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범 소설 열한번째 사과나무 --서럽게 아름다운 순수사랑문학의 결정판
아, 난 이 소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했던가.
조창인의 가시고기와 견줄 수 있는 눈물이었다.
부성애의 숭고함으로 한없는 눈물을 흘려야했던 가시고기라면,
사과나무는 이루지 못한 세월의 안타까움을 너무도 아프고 아름답게 그려낸
순수사랑문학의 결정판이었다.
16살 봄, 시골중학생 한지훈은 너무도 아리따운 소녀를 만나게된다.
자전거 은빛 바퀴살이 굴러갈 때마다 나풀거리던 치맛자락, 깜장구두,
고개를 들면 우유빛 원피스 받쳐입은 연보라색 털실 스웨터,
목덜미에 돋아난 노르스름한 솜털 사이로 드리워진 봄날의 눈부신 햇살,
코끝에 묻어나는 분꽃 내음, 달무리처럼 파인 보조개,
그 아이는 미루나무아래 보랏빛 붓꽃처럼 서있는 모습으로
그의 영혼에 깊이깊이 각인되었다.
그 소녀 이름은 유상은.
맑은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소녀의 영상, 느낌, 냄새는
소년의 마음을 혼통 헤집어 놓았고 그의 영원한 사랑이 되어 버렸다.
인연이란, 운명이란 미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숙명.
그는, 또 그들은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힘겨운 세월의 벽을 뚫어야만 했고,
그 감격의 축복은 너무도 짧았다.
소녀는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둔 비련을 안고 있었다.
내면에 가시가 박힌 듯 알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이별을 감내하며 그녀를 향한 거보를 내딛으며
사랑의 길을 강행하는 지훈.
눈앞의 사랑하는 여인을 보면서도 사랑을 확인하기까지엔
그 얼마나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했던가.
그 사랑의 확인은 너무도 짧았다.
16살 봄, 좋아하는 여학생에 전하고픈 사랑의 메시지를 묻고 10년 후에 확인하라는
열한번째 사과나무 밑의 유리병편지는 22살 그날 개봉되었고,
또 그들은 그날 약속한다. 그들 사랑의 약속을 담은 유리병을 30살 식목일에 펴보자고.
소녀는 운동권 투사가 되어 교도소에 갇혔고, 소년도 운동권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입대에
처한 연인들. 엇갈린 운명은 그들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지훈이 군에서 제대해 보니
상은은 독일로 유학을 떠난 후였다. 그녀의 연락처를 알고 있으리라 믿었던 민지는 두 번의
전화만 있었다는데... 친구를 통해 그녀 소식을 알아보니 그녀는 여자아이 딸린 유부녀가
되어 버렸다는 것. 세상은 온통 절망이었다.
아, 무심한 세월이여. 사랑에 운명을 걸리라던 소년은 이제 가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통과 서러움으로 모든 걸 잊고 세월을 지우며 그저 숨쉬는 한 인생이 있을 뿐.
30살 식목일, 어떤 미련으로 사과나무 밭에 와 보지만 떠나간 사랑은 다시 만날 길이
없었죠. 그도 이젠 덤덤한 인생이 있을 뿐, 민지와 결혼하고 부대끼는 세월들..
지훈은 광고 카피라이터, 대학교수를 거쳐 그는 문예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한다.
거기서 만난 사과나무라는 아이디. 아픈 사랑과 인생살이, 그리고 병들어 힘겨워하는
일기식 소설을 올리고 있었다. 채팅에서 그녀는 22살의 소설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며
그의 고향에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온다.
지훈은 이틀동안 고향의 카페를 찾아 지나온 세월과 추억을 음미하며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3일째 나타난 여자는 22살이 아닌 15-16살의 소녀였다.
소녀는 조용한 슬픔을 안고 있었다. 송이는 아픈 엄마 얘기를 꺼냈다.
교도소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연인은 군대에 있었다. 사랑을 찾아 유학에서
귀국했지만 남자는 결혼해 있었고 엄마는 뇌종양으로 아팠다. 이제 시한부 인생으로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소녀의 집으로 가는 길, 소녀가 되돌아보았을 때 자신의 첫사랑 소녀가 서 있었다.
아찔한 예감 ! 소녀의 엄마라는 여자의 모든 행적들이 자신의 영원한 사랑 상은의
얘기였다 ! 그리고 그녀는 남은 시간이 이제 얼마 없다. "엄마 임종을 지켜주세요..."
서로 사랑하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세월들, 엇갈린 운명, 그 야속한 세월의 아픔.
이제는 죽어가고 있는 영원한 사랑 상은. 혼자 아이를 낳고 이국에서 외로움에 지쳐갈 때
몸은 병들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래도 사랑을 찾아 고국을 찾았건만 님은 떠난 후.
사랑하는 여인이 그 얼마나 힘겹게 세월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는지.
"살아있을 때, 살아갈 시간이 남아 있었을 때 난 깨달았어야 했어. 사랑은 양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사랑은 누군가에게 대신 짊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상은은 죽어가면서야 사랑의 철학을 새롭게, 너무도 뒤늦게 깨달았다.
지훈을 끔찍이 사랑하던 민지에게 자신의 운명과 사랑을 맡겨버린 바보.
연적이 연락처며 지훈의 아이를 상은이 낳았다는 말을 해주길 기대했단 말인가.
이 소설을 읽으면, 이별을 위한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그토록 서럽게 사랑하면서도
연인들이 만날 수 없게 하는 이야기에 작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 교도서와 군대,
유학과 민지의 방해, 그리고 오랫동안의 상의 연락부재, 그리고 30살 식목일에
귀국을 했으면서도 상은이 몸이 아파 나올 수 없었던 것, 민지의 결혼통보에도
상은이 적극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
그럼에도 이 소설엔 정말 많은 미학이 숨겨져 있었다.
첫사랑이 시작되는 과정,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재회하며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문학으로 기억될 것 같다.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했던 사랑스럽고 안스러운 소녀 송이,
사랑하는 이를 여보라고 불러보지도 못하며 힘든 세월 싸워왔던 상은,
사랑을 만나지도 못해 아픔 가슴 오열했던 지훈,
이들이 상은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 대면하는 짧은 시간, 영원의 이야기.
아, 난 그 얼마나 많은 눈물 흘리며 세수하면서 또 눈물 자아냈던지...
이용범이라는 작가는 시에 통달한 듯 문체가 대단히 아름답고 감미로웠다.
그야말로 가슴에서 노래하고 가슴으로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문학을 선사한 것.
또, 이 소설엔 우리시대의 정신이 녹아있었다. 이제는 잊혀져 가는 농촌의 아름다움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다니. 운동권 이야기, 그리고 인생과 사랑의 담론들이
모두 수준급이었다.
나도 이런 이야기 단 한편만 써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난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었지. 내가 해보고싶던 사랑, 받고 싶은 사랑을
이렇게 글로 써나가고 싶다.
문학은 꿈이요 환상일지 모르겠다. 현실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없겠지 싶지만
너무나 달콤하고 행복하다. 어쩌면 인간의 행복이란 순간의 착각일지도 모를 일.
어쩌면 진정한 행복이란 자기 상상 속에서 꽃피울지도 모를 일.
현실 속에서 불가능할지도 모를 사랑을 노래하더라도 너무나 달콤하고 행복하다.
내 바람과 소망은 현실 속에서가 아닌 문학적 환상 속에서 꽃피워야 하지 않을까.
그게 어쩌면 더 큰 기쁨이요 축복이요 행복이 아닐까 ?
영원히 아름다운 사랑은 꿈일까 ?
가슴 아리게 충만된 이 사랑의 기쁨과 감격은 또 무어란 말인가.
아 사랑의 아름다움이여.
나 왜 청춘시절 그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키우지 못했을지.
누군가를 향해 내 모든 걸 걸어 받칠 수 있는 사랑. 영원의 이름으로 내 가슴에
듬뿍 사랑의 충만함을 왜 느끼지 못했을지.
이 추운 계절, 진실된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을 꿈꿔보고 싶다.
그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추위를 느끼지도 못할
뜨거운 가슴을 간직하며 음미해보고 싶다.
아, 사랑이여, 꿈이여, 문학이여 !
2004 12 10 금 09:27
산책시간 강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