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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타자“
신성 로마제국 주교이자 역사가였던 오토 본 프라이징 Otto von Freising (1112-1158)이 12세기 황제의 명을 받아 이웃나라 헝가리를 탐사하러 갔을 때 무엇보다 그를 충격에 빠뜨렸던 것은 헝가리인들의 추한 얼굴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헝가리인들은 깊숙하게 파인 눈과 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태생적으로 몸집이 작다. 그리고 풍습이나 언어면에서 완전히 미개인들Barbaren이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런 인간괴물menschlichen Scheusalen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운명을 탓하거나 신의 너그러움 덕분이라고 밖에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1]
당시 신성로마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헝가리는 16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으로 터어키의 지배에 떨어지기 전까지 600여년동안 훌륭한 문화를 형성해왔던 독립 왕국이었다. 인종상으로 볼 때 헝가리인들이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게르만족과 어느 정도 구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유럽인과 아프리카 혹은 아시아 인종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매우 근소한 차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너무도 당연히 „유럽문화“의 당당한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헝가리 인들이12세기 신성로마 제국의 주교에게는 어째서 그들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 때문에 운명을 탓하거나 신의 관용에 놀라와할만한 „미개인들“로, 심지어 „인간괴물“로 보여졌던 것일까? 왜 저 12세기의 독일인은 우리가 보기엔 별 차이 없이 „유럽인“이자 „유럽문화“에 속하는 이 헝가리인들을 자신들과는 그토록이나 다르게 생긴, 심지어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부르기 힘든’ „타자“로 보았던 것일까?
„타자, 이방인“이라고 번역되는 라틴어 어원 „Alienus“ 또는 „ Alias“ 는 원래 „다른 곳에 있는, 다른, 다른 이에게 속하는, 이 곳과는 거리가 있는“ 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곳이 아닌 다른 곳, 우리가 있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 extraneus에서 온 존재, 그들이 바로 타자이자 이방인이라 불리워졌다. 우리가 있는 „이 곳“이 아닌 „저 곳“,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그들은, 따라서 우리에게 익숙하고, 잘 알려져있는 것과는 „다른“ 낯선 존재들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아닌 곳, 곧 다른 행성에서 온 „Extra- Territorial“ 존재를 „ Alien외계인“ 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자와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지정학적 어원을 코스모스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이방인, 타자“에 대한 지각과 인식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과 분리될 수 없이 결부되어 있다. „여기, 이 곳“에 속하지 않는 존재,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따라서 „낯선 이방인“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 곳, 여기,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와는 구별되는 „타자, 이방인“에 대한 인식은 생겨날 수 없으며, 동시에 „타자, 이방인“에 대한 인식은 그로부터 구별되는 „우리자신“에 대한 의식을 수반하고, 또 그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란, „우리가 아닌 „저기 저 곳“에 있는 타자들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성립한다“ [2] 고 말한다. 우리와는 다른 ‚타자’에 대한 인식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차이로써의 육체
‚타자’로 부터 ‚우리’를 구별하고, 그를통해 우리라고 하는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이러한 ‚구별짓기’의 과정이 어디서보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또 역사적으로도 가장 먼저 생겨나게 된 영역은 ‚육체에 대한 지각’일 것이다. 그건 첫째로, „저들“의 삶의 환경, 언어, 삶의 방식과 습성 등에 인식을 통해 ‚저들’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가 인식되기 전에 가장 먼저 가시화되고 감지되는 대상이 육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육체는 거기서 ‚우리’와 ‚저들’ 사이의 차이가 인지되는 대상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불변적이다. 언어, 종교, 생활 습관 등의 차이들이 일정한 조건들 하에선 변화하거나 굴곡을 겪을 수 있으며, 따라서 경우에 따라선 한 언어, 종교, 생활 습관에서 다른 언어, 종교, 생활 습관에로의 변화, 전환 혹은 개종 등이 가능한데 반해 육체는 그 육체의 담지자가 어떤 언어를 말하고,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생활 습관을 가지건 상관없이 그가 살아있는 한 그의 현존을 구성한다. 누군가 아무리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한국적 생활 습관에 완전히 익숙해있다 하더라도 그의 육체가 우리 – 한국인들의 집합적 육체적 정체성 – 과 ‚차이’를 드러내 보이는 한, 우린 그를 여전히 우리와는 다른 ‚타자’이자 ‚이방인’으로 – 하지만 ‚진귀한 이방인’으로 – 여긴다.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우리’와 타자/이방인의 구분이 무엇보다도 그들과 우리 사이의 육체적, 인상학적 차이를 지적하면서이루어져 왔던[3] 것은 놀라울 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신성로마 제국인 오토 본 프라이징에게 이웃나라 헝가리인들의 육체가 그들과는 철저하게 다른 - ‚도저히 인간으로 볼 수 없는’ – 것으로 보여졌다는 데에서 우리는 오토 본 프라이징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요구를 읽어볼 수 있다. 찬란했던 고대 로마 제국을 계승하겠다는 이념으로 건설된 신성 로마 제국이 자국의 우월한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할수록 그 제국에 속하지 않는 주변국가와 그 사람들은 더욱 저급한 „미개인“이자 „야만인“으로 간주되어야 했고, ‚구별짓기’를 욕구하는 그의 시선이 그들의 육체 속에서 그 „미개성“의 가시적 증거를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특성들에 근거해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려는 과정은 중립적이고 탈 가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와 „저들“ 사이의 육체적 차이는 „저들“에 대한 „우리“의 우월성과 우위를 증거해 줄 규범적, 가치 위계에 의거해 „평가적으로 관찰“ 되어왔다. 우리와는 다른 피부 색깔, 골격과 얼굴 표정, 육체적 특성, 나아가 그들의 특유한 제스쳐 등은 우리의 „우월성과 우위“를 증거해 줄 가치 위계에 따라 지각되고, 평가되었고, 그를통해 타자의 육체는 이상적인 기준이자 척도로 고양된 „우리“ 육체와의 관계 속에서 부정적이고, 열등한 „비정상“, „퇴화“ 혹은 „미숙“한 것으로 여겨진다. „저들“, 곧 ‚타자’ 로부터 „우리“를 우월한 존재로 구별지우려는 문화적 에토스가 클수록 타자의 육체는 더 ‚추’하고, 흉악하며, 비 정상적이고 부조화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문명 대 야만“ 이라는 역사 철학적 기준이 도입되면서 부터 타자의 육체는 저 ‚야만’에 부과되던 모든 부정적 특성들을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지각되고 묘사되며 그려져왔다. 이를통해 타자의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타자에 대한 문화적, 정치/경제적 태도와 관계맺는다.
흑인의 육체
유럽 문화사에서 흑인들의 육체를 둘러싼 담론들은 자신과 타자의 변증법이 어떻게 타자의 육체에 대한 지각을 규정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류 보편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 유럽 중심주의는 흑인의 육체를 정상적 육체성에 전적으로 대립하는 „비정상, 퇴화, 타락“의 살아있는 증표로 여겼다. 흑인들의 육체와 유럽인들의 육체와의 „차이“ 는 유럽인들이 자기 자신을 더 우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려는 구별짓기의 에토스를 통해 심미적 – 추함, 부조화, 거침 – 으로는 물론 도덕적 – 성적 방종, 타락 – 으로까지 평가절하되어 지각되고, 평가되며 묘사되어왔다.[4] 흑인들의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는 고대 시대부터 겁많은 존재의 상징으로 간주되어왔고 [5], 여기에 유럽 문화사 내에서 ‚검은색’이 갖는 부정적 의미론 – 사탄, 악마, 어두움, 지옥 등 – 들이 덧붙여져 흑인들의 육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흑인의 육체를 „비 정상, 퇴화, 타락’의 증표로 지각하는 데에는 나아가 종교적, 윤리적 지식체계도 동원되었다. 예를들어 근세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세계관에 지배되고 있던 유럽에서 흑인들은 노아의 아들 인 샘의 후손으로 간주되었는데, 거기엔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고 있는 모습을 뻔뻔스럽게 쳐다보았던 샘의 성적 노골성[6]을 흑인들의 성적 방종과 관련시키려는 생각이 작용하고 있었다. 타자의 육체에 대한 ‚지각’은 동시에 그 ‚타자’에 대한 담론을 통해 동시에 구성되는 것이다.
추함, 거칠음, 부조화, 과도한 성적 육체성 등 흑인들의 육체에 부과되었던 이러한 부정적 특성들은 유럽 인상학 Physiognomie 전통 속에서 계승 반복되었다. 근대 인상학의 창시자 요한 카스파 라바타 Caspar Lavater가 1775년 출간한 인상학 저서에서 무어인(흑인)의 얼굴은 한 마디로 거칠고, 투박함의 대표적인 사례로 열거되고 있다. „옆으로 찢어진 눈, 푹 눌려 꺼진 코, 특히 앞으로 튀어나온 강한 입술, 섬세함과 우아함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무어인의 인상의 특징이다.“ [7] 라바타는 이러한 흑인의 추하고 거친 육체와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얼굴이 훨씬 더 „고귀하고, 선량해보이며, 감정적이며, 섬세하다.“ [8] 고 말한다.
1783년 <인간 역사에 대한 철학적 이념> 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 법칙과 이념을 밝히려 했던 헤르더에게 흑인의 육체는 자유 분방하고 방종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라는, 오래된 흑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물에 다름 아니다. 헤르더에 따르면 흑인들의 „입술, 가슴, 나아가 성기관들“은 그 인상학적 특징에 따라 „보다 고귀한 천성에서 벗어나“ 있으며, „큰 감각적 향유를 즐길 수 있게“[9] 되어있다. „튀어나온 입과 작고 납작한 코, 뒤 쪽으로 밀려있는 이마, 원숭이 두개골과 유사한 머리, 목과 뒷머리, 몸 전체의 유연한 구조, 코와 피부에 이르기까지 (흑인들의 육체는) 동물적인 감각적 쾌락에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이러한 육체를 지닌 흑인들에게서는 „섬세한 정신성이...도취적 소질로 대체„[10] 되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부정적으로 지각되던 흑인의 육체는 유럽이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고 흑인들을 노예로 삼기 시작하면서 더욱 이데올로기적으로 평가되기에 이른다. 1888년 독일에서 출간된 <동물학, 인간학, 인종학 사전>에 실린 „검둥이 Neger“라는 항목은 흑인의 육체가 얼마나 그들이 노예로써의 합목적성을 드러내는 가를, 쉽게말해 얼마나 그들의 육체가 바로 노예로 일하기에 적합한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긴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 „두개골의 뼈 골격은 무겁고 두꺼우며 단단하다….전체적으로 이들의 두뇌는 백인보다 용적이 작으며, 두뇌 주름도 잘 발달되어 있지 않다…작고, 좁고, 낮은 구슬 형태의 이마는 편편하지 않다. 넓은 눈 두덩안에 좁게 찢어진 검은 눈이 자리잡고 있으며…코는 두텁고 편편하며 종종 납작하게 눌려있고 넓고 비스듬한 구멍이 나있다. 후각과 미각이 매우 강하지만, 거칠어서 흑인들은 무엇이든 다 먹을 수 있으며 (우리는) 참기 힘든 악취도 향기로와한다….입술은 두텁고 튀어나와 있으며 검은 적색이다....피부 색깔은 어둡고 짙은 흑단색에서 브라운, 나아가 혼탁한 가죽 황색에 이르는 모든 색깔을 지니고 있다. 백인보다 피부가 두텁고 둔감하며, 손바닥은 백인보다 더 단단하다…그들의 땀과 피부 분비물에선 고약한 악취가 난다. 목은 두텁고 짧고 강하며…그에반해 척추는 그렇게 유연하지 못하다…이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흑인은 노동 능력과 관련해 매우 강한 인종이며 더운 환경 속에서 살 수 있는 점에서 백인을 능가한다….흑인은 하루종일 아무 생각없이 살며, 쓸데없은 짓거리로 시시덕거리면서 아무일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배가 고프거나 성적 쾌락을 느낄때만 이 게으름에서 깨어난다…흑인에겐 스스로 사고하는 하는 능력이 없어 조련시킬 수는 있어도 제대로 교육시키기는 힘들다.“ [11]
위 인용문에서 우리는 타자의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그 타자를 바라보는 주체가 그 타자에 대해 갖는 사회적, 문화적 관계가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타자의 육체에 대한 이러한 시선이 한 발자욱만 더 나아간다면 곧바로 인종주의가 된다. 인종주의는 타자와 자신과의 육체적 차이를 절대화시켜 그를 자신의 우월성을 이끌어내는 척도로 삼는다. 이를통해 타자의 태생적이고, 생물학적인 육체적 특성들과 우리의 육체와의 ‚차이’는 문화적, 도덕적, 심미적 가치 기준에 따라 위계화되고, 결국엔 타자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생물학적으로 근거짓는 데 활용된다. 나찌 인종주의자였던 바르홀드 드라셔Warhold Drascher의 책 <백인종의 지배Die Vorherrschaft der Weißen Rasse>의 다음 구절은 이러한 사고 방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색 인종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특징들이 모두 부정적인 것이라는데에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백인의 특성들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두 백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인디안, 흑인, 중국인, 일본인, 말레이지아인, 이들 모두는 밝은 백색 피부를 가지지 못한 „유색인종“들이다. 그들 내에서도 피부 색깔에 따른 위계가 존재한다. 피부색이 검으면 검을수록 그들의 지위는 더 낮아진다.„[12]
동양인의 육체
그렇다면 흑인과 더불어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또 하나의 ‚유색인종’ 이었던 동양인들의 육체는 유럽인들에게 어떻게 지각되어 왔을까? 그리고 그런 동양인들의 육체를 바라보는 유럽의 시각을 직/간접적으로 규정해옸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1252년 교황 인노센트 4세의 명으로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몽고를 방문했던 빌헬름 본 루브룩 Wilhelm von Rubruk (1215-1270)은 시찰 후 그가 본 몽고인들에 대한 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아시아적 타자의 추함에 대한 그의 놀라움은 그보다 약 100년전 헝가리인들의 육체에 대한 오토 본 프라이징의 충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빌헬름 본 루브룩에게 몽고인들은 마치 ‚나병에 걸린 듯’ 추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코는 마치 칼로 잘라내버린 것 같이 납작하게만 보였다. „여기 살고있는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추하게 생겼다. 그들은 마치 나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보였다.„[13] „특히 여자들의 얼굴을 보고 나는 정말 그들이 얼굴을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눈 사이에 코를 전부 잘라내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 얼굴엔 코가 없었다. 대신 그들은 코와 눈썹에 이상한 검은색 연고들을 처바르고 있었는데 그건 우리 눈에 정말 끔직하게 보였다. „.[14]
1579년 중국을 여행했던 포루투칼인 베르나르디노 에스칼라테에게도 중국인들의 인상은 „넓적한 얼굴“과 „작은 눈과 낮은 코“, 특히 „턱에 거의 수염이 나지 않은 것“ [15]으로 특징지워지는데, 중국인의 얼굴에 대한 이 프로필은 이후 중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에 대한 묘사의 전범으로 기능하게 된다. 예를들어 근세 유럽인들의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규정하였던 후앙 곤잘레즈 드 멘도자의 1588년 책 <The Historie of the Great and Mightie Kingdome of China > 에서도 중국인들은 “남녀 모두 넓적한 얼굴에, 작은 눈, 그리고 편편한 코를 하고 있으며, 남자들도 거의 턱에 수염이 없는”[16]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1736년 유럽에 Chinoiserie를 위시한 중국 찬양 열풍이 불고 있을 때 쓰여진 J. B. Du Halde 의 중국 소개 서적도 중국 여자들의 얼굴 특징을 묘사하면서 “그들의 코는 짧고, 눈은 작다” [17]라고 쓰고 있다. 나아가 1887년 중국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헤르더 역시 중국인들에 대한 이러한 인상학적 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작은 눈과 낮은 코, 편편한 이마, 얼마되지 않는 턱수염, 커다란 귀 그리고 천성적으로 튀어나온 배를 하고있다.“[18]
흑인의 육체에 대한 담론과 마찬가지로 동양인의 육체적 특성에 대한 논의 역시 다만 이러한 ‘차이’를 지적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여기서도 그 ‘차이’는 유럽적 자기중심주의적 가치 위계 속에서 우월함과 열등함을 드러내는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특히 18세기 이후부터 유럽이 아시아 지역으로 식민지를 확장해가면서, 그 전 세기 볼테르, 라이프니찌 등의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 ‘도덕주의적 이상국가’로 찬양되던 동양, 특히 중국에 대한 유럽의 태도가 점차 유럽중심적 우월주의로 변화해가면서 두드러지는데, 유럽을 전 세계 문명의 정점이자 완성태로 바라보는 역사철학의 성장과 함께하는 이러한 유럽 중심주의는 동양인의 육체적 특성을 흑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심미적, 도덕적 위계질서에 의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하는 사상사적 배경을 이룬다.
카스파 라파타 Caspar Lavater의 중국인의 인상학에 대한 서술에는 동양인의 육체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가 오해의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라바타에게 있어 중국인은 한마디로 사기꾼과 아첨꾼의 인상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부조화스럽게 넓은 두개골, 변발한 머리, 눈 위 얼마나지 않은 눈썹, 거의 잘 보이지 않는 눈꺼풀, 코뿌리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눈, 작고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코, 긴 윗입술, 코 아랫부분, 특히 유별나게 커다란 귀 등이 이 나라 사람들 인상의 특징들이다…이들은 무어인들(흑인들)과 비슷하게 낮은 도덕성을 갖고 있으며 복수심이 강하고 강도근성이 있는 거짓말장이이자 아첨꾼들이다.“ [19]
리히텐 베르크, 디드로, 칸트나 헤겔과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종과 민족들에 대한 이러한 인상학적 접근은 18세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이후 유럽의 인종학/인류학의 근본 방법론으로 통합되기에 이른다.[20] 최소한 20세기 말 이전까지 유럽의 인종/인류학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타자들의 육체들을 관찰, 측정, 묘사, 분류하고 그를 유럽적 육체를 규범적 이상으로 하는 육체적 특성의 위계질서 속에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거기서 타자의 육체들은
타자의 육체에 대한 이러한 인종학/인류학적 탐구와 묘사의 특징은 그것이 소위 객관성과 중립성을 표방하는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지면서도
그러나 이와는 반대 방향의 흐름도 존재한다. 20세기 이후 세계대전과 경제적 위기, 나아가 산업과 기술 발전으로 인한 사회, 문화적 패해가 유럽의 자기 중심주의를 흔들리게 했을때, 유럽에서는 소위 ‚자연상태’라고 여겨진 비유럽, 특히 오리엔트 문화에 대한 엑소티즘이 자라났다. 특히 동양과 아시아의 문화는 많은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 서구문명의 폐해를 치유하고 극복할 새로운 대안으로 동경되었다. 유럽에서 인상주의 회화가 생겨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일본 전통회화가 대량으로 수입되었던 데에서도 드러나듯 특히 20세기 초부터 중국, 일본을 위시한 동양의 예술과 문화들은 서구적 물질성에 대립된 정신적 가치로 높게 평가되게 된다. 이러한 타자의 문화에 대한 엑소티즘적 동경의 분위기 속에서 그전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되던 동양인의 육체적 특성들이 서구적인 것과의 대비 속에서 가치절상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20세기 초 서구 문화를 지배하던, 이러한 엑소티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롤랑 바르트는 1968년 일본 여행 후 출판한 책 <기호의 제국>에서 이전까지 유럽 문화 속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던 동양인들의 육체적 특성을 유럽적 육체와 비교해,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려 한다. 서구인들이 일본인들의 눈이 거의 „닫혀져 있을“ 정도로 작다고 평가했던 것이 명백한 ‚인종 중심주의’에 의거한 것이라는 걸 지적하면서 롤랑 바르트는 한 발 더 나아가 내면성과 깊이를 강조해왔던 서양문화에 „내면성의 축에 따라 읽혀지지 않기에“ „살아있고, 생동하는“ 일본인의 표정없는 얼굴을 대립시킨다. „서구적 눈은 소위 중심을 이룬다고 하는 숨겨진 영혼이라는 신화에 종속되어 있다. 그 숨겨진 영혼은 눈 안의 보호된 공간으로부터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밖을 향해 자신의 불을 내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일본인의 얼굴은 그 어떤 도덕적 위계도 알지 못하며 (소위 동양적 평정이라는 일화와는 모순되게) 전적으로 살아있고 생동적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의 얼굴이 보여주는 변화는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말하자면 내면성의 축에 따라 읽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얼굴의 모델은 조각이 아니라 문자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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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Zygmunt Bauman : Vom Nutzen der Soziologie, 2000 Frankfurt am Main, S.79.
[3] Ralf Mitsch : Körper als Zeichenträger kultureller Alterität. Zur Wahrnehmung und Darstellung fremder Kultur in mittelalterlichen Quellen. In Fremdkörper – Fremde Körper – Körperfremde. (hg) von Burkhardt Krause, Stuttgart 1992. S. 73.
[4] Andreas Mielke : Nigra sum et formosa. Afrikanerinnen in der deutschen Literatur des Mittelalters, 1992 Stuttgart, S. 72.
[5] Andreas Mielke : Nigra sum et formosa. Afrikanerinnen in der deutschen Literatur des Mittelalters, 1992 Stuttgart, 74.
[6] Andreas Mielke : Nigra sum et
[7] Johann Caspar Lavater : Physiognomische Fragmente, 1775, Reclam, S.323.
[9] Herder,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sechstes Buch IV, S.104.
[10] Herder,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sechstes Buch IV, S.104. „Die Lippen, die Brüste und die Geschlechtsglieder stehen so manchen physiologischen Erweisen nach in einem genauen Verhältnis, und da die Natur diese Völker, denen sie edlere Gaben entziehen musste, dem einfachen Principium ihrer bildenen Kunst zufolge, mit einem desto reichen Maß des sinnlichen Genusses auszustatten hatte, so muss sich dieses physiologisch zeigen. Die aufgeworfne Lippe wird auch bei weißen Menschen in der Physiognomik für das Zeichen eines sehr sinnlichen…was Wunder also, dass bei diesen Nationen, denen der sinnliche Trieb eine der Hauptglückseligkeit ihres Lebens ist, sich auch von demselben äußere Merkmale zeigen?“ „Mit dieser ölreichen Organisation zur sinnlichen Wollust musste sich auch das Profil und der ganze Bau des Körpers ändern. Trat der Mund hervor, so ward eben dadurch die Nase stumpf und klein, die Stirn wich zurück, und das Gesicht bekam von fern die Ähnlichkeit der Konformation zum Affenschädel. Hiernach richtete sich die Stellung des Halses, der Übergang zum Hinterkopf, der ganze elastische Bau des Körpers, der bis auf Nase und Haut zum tierischen sinnlichen Genuß gemacht ist…Die feinere Geistigkeit, die dem Geschöpf unter dieser glühenden Sonne, in dieser von Leidenschaften kochenden Brust versagt werden musste, ward ihm durch einen Fibernbau, der an jene Gefühle nicht denken ließ, erstattet.“
[11] Handwörterbuch der Zoologie, Anthropologie und Ethnologie, Hg. Von Dr. Anton Reichenow, fünfter Band, Breslau 1888, S. 612ff. In (Hg.) von Joachim S. Hohmann : Schon auf den ersten Blick. Lesebuch zur Geschichte unserer Feindbilder, 1981 Darmstadt, S.86ff.
[12] Warhold Drascher : Die Vorherrschaft der Weißen Rasse. Die Ausbreitung des abendländischen Lebensbereiches auf die überseeischen Erdteile, Stuttgart/Berlin 1936, S.13. In (Hg.) von Joachim S. Hohmann : Schon auf den ersten Blick. Lesebuch zur Geschichte unserer Feindbilder, 1981 Darmstadt, S.109.
[13] Wilhelm von Rubruck : Reise zum Großkhan der Mongolen. Von Konstantinopel nach Karakorum, 1253-1255, S.69
[14] Wilhelm von Rubruck : Reise zum Großkhan der Mongolen. Von Konstantinopel nach Karakorum, 1253-1255, S.64.
[15] Bernardino De Escalante : A Discourse of the Navigation which the Portugales doe make to the Realmes and Prouinces of the East partres of the worlde, and of the knowledge that growes by them of the great things, which are in the Dominions of China,
[16] Juan Gonzales de Mendoza : The Historie of the Great and Mightie Kingdome of China and the Situation thereof : Together with the great riches, huge Citties, politike gounernement, and rare inuentions in the same. London 1588, Translages out of Spanish (1585) by R. Parke, S. 92-93.
[18] Herder :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 Bd2, S.7
[19] Johann Caspar Lavater : Physiognomische Fragmente, 1775, Reclam, S.325.
[20] Claudia Schmölders : Das Vorurteil im Leibe. Eine Einführung in die Physiognomik. Berlin 1995, S.30ff.
[21] Kerstin Gerinig : Einleitung. Zwischen Sympathie und Idiosynkrasie. Zur Wahrnehmung des anderen Körpers in kulturanthropologischer Perspektive. In Gert Mattenklott (Hg.) : Fremde Körper. Zur Konstruktion des Anderen in europäischen Diskursen, 2001 Berlin, S.280.
[22] Kestin Gernig : Zur Inszenierung eines historischen Typenkanons. Narrative und ikonographische Muster ethnographischer Darstellungen. In Gert Mattenklott (Hg.) : Fremde Körper. Zur Konstruktion des Anderen in europäischen Diskursen, 2001 Berlin, S.277.
[23] Roland Barthes : Das Reich der Zeichen, 1981, S.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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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다보니 다치바나 다가시의 [사색기행]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아이들의 손을 개들에게 먹이고, 그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에 대해 카톨릭 신부들이 어떻게 저항했는 지를 다룬 내용이 생각나네요. 읽으면서 화가 나 죽는 줄 알았거든요. [자음과 모음]에 올리셨던 칸트에 대한 글도 잘 보았는데 아직 미완성인 이글도 재밌네요.
영화 초창기에 촬영된 것 중에, 서양 선교사들이 마치 새에게 모이를 주듯 땅바닥에 뿌려주는 과자를 와 달려들어 집어먹는 중국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아프리카 인들은 유럽의 동물원에서 전시되기도 했고... 칸트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그건 또 초콜렛을 얻어먹기 위해 미제 짚차를 향해 달리던 이 나라 땅의 아이들이 있었던 거구요. 그들의 햄, 소세지 등 쓰레기를 가지고 부대찌개를 끓여먹은 이 땅의 역사도 있는 거구요. 이 땅의 인간들은 그들의 타자성에서 얼마나 가까워졌거나 멀어졌을 것인지, 이젠 더이상 별로 관심이 없는 저 자신 구석의 지방인으로 사는 타자로 남아 있구나 하고 자조섞인 말을 하게도 되는 군요. 칸트의 깡마른 몸에 비해 비대했던 가슴에 대해 묘사하셨던가요. 약했던 몸때문에 그가 규칙적으로 살 수 밖에 없었고, 사람을 멀리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 인상적이었지요.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당하며 살지만 또 그 환경을 자신의 생리에 맞추어
바꿀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했지요. 칸트의 위대성은 아마도 거기서 나오는 걸까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던 울림이 컸던 글이었습니다.
타인의 육체, 어마어마하게 재미난 주제죠^^ 선리플 후감상입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고맙구요 김남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