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최대의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약개정문제였습니다. 도쿠가와 바쿠후 정부가 구미 열강들과 맺었던 조약들의 불평등성 때문에 일본은 여러 가지 손해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메이지 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도 절박한 사안이었습니다.
불평등 조약은 이른바 영사재판권을 인정해서 불법을 저지른 외국인들을 일본 국내법으로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관세도 일본의 주권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개정의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의 조약을 바꾸기 위해 메이지 정부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게 됩니다만, 별무효과였습니다. 구미 열강들은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만, 일본의 기존법제도가 워낙 낙후해서 영사재판권을 철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구미 열강들의 입장은 자신들의 이해에 맞도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했으나 아직 대외적 실력이 쌓이지 않은 일본은 이러한 현실을 견뎌낼 도리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는데, 일본의 법체계가 구미 열강의 기준에 맞다, 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일본 대심원에 외국인 판사를 임용하는 조약도 영국과 체결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일본 내 반발로 이 시도는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사절단을 구미 각국에 파견하여 조약의 불평성을 역설하고 일본의 발전을 선전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지 근 30년이 다 되어가는 1894년, 일본의 외상 무쓰 무네미스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영국의 대외 정책적 관심을 최대한 활용하여 영국과 일본 사이에 영일 통상항해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는 영사재판권이 철폐되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자국 내에 자신의 법체계를 주권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근대국가로서의 외교적 위상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세의 자주권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1911년, 고무라 주타로가 미국과 체결한 미일통상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해결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적극 추진해왔던 근대국가의 비원을 대외적으로 성취했으며, 자신의 권리를 방어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조약개정의 과정은 당시 국제정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감으로써 그 환경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는 점, 즉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를 상대하려고 했기에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기가 어려웠다는 현실도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세를 바로 자신의 요구를 해결하는데 근거로 삼은 일본 외교 지도자들의 능력이었습니다.
이후 거의 1백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자유무역협정 FTA의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우리에게 영사재판권에 버금가는 각종 불평등하고 오만한 요구가 쏟아져나오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미국기업은 미국 법에 의해 보호받게 하라, 경제관련 정책이나 법개정은 미국과 협의해서 하라, 환경과 노동 관련법도 미국과 협의하고 해라, 이런 주문사항과 직면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기준 운운하면서 만일 우리의 국내법 체계가 이런 식으로 바뀌어져 나갈 때 우리는 우리의 주권이 송두리째 미국의 손에서 좌지우지되는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근 1세기 전 일본이 치열한 노력 끝에 해결했던 문제를 우리는 지금에 와서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우리는 엄청나게 낙후하는 것입니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를 과연 알고 있기나 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