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치유의 숲’에서
고즈넉하다 못해 고혹하기조차 한 투명한 날빛. 사그락 사그락, 들리는 건 낙엽 밟히는 소리뿐이다. 만추로 물든 숲길은 부드러우면서 쓸쓸했다. 멀리서 산까치 울음소리가 들렸다. 더없이 높고 쾌청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농밀한 파란색 커튼을 두르고 있다. 막 볶아낸 커피 향 같은 낙엽 냄새가 이맘때 즐기는 ‘만추의 향’이다. 향 중에 ‘여름 풀향’과 ‘낙엽 향’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보송한 가을 햇살이 곧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쏟아졌다. ‘노는 볕이 아깝다’며 장독대를 열어놓고 이부자리를 내다 말리시던 어머니 얼굴이 가을볕을 타고 떠오른다. 숲길에 바람이 일자 우수수 낙엽들이 저마다 몸을 뒤척이고, 코끝을 스치는 낙엽 향에 후각마저 흐뭇하다. 낙엽에는 일상에서 듣기 어려운 고주파가 있어 우울증 같은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데 좋다고 한다. 그 편안함 때문일까. 낙엽을 보고 있으면 아팠던 기억과 기뻤던 추억이 동시에 밀려온다.
양평의 한 ‘치유의 숲’에서 소설 《빙점(氷點)》의 배경이 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아사히카와(旭川)의 숲을 떠올렸다. 엊그제 다시 읽기를 끝낸 두툼한 소설이 뇌파에 남긴 잔상 때문일 것이다.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소설 《빙점》은 1966년에 출간된 이후 4,300만 부 넘게 판매된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시대와 계층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작품이다. 40년 만에 다시 손에 잡은 《빙점》은 인간의 원죄를 파고드는 섬세한 심리 묘사가 작품의 재미와 매력을 더해주었다.
소설은 ‘섭씨 0도’라는 ‘빙점’의 모호성을 복선으로 깔고 있다. 사랑과 유혹, 배신과 복수, 희생과 용서라는 그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의 한계와 바닥에 스며 있는 원죄가 모두를 혼돈 속으로 빠뜨린다. 일밖에 모르는 병원장(스지구치)의 아내 나쓰에는 젊은 의사와 은밀한 사랑을 즐기려고 어린 딸 로리코를 밖으로 내보낸 것이, 유괴범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을 불렀다. 게다가 아내의 부정까지 알게 된 스지 구치는 극심한 배신감과 복수심이 들끓어 잔인하게도 범인의 딸을 입양하면서 주인공들의 가슴에 갈등의 불을 지핀다.
아픔을 달래려고 아내는 새 딸에게 요코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면서 가정은 겉으로 다시 평화를 되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요코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서재를 청소하던 나쓰에는 남편의 일기장에 손을 대다가 요코의 신원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자신을 향한 남편의 증오를 알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딸을 죽인 살인범의 자식 요코에 대한 애증이 회오리쳤다.
요코는 갑자기 변한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상황을 묵묵히 견뎌냈다. 세월이 지나 18세 된 요코에게 한 청년이 나타나 사랑을 고백하는데, 나쓰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요코가 그런 훌륭한 집안의 자제와 결혼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요코가 우리 딸이 못 누린 행복을 누릴 수는 없어.” 끝내 나쓰에는 요코가 자신의 딸 로리코를 죽인 범인의 딸임을 폭로했다. 그제사 요코는 자신에게 살인범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동안 많은 아픔을 이겨낸 요코였지만, 원죄의 피가 흐른다는 본질적인 죄의식은 끝내 여린 여자를 자살로 내몰고 만다. 로리코가 살해된 그 강가에서…. 그러나 진실은 요코가 범죄자의 자식이 아니었다는 것. 요코를 소개한 남편 친구가 입을 연 것이다. “차마 범인의 딸을 자네에게 입양시킬 수는 없었네. 적당할 때 말하려고 했네.” 진실이 밝혀지자 부부는 죄책감에 절규하면서 요코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쓴다.
인상 깊었던 건 《빙점》의 마지막 대목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요코가 미움과 증오로 가득한 삶을 버리기 위해 하얗게 눈이 덮인 겨울날, 언덕길을 오르는 장면이다. 높은 언덕에 오른 요코는 하얀 눈길 위에 남겨놓은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보았다. 분명히 자신은 똑바로 앞을 향해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눈 위에 나 있는 발자국은 삐뚤빼뚤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원죄의 후예인 연약한 인간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도 돌을 던질 수 없는, 사람은 모두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란 것을. 사랑만이 가장 아름다운 적정 온도이며 모든 결함도 덮어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신이 가르치는 사랑이란 것을 말이다.
1922년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시에서 태어난 미우라 아야코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에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어린 학생들에게 이 전쟁은 성전(聖戰)이라 가르친 군국 교사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자기가 가르친 것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전쟁의 도구로 교육시킨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고, 폐병이 들도록 죄책감에 시달렸다.
미우라 아야코는 생전에, “한국이나 중국에 가게 된다면, 저는 그 나라 땅을 발로 밟고 걸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기어갈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작가로 성공한 후 자신의 집을 찾는 한국인 방문객들에게 먼저 바닥에 엎드리고 사죄부터 했다. “당신 나라에 일본이 행한 침략과 폭력의 죄를 참회합니다.” 용서를 구한 후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는 계절도 저물고 있다. 이때를 콕 짚어 시인 서정주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고 권했다. 고은이 쓰고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를 부른 최양숙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며 만추의 손끝을 내밀며 파동을 전했다. 자연의 색은 무한한 그리움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무한한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흙을 맨발로 밟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나, 황토 방에 누우면 심신이 안락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맘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짧은 시간. 이 가을이 주는 자연의 색과 온도는 가장 아름답고 안온한 ‘적정 온도’를 느끼게 한다. 양평 산음 자연휴양림 ‘치유의 숲’에서 소설 《빙점》을 떠올리고, 그리고 한참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붉은 잎들이 이생에서 드리는 마지막 미사를 지켜보았다. 늘 아름다운 건 잠시뿐. 낙엽이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이 또한 곧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고, 화석의 시간으로 남으리.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첫댓글 빙점,한편의 슬픈영화 한편을 봤네요
어른들의 잘못으로
한 생명이 세상을 등지면 안되는데
성남님 고맙습니다^^
읽어주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