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봉, “한국사 편지 4권(웅진주니어:2002)”를 읽고
한국사 편지 4권! 4권은 화성을 쌓은 조선 22대 왕 정조부터 시작한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는 당파 싸움 때문에 돌아가셨다. 눈앞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야 하는 것을 봐야 했던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워서 당파와 상관없이 재능이 있고 젊은 신하들을 뽑아 썼다. 그리고 첩이 낳은 자식 출신이라도 재능이 뛰어나면 관리로 뽑았다. 서자 출신인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별 채용하고, 정약용 같은 재능 있는 신하들에게 각별한 신하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귀한 책을 주거나 풀어야 할 과제를 주면서 왕에게 충성을 다할 신하로 키웠다.(그러니 화성을 만들 수 있지)
규장각과 장용영, 붓과 칼 두 가지를 양손에 든 정조는 숙원 사업인 사도 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일을 시작했다. 사도 세자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 밑에 있었는데, 수원으로 옮겨‘현륭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다른 모든 것을 끝낸 후, 지금의 광교 신도시가 세워지는 것처럼 정조 때도 화성이라는 신도시가 세워지는 것이었다. 이 화성은 애당초 건설 계획을 10년으로 했는데, 공사는 2년 7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나라에서 성을 쌓을 때 백성들이 무료로 일하다보니 대충 쌓는 경우가 있었는데, 화성을 쌓을 때는 일을 한 백성들에게 반나절치의 임금을 주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화성은 다른 성과는 다른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적과 싸울 때(적이 화성을 공격할 때, 즉 공성전)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병사가 성벽 너머에 있으면 그 병사의 모습이 대부분 가려질 정도로 쌓고, 성벽마다 구멍을 만들어 총을 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망을 보는 공심돈, 남쪽에 있는 무기와 문자를 몰래 나르는 남암문(저번에 여기 들어갈려고 성 한바퀴 돌다가 겨우 찾았는데 닫혀있던데... 관리자 어딨어?), 봉화를 올리는 봉돈, 적이 성문 앞에 오면 적들을 둘러싼 성벽에서 매복해 있던 군사가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화서문과 팔달문(남문) 등이었다. 이렇게 정조와 많은 사람들이 힘을 쏟아 만든 화성은, 1800년 정조가 갑자기 피부병으로 죽고 나서 열한 살의 어린 세자 순조가 즉위한 뒤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정조가 이루어 놓은 일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을 때, 오늘날까지 남아 그 흔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있다.
농민의 농사에 대해 알아보자. 모내기라는 방법을 사용하기 전에는‘직파법’이라는 논 위에 씨를 뿌리는 것뿐이었는데, 모판을 따로 만들어서 거기에 씨를 뿌려 싹이 나면 5월쯤이 되어서 논에 옮겨서 심는 방법이었다. 직파법을 썼을 때 벼는 음력 3월에 씨를 뿌려 음력 8월에 거두고, 보리는 음력 9월에 씨를 뿌려 이듬해 4월에 거둬야 하기 때문에 한 달이 모자랐지만, 모내기 방법을 쓰자 벼를 거두고 난 뒤 이듬해 5월까지 논이 비어있게 되니, 그 사이에 보리를 심어 이모작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좋은 모내기에도 두 가지 단점이 생겼다. 모내기를 하는 5월에 비가 안 와서 가뭄이 들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5월에 가뭄이 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라에서 금지령(부패관리들 자기 배 불리는데 가뭄이 다 망치니깐 그렇지 뭐)을 내렸지만, 농민들은 곳곳에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모내기철에 가뭄이 들면 저장해 둔 저수지의 물을 끌어다가 논에 채우고 모내기를 했다.
두 번째 문제는 이모작을 하기 때문에 땅의 영양분이 없어진다는 점인데, 농민들은 이 문제를 거름으로 해결했다.(흔히들 소똥, 말똥, 닭똥, 그리고 사람 똥을 모아서 거름을 주고 키운 것을 유기농이라고 하던가... 우웩~ 근데 우리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는다네..)
논농사에도 모내기라는 새로운 기술이 들어섰지만, 밭농사에도 쟁기로 밭을 깊게 갈아서 이랑과 고랑을 만든 다음, 고랑에다 씨를 뿌리는‘골뿌림법’을 쓰게 된 것이다. 이 방법으로 한겨울에도 씨가 얼어 죽지 않고, 가뭄도 잘 이겨냈다.
논농사와 밭농사에 들어선 새 기술들은 농민들을 편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밭에다 면화나 담배, 채소 같은 것을 길러서 시장에 내다팔면 논농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쌀은 세금과 양식으로 하고, 밭농사로 거둔 것들은 시장에 내다팔아 돈을 버는데 쓰였다.
이제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에 대해서 알아보자. <대동여지도>를 나라에 바쳤다가 기밀누설죄로 감옥에 갇혀 죽었으며, 지도는 불태워졌다고 나온다. 아니 그런데 왜 지금 <대동여지도>가 있는데 왜 태워졌다고 나오는 것인가? 바로, 이 거짓 이야기는 일제 시대 때 조선은 열등하고 일본은 우월하니 일본을 따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심어 주기 위해서 그 이야기가 생겼다고 한다. 즉, 조선이란 나라는 지도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드는 수준 낮은 나라이고, <대동여지도>는 오직 김정호 개인의 노력 덕분에 탄생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었다.
1787년 5월, 프랑스의 페루즈라는 부솔 호의 지휘관은, 제주도에 도착하여 해안을 측량한 다음 다시 동해를 거슬러 올라가 울릉도에 이르렀는데, 페루즈는 자기가 발견한 섬이니‘다쥴레 섬’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서양 사람들은 페루즈처럼 자기가 도착한 낯선 땅을‘발견’했다고 믿으면서 이름을 지어 붙인 경우는 아주 많다. 이게 어이없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솔 호가 다녀간 뒤로 조선의 바닷가에는 서양 배들이 자주 나타났다. 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의 배들이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자기들의 배를 불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어느나라 배인지 몰라 그냥 조선 배와 다르게 생겼다는 뜻인‘이양선’이라고만 불렀다.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맡은 지 3년 뒤인 1866년 7월, 미국 상선 general shaman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근처까지 와서는 통상을 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왕릉을 도굴할 것이라는 소문이 좍 퍼졌다. 그러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부하 이현익을 보내 사정을 알아본 후 돌아가라고 했지만 shaman 호는 돌아가기는커녕 시간을 끌다가 항의하는 이현익을 배에 감금하고 총까지 쏘았다. 분노한 평양 사람들은 화약을 가득 실은 배들을 연결한 다음, 불을 붙여 general shaman 호에 떠내려 보냈고, 다 타버린 shaman 호에서 나온 사람들은 강가로 끌려나와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이번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왔다. 군함 7척에 2000여 명의 군사를 싣고 갑곶진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서 진을 쳤다. 그리고 얼마 전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을 비롯해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데 대한 책임을 지라면서 배상금을 지불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 통상 조약을 맺을 것 등을 요구했다. 이런 방식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고 계속 싸워서 결국 프랑스는 물러갔다.
5년 뒤, 이번엔 미국이 쳐들어왔다. 미국은 5년 전에 있었던 general shaman 호 사건을 트집 잡으면서 군함 5척에 1200여 명의 군대로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미군의 무기가 훨씬 우수해서 조선이 밀렸고, 탄환과 화살이 모두 떨어진 조선군은 맨손으로 미군에 맞서다가 끝내 전멸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1875년, 강화도의 초지진 앞바다에 왠 낯선 배가 나타났고, 낯선 배에서 작은 보트가 내려졌다. 초지진을 지키던 조선군은 예고 없이 다가온 보트에 대포를 쏘았고, 보트에 있는 사람들도 대포를 쏜 후 배로 돌아갔다.
이번엔 멀리 있는 배에서 대포를 쏘았는데, 조선의 구식 대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능이 좋은 대포였다. 그리고는 돌아갔다. 그 배는 운요호였는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꼬투리를 잡으려고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선과 강화를 맺었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5시 30분경,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궁궐을 지키던 훈령대 연대장 홍계훈이 총에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리고 일본인 자객들은 곧장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명성 황후를 시해했는데, 바로 이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데, 고종의 비밀 경호원 사바틴이다.
공사관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던 일본 공사 미우라는 왕비시해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즉시 궁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왕비는 도망쳐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고종은 일본인들이 자기도 언제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고, 궁궐에서 만든 음식은 독이 들었을까봐 먹을 엄두조차 못내고, 심지어는 러시아 공사관과 미국 공사관에서 만든 음식을 자물쇠를 채운 상자에 넣은 다음 궁궐로 가져와 먹을 정도였다.
불안에 떨던 고종은 마침내 경복궁에서 덕수궁으로 이사를 했고, 그래도 불안했던 고종은 일본인들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는 조선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일본인들이 명성 황후를 죽인 이유는 명성 황후가 러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손잡고 일본에 압력을 넣었고, 조정 대신을 러시아와 친한‘친러파’들로만 임명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일본은 조선이 러시아와 가까워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을지 온갖 궁리를 했다. 청·일 전쟁처럼 한바탕 전쟁을 하자니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를 막기가 벅차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명성 황후를 없애는 것이었다. 친러파의 중심인물인 명성 황후를 없애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임무를 띠고 조선에 온 사람은 미우라 공사였다. 그는 치밀한 작전을 짰다. 작전의 이름은‘여우 사냥’이었다. 그러고는 계획대로 잔혹하게 황후를 사살한 것이었다.
조선 개항 후, 다른 나라들의 기술과 생활 방식이 들어오면서, 조선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 가장 새로웠던 일은 전기의 등장과 단발령이다.
요즘, 남자들은 대부분 멋져보이게 하려고 머리를 기른다.(별로 멋지지도 않는데 불결하게 기른단 말야)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는 이유는 틀리지만, 의지는 같다. 1895년 내려진 단발령은‘위생에 이롭고 활동하기 편리하다.’라는 이유였다. 유생 최익현과 대일은‘내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다’고 했다.
그 밖에도 양복과 전신기, 기관차, 전차, 전화기 등이 들어왔다. 그중 전화기는 등장한지 20, 30년이 지난 후에야 환영받았다.
▤ 후 기 ▥
한국사 편지 4권에서는 정조부터 조선의 개항까지 나온다. 그 중 가장 재밌었던 것은 바로 단발령이다. 책에서는 역사를 알 수도 있지만, 재미있는 정보가 몇가지 나오기 때문에 책을 보는 재미가 있다. 요즘 책에 재미가 들려서인지 게임보다 더 재밌다.(게임 안한지 오래됬는데 ㅋㅋㅋ) 조선의 관리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만 집중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발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식민지가 되어가는 것 같다.
2007. 9. 2. 일요일
김민석(동글이)
첫댓글 아하~ 게임을 멀리하게 하는 마력을 가진 책이군요~ 예전부터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지나쳤는데, 꼭 읽어 보겠습니다. 전 요즘 세계사 관련 만화^^를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_()_
게임보다 책일기가 더 좋은 동글씨! 미래가 보입니다. 화이팅!_()_
‘내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다’고 말한 사람 중 최익현은 다 아실 테고, 대일은 동글이 형 대일입니다. 거의 장발수준!
김민석부처님은 엄청 책 많이 읽는군요 역사공부는 모든 공부의 기본이 되는 거 아시죵^^ 아주 훌륭한 독서를 잘 하고 계시는구만요 그리고 글도 엄청 길게도 잘 쓰신다 (대단 대단) 저는요 길게 쓸려고 해도 도저히 안되는거 있죠 그래서 많이 혼났어여
조선의 역사는 참 공부하기도 싫었답니다. 동글이님과 같은 의식으로...수고하셨어요. 그리고 게임보다 책읽기가 재미있다니 축하드립니다.역시 동글이님의 미래는 화~~~안합니다.그?? 나무아미타불_()_
책 부처님과 함께!!! 동글이 부처님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_()_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