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대한민국의 시국이 시국인지라 혼동과 더불어 온통 촛불 및 대통령 관련 이야기로 삶의 방향을 잡기도 힘든 시기이다.
오늘 약간의 휴식 시간이 있어 지금껏 못올린 자료를 함께 삼가 게시하며 온통 잘못된 온라인의 일부분의 내용이라도 고쳐 바른 정보를 공유하고자 몇차례에 걸쳐 글을 게시하고자 한다.
대산 휘 상정의 대산집(대산선생문집)이 책으로 번역되어 2015~2016년 나오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일부 번역 작업 및 이야기로 전해지고 우리집에 있는 해산공파 파보집에도 있지만 최근 공기관인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된 자료를 올려두고자한다. 저작권은 많은 양해를 구하고 싶고 한국고전번역원에 감사와 고마울 따름이다.
대산집 제47권묘지명(墓誌銘)
5대 조고 증 승지 부군 묘지〔五代祖考贈承旨府君墓誌〕
부군은 휘는 문영(文英)이고 자는 국화(國華)로, 한산인(韓山人)이다.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과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부자는 이어서 덕업과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다.
5대가 지나 사간원 대사간 이윤번(李允蕃)에 이르니 이분이 부군에게 고조가 된다. 이윤번이 풍저창 직장(豐儲倉直長)을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된 이귀지(李貴枝)를 낳고, 이귀지가 연안 부사(延安府使)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증직된 이희백(李希伯)을 낳고, 이희백이 이대형(李大馨)을 낳고, 이분이 직장 남궁혜(南宮蕙)의 따님인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를 아내로 맞아 융경 무진년(1568, 선조1) 10월 아무 일에 부군을 낳았다.
부군은 총명함을 타고나서 8, 9세에 이미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조금 자라서는 명예가 더욱 커졌다. 당시 서애(西厓) 유 문충공(柳文忠公 유성룡(柳成龍))과 아계(鵝溪) 이 상국(李相國 이산해(李山海))이 모두 딸이 있어서 사위를 고르고 있었는데, 서애는 부군을 얻었고 아계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사위로 얻었으니, 대개 한때에 명성이 서로 막상막하였다.
연안(延安) 박효생(朴孝生)이 지은 숙부인(淑夫人)에 대한 만시에 ‘사위는 당시의 영재를 골랐고〔夫壻擇時英〕’라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나자 할머니와 모부인을 모시고 어려움을 겪으며 관동(關東)으로 피난 갔다가 도로 호남(湖南)으로 내려왔다.
난리가 조금 안정되자 남양(南陽) 해망봉(海望峯) 아래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무술년(1598) 11월 1일에 병으로 졸하였으니 향년 31세였다. 부군은 처음 벼슬길에 올라 사포서 별제, 별좌, 이인도 찰방(利仁道察訪)을 지냈는데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광국호종훈(光國扈從勳)에 참여되어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부군은 용모가 훤칠하고 풍도가 맑고 원대하였는데, 시도 그 사람됨을 닮아 경물에 느낀 흥을 담아서 소탈하게 속세를 벗어났다.
때로 달 밝은 맑은 밤이면 해산(海山)의 꼭대기에 올라가 배회하며 휘파람 불고 시를 읊으니, 듣는 자들이 신선이 학을 타고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해망봉 아래의 사향(巳向) 언덕에 장사하였다. 숙부인(淑夫人)은 재상의 집안에서 생장하여 유순하고 아녀자의 행실이 있었다.
부군보다 18년 뒤에 졸하였으니, 묘는 부군의 묘소 동쪽에 있으며 따로 묘지(墓誌)가 있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 창조(昌祚)는 연천 현감(漣川縣監)이고, 차남 홍조(弘祚)는 회인 현감(懷仁縣監)이다. 창조는 4남을 두었으니, 효심(孝深)ㆍ효준(孝濬)ㆍ효연(孝淵)ㆍ효원(孝源)인데 효원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가 되었다. 세 딸은 이소(李熽), 정곡(鄭), 채화서(蔡華瑞)에게 시집갔다.
홍조는 2남을 두었으니, 효제(孝濟)ㆍ효윤(孝潤)이고, 딸은 박미(朴渼)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남자가 16인이니, 석무(碩茂), 석훈(碩薰), 석관(碩觀), 석필(碩苾), 석신(碩藎), 진사인 석빈(碩賓), 석구(碩耈), 석로(碩老), 석권(碩權), 석보(碩輔), 석좌(碩佐), 석망(碩望), 석재(碩材), 석형(碩亨), 석상(碩相), 석장(碩章)이다.
석필은 병화(秉和)를 후사로 두었다. 석관의 장자가 태화(泰和)이니, 바로 우리 선인이다. 5, 6세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재하지 못한다.
아아, 부군은 맑은 재주와 아름다운 명망으로 젊어서부터 명성을 드날려 거리의 아이나 시장의 늙은이들도 모두 그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난리를 만나 유리하며 온갖 험난함을 겪었고, 벼슬길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곧 세상을 떠났다. 지금 와서는 세대가 변하고 바뀌어서 아름다운 행적이 대부분 산일되고 전하지 않아 그 만에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자손의 무궁한 슬픔이 아니겠는가. 오직 실기(實紀)를 엮어 유택(幽宅)에 묻어서 영구토록 분명히 알리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감히 슬픔을 참고 묘지를 지어서 광에 바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09 五代祖考贈承旨府君墓誌
府君諱文英。字國華。韓山人。文孝公諱穀。文靖公諱穡。仍父子以德業文章聞天下。五世至司
諫院大司諫諱允蕃。是於府君爲高祖。生豐儲直長贈左承旨諱貴枝。是生延安府使贈吏曹參判諱希伯。是生諱大馨。娶咸悅南宮氏直長諱蕙之女。以隆慶戊辰十月某甲生府君。聰穎天出。八九歲。已有能詩聲。稍長。名譽藉甚。時西厓柳文忠公與鵝溪李相國。皆有女擇壻。西厓得府君。鵝溪得漢陰。蓋一時聲譽相上下。朴延安孝生挽淑夫人詩。夫壻擇時英是也。己丑中進士。王辰島夷發難。奉王母母夫人艱關避亂于關東。轉下湖南。亂稍定。卜居于南陽海望峰下。戊戌十一月一日病卒。享年三十有一。府君筮仕。爲司圃別提別座,利仁道察訪。未幾。投紱而歸。辛卯。參光國扈從勳。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府君容儀偉碩。風度淸遠。詩亦類其爲人。感物寓興。翛然出於塵表。有時淸夜月明。上海山絶頂。俳佪嘯詠。聞者以爲笙鶴下空中云。葬于海望峯下向巳之原。淑夫人生長相門。婉嫕有婦行。後府君十八年卒。墓在府君墓東。別有誌。有二男。昌祚漣川縣監。弘祚懷仁縣監。昌祚四男。孝深,孝濬,孝淵,孝源文科府使。三女。適李熽,鄭,蔡華瑞。弘祚二男。孝濟,孝潤。女適朴渼。曾孫男十六人。碩茂,碩薰,碩觀,碩苾,碩藎,碩賓進士,碩耈,碩老,碩權,碩輔,碩佐,碩望,碩材,碩亨,碩相,碩章。碩苾有嗣子秉和。碩觀有長子曰泰和。卽我先人來晜。以下多不盡載。於乎。府君以淸才雅望。早歲蜚英。巷童市叟亦皆誦其名而惜其遭亂流離。備經艱險。筮仕未幾。旋無祿卽世。乃今世代推遷。媺行懿蹟。率散佚不傳。無以遡嚮其萬一。豈非子孫無竆之痛也歟。惟有撰實閟幽。以昭示於永久。爲可以用力焉。敢勉而爲之志。以納諸壙云。
한국고전번역원.
위 대산집에서 알 수 있듯이 한산이씨 문양공 ~ 판중추공~ 해산공 ~수은공 후손은 이렇게 안동 소호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수은공파 약와 이현정 후손 이대원 삼가글을 게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