있으면 내 삶이 엉망이어도(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율법주의와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것은 천주교입니다. 또한 영지주의의 오늘날의 모습은 뉴에이지나 몰몬교 등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있으십니까? 거룩함을 이뤄야 한다는 조급함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까? 또는 구원을 받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본문 18-19절에서는 ‘대속의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고 20-21절에서는 ‘대속의 주체’를, 21절 후반부에서는 ‘대속의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성화에 합당한 지식을 가지고 성화를 이루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대속하셨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화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18절). 먼저 “대속”이란 무엇일까요? ‘대신 속죄하다’, ‘몸값을 받고 풀어주다’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언가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는데 그러기 위해 대가가 치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빚진 것이나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돈, 물품, 노력 따위로 대신 갚음’이라는 뜻입니다. 전에 빚지거나 잘못을 해서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의 상태였는데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실 때 ‘속량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고(신 7:8; 9:26; 15:15; 24:18),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량하셨다’, ‘대속하셨다’는 말씀을 합니다(사 41:14; 43:1, 14; 44:22-24; 51:11; 52:3; 62:12; 63:9).
본문 18절에서도 ‘대속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에 속박된 상태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더 분명하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18절).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입니다. 이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들의 조상은 특정 인물들이 아닙니다. 인류 보편적으로 앞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헛된 행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인류는 죄의 속박을 받고 있습니다. 인류는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노예 상태, 죄의 속박 아래 있던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 6:1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인류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이 편지가 이방인들에게 쓰인 편지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 역시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행 7:51).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9-18).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인류는 죄의 속박 아래 죄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에게는 죄의 노예라는 신분과 사망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롬 5:12, 고전 15:21).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고백은 모든 인류의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노예이고 평생 죄를 짓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운명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행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노예된 인간은 어떤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산다해도 헛된 삶입니다. ‘헛되다’는 것은 ‘아무런 쓸데 없는, 공허한, 텅 빈, 거짓된’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존경받고 근사한 삶을 살아도 영원의 시각으로 볼 때 인생은 공허하고 텅 비었으며 쓸데없고 헛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매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7-8).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우리가 이러한 노예 상태에서 대속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18절). 당시 그리스 로마에서는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 금액을 신전에 바쳤습니다. 그러면 신전에서는 그 돈을 노예의 주인에게 주고 노예는 자유를 얻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이제는 인간 주인의 노예는 아니지만 신의 노예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아무튼 노예가 놓임을 받기 위해서는 금과 은 같은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도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대속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 염소 등의 짐승들과 금, 은 등이 속전물로 사용되었습니다(출 30:11-16). 그러나 이러한 대속물은 온전한 대속물이 아니었습니다. 또다시 죄를 지면 다시 제물을 바쳐야 하는 체계였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1-4).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쳤던 것들은 진짜 대속물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인간의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참 대속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금, 은, 양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죄가 온전히 대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여기에 율법주의자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에 이르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더 거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대속이 그런 것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행, 공로, 노력, 헌금, 공헌으로 대속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제한적인 것으로 죄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불가능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행위로 선해지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곧 낙심하게 됩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의심만 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속받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19절). 율법과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셨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8:1,2). 이것이 하나님이 선택한 대속의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치르신 값이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과 선행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바로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대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대속물은 흠 없고 점 없는 양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할 대속자는 죄가 없는 분이어야 했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깨끗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대속물을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 정도의 거룩함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가능했습니다. 바로 예수님만이 대속물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분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범하지도 않으시고 거짓도 없다고 했습니다(벧전 2:22).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님이 거룩한 대속물이 되신 이유는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에게 거룩함(의)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칭호를 얻은 것은 예수님의 거룩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 때문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거룩한 분인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영지주의자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너무나 귀한 대속물이 희생되셨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자는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베드로는 우리가 어떻게 대속을 받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죄의 노예에서 벗어났습니다. 금과 은, 양, 어떤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신 대속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합당한 삶은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기억하고 그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받아 순종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없는 자들이었지만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보배로운 피가 이런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공부하면서 율법적으로 자신을 채찍질하지 마십시오. 내가 구원받은 것이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넘어질 때도 순종치 못할 때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통해 성화의 삶이 버거운 것이 아닌,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노예에 대한 권면
벧전 2:18-25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노예들이 주인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에 로마 제국에는 약 6백만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노예들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약 성경은 고린도 전서, 골로새서, 디모데 전서, 디도서 그리고 오늘의 베드로 전서에서 노예들에게 당부하는 글이 주어지고 있으며 빌레몬서는 도망친 노예에 관해 쓰여진 편지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의 종이란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정도의 신분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노예의 인권이란 인정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종과 주인이 한 형제로서 교회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므로 노예의 신분에 있었던 자들은 자기의 주인이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관계로 노예들은 자기 주인 되는 형제가 자기들에게 노예로서가 아닌 형제 차원에서 자기들을 대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 제도가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제도이었으나 성경에서는 노예 제도 자체가 부당한 것이니 노예제도 자체에 항거하여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찾으라고 노예 제도를 충동한 말씀은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노예들이 그렇게 항거했다고 한다면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 없었던 그들에게 무참한 희생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노예들에게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서 노예제도가 있는 이 세상이 끝나면 노예 제도가 없는 평등의 새로운 나라가 있으므로 그 좋은 나라를 소망하면서 주인들에게 순복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노예 재도 자체는 없으나 직장 생활에서 주인과 종업원, 또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서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은 이런 관계에서 날마다 생활하는 우리들이 사업주나 직장 상사에게 어떻게 대해주는 것이 신앙 인으로서의 마땅한 자세인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는 교훈을 통해서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갈등을 신앙으로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말씀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그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인에게 순복하라(18-20) [2]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르라(21-25)입니다.
[1]먼저 18절부터 20절까지의 주인에게 순복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사이 직장 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이 주인이나 또는 직장 상사를 잘 못 만나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견디다 못해 결국 직장을 옮겨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의 주인공인 노예들은 어떤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잘못도 없이 호된 매를 맞아도 다른 주인에게 옮겨 갈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므로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죽을 때까지 모든 고난을 당하고만 살아가는 신세였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범사에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이란 성도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직장 주인이나 직장 상사를 잘못 만나 직장생활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때로는 당장 그만 두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도 있겠지만 직장 생활이 주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당장 그만 둘일 만은 아닌 것입니다. 갖가지의 고난이 있고 힘들지만 이를 참고 일을 하므로 자기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고, 또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큰 의미는 믿는 자들이 보여주는 모범 된 삶을 통해 나쁜 주인이나 나쁜 상사에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아름다운 삶을 보여줌으로 성도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 이신지 소개하는 일이 성도의 큰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18절에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복하되 너그럽고 선한 주인에게나 또한 까다롭고 성질이 나쁜 주인에게나 똑같이 두려운 마음으로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참 좋은 주인이라고 덜 충실하고 까다로운 주인이라고 눈앞에서만 하는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19절에 보니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아낼 수 있다면 이는 아름다운 일이라 했습니다. 아름다운 일이란 하나님께서 용케 참아내는 자를 지켜보시고 인정하시어 그가 받을만한 상을 주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나 칭찬이 없지만 선을 행했음에도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그에게 받을 만한 보상을 내리실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2]두 번째로 21절부터 25절까지의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르라 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노예들의 고난을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도록 예정되어 있고 그 고난을 위해 세상에 오심같이 성도들은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친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을 보이셨으므로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고난을 본받아 주님의 자취를 따라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는 철저히 죄가 없으셨으며 그가 고난을 당하셨으나 아무런 불평이나 욕을 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셨으나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또 오히려 주님께서 애매히 당하신 고난을 통해 죄인 된 모든 인간들은 죄 속함을 받아 구원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애매히 당하는 고난도 인간인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신에게는 고난을 참아내는 인내요 남에게는 주 예수를 따르는 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25절에서 그리스도 인들의 믿기 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답게 고난을 잘 감당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길을 잃은 양과 같이 우왕좌왕 했으나 이제는 영원한 목자요 감독자 되시는 주 예수님께 돌아왔으므로 확신을 가지고 모든 앙갚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을 소망하면서 고난을 넉넉히 이겨나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직장의 주인이나 직장 상사로부터 애매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주안에서 순복하라는 교훈입니다. 주안에서라는 뜻은 주를 믿는 믿음을 거역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란 뜻입니다. 좁은 의미로서는 자기 윗사람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이요 더 넓은 의미로는 직장의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이 되겠습니다. 직장의 주인이나 직장 상사가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아래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우해주면 본인과 남이 모두 화평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윗사람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든지 아랫사람으로부터 불경스런 대우를 받을 경우에는 피차에 속이 상하고 직장 생활이 불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피차 행복하고 기쁘기 위해 위 아랫사람 모두가 서로 존경하고 높이며 친절하다면 일에 능률도 오르고 일도 재미있는 직장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은 모든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이 이런 분위기가 되지 못하고 주인이나 직장 상사가 부당한 대우를 하고 고난을 준다할지라도 주님을 생각하며 참아내고 순복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은 한 점의 죄도 없으셨으나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고난을 받았으며 불경한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모든 고난을 참으신 것은 모든 뒷일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고난 후에 있을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을 생각하며 참아내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이 받을만한 마땅한 대우를 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오 글자 그대로 우리가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세상일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한다할 지라도 우리들의 참 세계는 하늘나라이므로 이 세상이 다 지나면 하늘나라에서 받게될 대우를 소망하며 모든 고난을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참고 부당하게 대우하는 주인과 직장 상사에게 순복하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복해야 합니다. 지금은 사람에게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을 소망하면서 참아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잘 참아내는 것을 보고 그 부당한 대우를 하는 자들이 반성하고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참을 수 있는데 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힘들고 피곤해도 일을 뿌리칠 수 없고 일을 해나가야 하며 때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고 일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는 대우를 받지 못하셨으나 억울해 하시거나 못마땅하다고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공격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세계는 이 세상이 아니오 하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세계도 주인과 종업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계충의 구별이 없고 세상의 갖가지의 구별로 차별대우하는 그런 것들이 결코 없는 하늘 나라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실 당시의 예수님은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참아 그 어려운 때를 다 넘기신 것입니다. 지금은 그 고난들이 옛날 일이 다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받고 있는 모든 고난도 참고 참아내면 언젠가는 다 옛날일 이었다고 말할 때가 올 것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한 점의 죄도 없으신 주님께서 큰 고난을 당하셨으나 묵묵히 잘 참아내셨음을 기억하며 모든 고난을 잘 참아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잘 참아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을 믿고 참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활 전도
벧전 2:18-25 / 안진섭 목사
요즘 저는 베드로전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중심주제는 고난입니다. '고난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주된 주제입니다. 그런 주제아래 내용을 전개하면서 2장과 3장에서는 사회와 가정에서의 관계를 주로 다룹니다. 2장 11절과 12절은 이런 모든 관계를 위한 대전제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2장 13절부터 17절까지는 국가제도와의 관계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믿지 않는 정부에 대해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직장생활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고용주나 상사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을 행함으로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에 있는 이런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 줍니다. 제가 2주일 전에 증거한 말씀은 제도에 순종하라는 말씀을 담고 있고, 오늘 말씀은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다음주에 나눌 말씀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 우리 마음에 의구심이 떠오릅니다. '과연 순종만이 제일 좋은 미덕인가? 국가제도에 대한 견제와 비판기능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때도 있지 않은가?' 하는 고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문제는 분명히 여러 가지 차원에서 고민을 하고 성경전체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전서에서 강조하는 강조점이 그런 부분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선을 행함으로 그들에게 삶의 본을 보여서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여기서 순종하라는 것을 과연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하려면 3가지 단계를 거쳐서 이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먼저 이 말씀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베드로가 이 말씀에서 주로 강조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런 배경과 주된 강조점을 이해한 것에 기초하여 이 말씀을 재해석하여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맞도록 적용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절차를 통해 본문을 잘 관찰하지 않으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바르게 적용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본문이 강조하는 주된 포인트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세 단계에 걸쳐서 본문을 관찰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본문의 배경(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이 말씀에 보면, '사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환'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종이라는 말과는 약간 다른 말입니다. 종은 아무런 권리도 없고 심지어는 목숨도 주인에게 맡겨진 신분이지만, 사환은 좀 더 나은 조건 속에 있었습니다. 종은 종이지만 일반적으로 가정에 소속되어 좀 더 책임감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종을 의미하는 단어인 'doulos'보다 조금 더 온화한 단어입니다. 이들은 초기에 외국에서 잡혀온 종의 후손들로서 자유롭지 못한 채 한 가정의 종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인구의 약 ⅓이 이런 노예들일 정도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18-19세기 미국의 흑인 노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비록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없었지만 그들은 로마 법률상 대중의 주체였습니다.
로마황제의 치하에서는 노예학대나 살해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괜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책임감있는 위치에 있거나 전문적인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교육의 정도에 따라 교사나 궁중의 관리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농업, 광업, 제조업 등에도 종사했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월급도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돈을 모아서 자신들의 자유를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환'이라는 우리말 번역은 아주 잘 되어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환들을 향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권면합니다. '두려워함으로'라는 말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아주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많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이방인 주인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유를 배웠으나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은 믿지 않는 주인에게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당시의 사환들이 어떤 처우와 어떤 입장에 놓여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2. 본문의 강조점과 의미
18절을 보면,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하면서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 뿐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복하라고 권면합니다. 주인들은 종들을 선하게 대하는 사람과 종들을 악하게 대하는 사람의 두 그룹으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떤 경우이든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서 '까다로운 자들'이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직장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합리적으로 일을 지시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지시합니다. 도대체가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애매하게 고난을 당해도 참고 견디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인가 내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을 넘어선 것입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반응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인가 분명한 내적인 동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이런 태도를 요구합니까? 그것은 이런 태도가 결국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 종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참고 인내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한다면 그 주인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어려움 중에서도 기쁨으로 사는 이유를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일터에서 믿지 않는 상사를 전도하도록 나를 불러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고난을 견디라고 주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복음을 증거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불의를 참고 견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참고 견디면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21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과 살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할 기회를 내게 주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직장의 상관을 주셨다면 그것도 역시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비록 내가 그 상관보다 직급이 낮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 사람을 전도하는 전도자로, 또한 그를 양육할 목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삶을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의 본으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2절부터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주님의 고난을 묘사합니다. 22절에 보면, 그 분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신 분입니다.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 입에 궤사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과 행실에서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흠이 없으신 모습은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우리를 절망시키고 낙심시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강조점은 그렇게 흠이 없는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3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쟁 역사에 보면, '마카비 전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카비 가문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위협했습니다, "너는 나를 불로 태워 죽이지만 너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서 심판을 면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렇게 위협하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능력으로 위협하지도 않았고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 분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공의로 심판한다는 말의 '심판한다'는 동사는 현재시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늘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보복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재판하실 것을 믿고 오직 인내하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4절)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의 언어는 단지 사환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닙니다. 더 넓게 확대해서 모든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함입니다. 그 분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25절)
양과 목자의 비유는 구약과 신약을 통 털어 성경에서 아주 두드러진 비유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목자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인내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보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목자되신 주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목적 때문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인내하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관들의 행동이 옳기 때문에 무조건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시정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본을 보여야 그들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자기 희생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희생을 당하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마음에 감동을 받고 변화된 것이 아닙니까? 나 같은 사람을 건지기 위해 그 모진 고초를 참고 견디셨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을 희생하고 섬길 때 비로소 그의 영혼이 그 행동을 보고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주님께서 우리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로 부르신 목적이요 소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인내 때문에 오늘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가 목자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말은 많지만 삶은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를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 주님의 본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기희생의 삶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로부터 "나를 따라오라!"(마가복음 4장 19절)고 직접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실 때, 재판을 받으러 가실 때 베드로는 가까이 따라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갔습니다 (마가복음 26장 58절).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그 발자국을 그대로 좇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발자국은커녕 그림자조차 밟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리 주님을 부인하고 실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가르칩니다, "이것이 너희의 소명이다.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려고 너희를 부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발자취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의 죽으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으라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과 같은 모습으로 죽으라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각자가 다른 모양의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 고난의 정도도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길로, 그런 방향으로 함께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3. 적용과 권면
이제 세 번째로 당시 사회에서 주인에게 순복하라는 것을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본문이 기록된 당시와 같은 노예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직장생활에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적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섣불리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이 본문에 있는 순종을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주석가들은 여러 지침을 내어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신학자이자 주석가인 Howard Marshall의 다섯 가지 원리는 우리에게 좋은 가이드가 됩니다.
1) 우리의 모든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 우리의 행동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열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사회적 관계성'이라는 것은 모든 종류의 직업적인 관계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직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직업이 요청하는 의무들과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직업적인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행동은 고용주의 개인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업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4) 우리가 관계성 속에서 맺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복음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5) 만약 우리가 감당하는 의무의 결과로 고통을 당한다면 그러한 고통은 칭찬할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을 우리의 직장생활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1) 맡겨진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고대의 종들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는 오늘날 적용하면 의무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생활은 사실상 계약입니다. 내가 속한 직장을 위해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사도 있고 동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갑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감당하지 않는 것 때문에 전도에 지장이 됩니다. 믿지 않는 직장의 동료들이 어떤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을 판단합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교회에 가서 충성을 하는가를 보고 판단합니까? 혹시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여러분의 직장생활을 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만약 직장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러분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용주나 상사들도 여러분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부당한 요구를 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한다 할지라도 맡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다면 그들은 여러분을 인정할 것입니다. 직장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베드로는 순복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을 주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어떤 사안을 두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기 희생적으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간혹 주일에도 출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야간에 근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교회의 모임과 시간이 겹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문제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교회에 간다고 빠지고 나면 다른 사람들만 골탕을 먹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쌓이면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라는 좋지 못한 평판을 듣게 됩니다.
교회의 장로인 모 대학의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일에 직장에 출근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모든 사람이 출근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각 부서에 한 사람씩 출근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상황에서 출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다들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그 때 교회의 장로인 교수님이 자원해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직장에서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자원해서 자기 희생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됩니다.
제가 군대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저는 군대에서도 교회에 빠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낮 예배, 저녁예배 등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속한 분과의 이등병 두 명이 입대 후 첫 외출을 나갔다고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등병이기 때문에 정확히 시간 전에 들어오라고 열심히 교육을 시켜서 걱정을 하면서 내 보낸 것인데 무슨 이유인지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저와 제 선임병사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저녁예배에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빠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일로 빠진다는 것이 마음에 편치가 않았습니다. 또 한편 이렇게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혼자만 빠져나간다는 것이 무책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결단을 내리고 저녁예배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두 명의 이등병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 선임병사가 그 친구들을 혼내면서 한 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너희들 때문에 한 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던 안 진섭이가 오죽 걱정이 되었으면 교회도 못 갔겠느냐?"고 하면서 혼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녁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것이 그 분에게는 우리 분과가 당한 어려움에 동참하기 위해 목숨처럼 지키던 예배시간을 포기하는 자기 희생적인 결단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 후 그 분은 오히려 시간이 되면 제게 교회에 가라고 권하는 그런 관계가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사는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희생적인 결정을 하고 그 직장의 어려움에 동참하면 그들이 여러분을 참된 신앙인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물론 매주 주일에 교회에 갈 수 없도록 요구하는 직장이라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직장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발적인 상황으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여러분이 먼저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불신자들과 섞여 사는 사회와 직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할 태도입니다.
3) 우리는 이런 모든 일의 결정 속에서 근본적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기 희생을 통해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을 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가 속한 직장과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일수록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잘 모르는 사람은 말로 전도할 수 있지만 잘 아는 사람은 행동으로만 전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전도입니다. 삶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생활은 그 자체가 전도의 현장이고 선교의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 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 삶으로 본을 보이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지금의 직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기독교 인구가 일년에 15만 명씩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한국교회가 불신자들에게 자기 희생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자기의 이익을 채우는 것에만 급급한 것으로 보였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은 개개인대로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으로 비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아픔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 예수를 따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유익을 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진 것을 모두 주면서 살았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할 수만 있으면 남의 것이라도 뺏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영광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사는 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기를 희생하지 못하고 내 것을 채우는데 관심을 두는 한 우리는 지역사회의 사람들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를 희생하기보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자기를 채우기에 급급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주변의 사람들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환경 가운데 보내주신 것은 생활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증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제일 가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그것은 말로만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너도나도 이기고 싶어하고 남을 밟고서라도 앞서고 싶어하는 시대입니다. 부정을 행해서라도 자기 배를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런 부패한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 부패한 시대에 우리 새누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시대에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목자되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말하지 말고 몸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작든 크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말에 지쳤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 삶의 실천이 없는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아니 살아 계신다 해도 우리 삶과 실제적인 상관이 없이 멀리 떠나 계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죽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바로 자신의 몸이신 이 땅의 교회, 특별히 우리 새누리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고 우리의 작은 몸짓으로 나타내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존경하지만 교회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이 세대 앞에 참으로 우리 새누리가 살아 계신 예수의 몸이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희생을 자처하십시오. 당장에 대단한 희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양보하십시오. 한 번만 져주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희생을 보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기희생을 통해서 여러분은 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 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방황하고 헤매던 저희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 이제는 목자되신 주님을 따르는 착한 양이 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세상을 둘러보면 우리 주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그 희생을 본받아서 그렇게 양보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목자되신 주님 앞으로 이끌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말에 지친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인들의 말에 지쳐있는 사람들 앞에, 이제는 우리의 삶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 교회가 그분의 몸이신 것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증거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굳건히 세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선택적 고난의 의미
베드로전서 2:18-25 / 곽선희 목사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저서 "Man for Himself"라고 하는 그 책에서 건강한 성격을 지닌 사람의 특징을 논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성격. 요새 우리는 건강하지 못한 성격, 건강하지 못한 인격으로 인해서 많은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판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성격은 네가지 특성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생산적 성향을 가졌다. 생산적 성향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생산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랑 자체가 남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남을 죽이는 것이 많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로 얼마나 남을 괴롭히는지... 이것은 비생산적입니다.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산적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자의 어려움에 내가 책임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책임을 같이 지면서 특별히 상대방을 높이 존경하는 것입니다. 존경해서 그를 높이고 동시에 결과로 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생산적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생산적 사고입니다. 생각이 생산적입니다. 그래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볼 줄 알고 과거와 현재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볼 줄 압니다. 우리는 과거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아주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바라볼 줄 알고 또 주관적인 생각, 자기 생각에 집착을 하면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객관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사이에. 객관적 시각을 넉넉하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적 사고이고, 또 하나는 생산적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행복 그 자체가 바로 창조력입니다. 요새는 창의력으로 산다는 말을 합니다. 창의력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마음에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이 창의력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생산적 양심, 저는 오늘 여기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양심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양심에 고통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당장 얼굴이 썩습니다. 몸도 비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정말 본의 아니게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양심이 훨훨 나는 것처럼 항상 자유로워야 합니다. 외부의 압력에 대해서 초연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바로 그러한 양심이 바로 생산적 양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The City of God,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저 속에서 이렇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고통은 같은데 전혀 다른 두 가지 사람입니다. 그 고통의 결과를 이렇게 맺고 있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빅터 E. 프랭클(Victor E. Frankel) 이라고 하는 분을 많이 알고 계십니다. 그는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다른 사람들도 고난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책을 썼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는 이 책을 특별히 감명 깊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비슷한 북한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한 5개월 동안 고생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제 노동 수용소는 땅에 있는 지옥입니다. '세상에 이런 데도 있구나.' 참 하나님께서 어찌하던 간에 그걸 한 번 나로 하여금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서 그냥 죽었으면 여러분을 못 볼 뻔하였는데... 어쨌든 참 기적 중의 기적으로 제가 살아서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보통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가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으십시오. 고난 속에서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놀라운 축복일 수 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에게는 고난은 축복일 수 있다. 여러분, 두고두고 생각할만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난 당하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떻게 해야 고난을 면할 수 있다. 고난을 피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실존적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말합니다. 오로지 고난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 또 하나는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 그리고 의를 위하여 스스로 선택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 여러분은 어느 쪽 고난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어떤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원칙적으로 기본입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시장에 가보면 어머니들께서 아이들을 집에 둘 수가 없어서 데리고 나왔는데 겨우 걸어 다니는 세,네살 아이들이 어머니를 따라나와서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집에 떨어져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 복잡한 곳에서 고생을 하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치마 끝을 붙들고 그 복잡한 시장을 다니려니까... 가끔 보면 어머니가 또 쥐어박더라구요, 징징거린다고. 그래도 그냥 울면서 어머니를 쫓아다니는 것을 볼 때에 '이것이 믿음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어머니가 쥐어박아도 나를 사랑한다. 절대로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저 어머니가 나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 끝까지 믿고 따라가면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보면서 참으로 훌륭한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여러분, Meaningful, Dispensational 그리고 Scenario의. 반드시 해피엔드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 해피엔드를 믿는 사람은 그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 서부영화를 보십니까? 서부영화를 볼 때에는 마음을 탁 놓고 보십시오. 주연배우는 절대로 안 죽습니다. 안 죽게 되어있습니다. 나쁜 놈만 죽지 좋은 사람은 안 죽습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 해피엔드, 오메가 포인트( point)를 딱 손에 들고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엄청난 아들을 나를 위하여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그래서 죄 사함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은사입니다. 모든 것들이 축복입니다. 철저하게 그렇게 믿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해도." 세상에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아디코스"라는 말은 unjust라는 뜻입니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나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나의 실수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해서 내가 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옆집 사람이 불조심하지 않아서 불이 붙으니까 그 집 붙으면서 우리 집까지 타버렸잖아요.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연루되어서 뜻도 모르는, 아무 이유도 없는, 정말로 맹랑한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요새 더구나 사업하시는 분들은 연쇄부도가 나서 어렵게 되는 분들이 참 많더라구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왜 당하는지, 어째서 당하는지, 결과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당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께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우니라. 아름답다는 말은 헬라원문대로는 카리스, 은혜롭다는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는가?' 보지도 마십시오. '왜 이런 일이 있느냐?' 더 이상 묻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 큰 은혜를 생각하면서 참으십시오. 그리하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또, '죄악이 있어서 고난 당하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인생은 추수입니다. 가만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오늘도 심고 또 한편으로 거둡니다. 어제 심고 오늘 거두고, 오늘 심고 내일 거둡니다. 부모가 심고 자식이 거두고 여러분이 심고 자식이 거둡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까? 당신 눈에 피가 날 것입니다. 남을 속이셨습니까? 근사하게 속이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엄청나게 속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내가 말 잘못 한 것, 말로 인한 실수, 부덕한 말, 부덕한 행동, 내가 심고 내가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회개가 있을 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죄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은 가장 저질적인 고난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다른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이제라도 회개의 길을 찾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니까 '의를 위하여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면'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선택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쿼바디스"라고 하는 영화를 대개 다 보셨을 것입니다. 쿼바디스의 장면을 자세히 보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맘에 안 들어서, 소위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불을 지릅니다. 다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려고. 아, 불을 지른 다음에 원망이 많으니까 이것을 기독교인에게 씌워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이 항상 불로 심판한다고 하다가 불을 지른다고. 이래서 정말 애매하지 않습니까? 불은 네로 황제가 지르고 죽기는 기독교인이 죽습니다. 수만 명을 잡아다가 원형극장에서 죽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무모한 죽음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있던 베드로가 같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망을 합니다. 로마에서만 빠져나가면 되니까. 로마성 밖으로 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쪽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바로 그 말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를 향해서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로마로 갑니다. 가서 그는 십자가에 죽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같은 모양으로 죽겠느냐? 거꾸로 매달아라."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베드로가 순교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 거기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저는 로마에 갈 때마다 그 자리에 한번씩 서봅니다. 여기 서서 주님을 만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베드로의 그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여러분, 피해가다가 잡히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한탄하며, 저주하며, 죽는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선택적입니다. 온전히 선택적입니다.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일부러 당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잘 아는 대로 억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말이 있죠, 악법도 법이라고. 악법에 의해 그는 처형이 되는데, 처형장에 나갈 때에 그의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억울합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선생님이 이렇게 죽으십니까?"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돌아서서 빙그레 웃고 한 말이, 이것이 명답입니다. "이놈들아, 그럼 내가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죄가 없이 죽어야지. 여러분, 어차피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억울하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사실 억울한 고난을 당해야 사람다운 사람이지 죄가 있어서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억울하다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선택적으로 고난의 길을 갑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본을 끼쳐 우리로 하여금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첫째, 죄 없이, 죄 없이 당하였고 둘째, 입에 괘사가 없었습니다. 아무 변명이 없었습니다. 변명이 없어야 됩니다. 한마디 변명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대신 욕하지 않았습니다. 욕을 당하되 대신 욕하지도 않고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짓궂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두 가지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하나, "이놈들 두고보자. 심판 날에 지옥으로 보내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뜻이 망가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고 괘사를 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고 위협하지도 않고 오직 공의로운 하나님께 다 맡기고 즐겁게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입니다.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힘겨워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는 무려 스물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명이 열살 전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 남은 가운데도 하나는 정신박약아입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했습니다. 인생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역경을 뚫고 끊임없이 불후의 명작을 썼습니다. 명곡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마다 그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쓰고 작품마다 마무리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바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하의 곡을 듣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영광이 넘치는 바하를 알지만은 바하가 한평생 이렇게 모진 고생을 했다는 것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모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의미를 압니다. 고난의 결과도 압니다. 고난의 필요도 압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압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은, 높은 곳으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을 어떤 의미로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를 통해서 날마다 새로운 승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람도 아니오 손이 짧음도 아니오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함도 아니라 오직 사랑 가운데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미쳐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고난을 주시고, 은사로 주시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고난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주님을 알게 하시고, 오늘도 새롭게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확인하면서 늘 승리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