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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전 스토리 원문보기 글쓴이: 꿈동이
그리스도인의 정직(진실)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 되기 위해 갖춰야 할 품성 중 최고의 우선순위는 ‘정직’이라 생각하며 화려한 말 보다는 진실한 삶으로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1986년 1월 28일 발사 후 74초 만에 공중 폭발하여 승무원7명의 생명을 앗아간 챌린저 호 참사의 원인은 의외로 ‘O-링’이란 이름의 작은 연료탱크 고무마개 하나의 부 작동 이었다고 한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부품의 위험성을 미리 인지한 제작진들이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고, 사고 당일 발사 연기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묵살된 이유가 여러 차례 연기된 발사를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어 강행한 미우주항공국(NASA)의 체면유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현상을 누군가 ‘정직성의 위기(integrity crisis)’라 진단했다. 'integrity'의 사전적 의미는 성실함, 신실함, 고결함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한 마디로 정직함이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상의 대소간 모든 종류의 부정적 스캔들은 바로 이 정직의 덕목 결핍으로부터 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정직성의 위기는 비단 미국뿐 아니라 오히려 대한민국이 한 수 위인지도 모른다.
존스 홉킨스의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신뢰: 사회적 덕목과 번영의 창조」(Trust: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라는 책에서 중국과 유교국가를 포함, 한국을 가리켜 진실성과 정직성 그리고 공정성이 결여된 대표적인 저(低)신뢰사회로 평가하면서 신뢰야말로 사회적 자본이며, 신뢰가 구축된 국가만이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이 고 신뢰사회(high-trust society)임에 불구하고 곧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고 자부하는 한국을 가리켜 세계적인 석학이 저 신뢰사회(low-trust society)라고 예증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를 뒷받침하듯이 최근 어느 기독교 미디어에서의 대담에서 손봉호 박사(동덕여대 총장)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을 우려하면서 현대사회에서 꼭 필요한 덕목인 투명성(정직)과 공정성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1년 동안 위증으로 법원에 기소된 건수가 일본보다 600여 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예증한 손 박사는 더 심각한 문제는 도덕성을 상실한 이 사회의 냉소주의라고 덧붙였다. 즉 정직을 외치는 목소리에 대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는 반응과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정직하라고 하니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전도(顚倒)된 지 오랜 현 사회에서 이미 정직은 꼭 지켜야 하는 기본 덕목에서 삭제되었고 정직에 대한 가치는 꾀나 술수의 가치보다 열등한 위치로 전락하였다. 정직=손해라는 등식 때문이다. 문제는 도덕과 윤리의 바닥현상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의 어른들이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이지 않은 데서 출발한다는 데 있다. 필자가 해병대 군목시절 해병대사령관이신 임 모 장군께선 도덕의 제 요소를 망라한 가정과 학교와 사회 교육의 실패를 통탄하며 남은 것은 군대와 종교밖에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야말로 세심도장(洗心道場)으로서의 군대교육과 종교교육이 최종 돌파구라는 것이다. 군 지휘관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밖에 없는 소위 저(低) 도덕사회가 된 나라 현실은 그렇다 해도 과연 정직을 필두로 한 그리스도인의 도덕수준은 어떠한가? 물론 정직은 기독교만의 고유한 가치가 아니라 보편적인 윤리 덕목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달라야 하는 거룩의 명령에 의거 정직은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요구와 자격의 당위적 덕목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편과 일반을 뛰어넘은 특수와 구별의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특수와 구별은 부자연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분리와 이탈의 삶을 의미하지 않고 변화된 삶의 실천성(transforming lifestyle)을 말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빛과 소금의 삶이요, 겨자씨와 누룩의 삶을 말함이다. 마13: 33-34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운동의 요체이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겨자씨 운동은 한 마디로 낙적천석(落滴穿石)과 같은 것이다. 지극히 미미한 처마의 낙수 한 방울이 언제가 단단한 바위덩어리에 구멍이 뚫는다는 뜻이다. 누룩은 빵을 만드는 효소로서 빵을 부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극히 적은 양의 효소가 서 말이나 되는 밀가루 반죽을 몇 배로 부풀어 오르게 하는 창조력을 발휘한다. 이 두 운동은 구약에서 언급한 그루터기, 거룩한 씨 운동이요, 아놀드 토인비가 진술한 역사를 주도하는 창조적 소수의 엘리트 운동이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오늘 정직하면 그 정직이 겨자씨와 누룩같이 역동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크게 부풀어오른 정직한 사회의 큰 숲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는 개괄로 역설적 바보 되기 운동이다. 그리스도인이 뒤 바뀐 가치에 동화되어선 안 된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야겠다” “네가 약게 사는 데 나만 바보가 될 수 없다” 의 반응은 세속적 수준이며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의 삶이다. 결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전도의 열매 또한 맺을 수 없다. 하나님나라를 한 치도 넓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한 자발적 항복자이다. 내게 손해가 되고 남이 나 보다 앞서 간다 할지라도 목전의 거짓과 손 잡을 수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이다. “요즘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은 성공하지 못해” 라고 비아냥 거릴지라도 “나는 세상과 달라야 할 새로운 피조물이야” 라고 결단하고 사는 외로운 바보가 그리스도인이다. 세상적 실력이 아닌 정직의 능력을 갖춘 자들이 필요한 세상이다. 정직한 삶 때문에 상처입고 손해 보며 그 아픔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인임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거짓된 세상에 성도는 진실로 먹고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세부운동으로 철저한 가정교육의 시행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은 모든 교육의 출발은 가정이라는 점이다. 조기 인성교육과 교사와 삶의 모델로서의 부모교육의 중요성이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정직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정직을 배울 수 없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다. 정직의 모범적 실천을 밑바탕으로 한 인생의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서의 정직의 필요성을 훈계해야 한다. 매를 들어서라도 궁극의 승리자는 정직한 자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수 년 전 번역된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Rating the Presidents)같은 책이 좋은 교재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전문가 집단 719명과 역사학자 등이 참여한 설문조사의 결과 분석 자료를 통해 미국의 역대 대통령의 순위를 매긴 이 책에서 링컨이 1등을 한 이유 중 하나가 정직에 있었음을 그 본으로 가르칠 만하다. 지도능력과 정직성은 정비례한다는 교훈이다. 지도자의 힘과, 용기, 능력, 지혜, 그 모든 것의 뿌리가 깨끗함과 진실함에 있었다는 결론이다. 링컨이 어릴 때 남의 집에서 책을 빌러 보았는데 집이 통나무 집이다 보니 비가 새어 책이 조금 젖었다고 한다. 물론 말짱하게 말렸지만 그는 책을 둘려줄 때 그 책을 펴서 "여기에 물이 젖었었는데 지금 말랐습니다마는 제가 이렇게 실수를 했습니다. 대신 일을 해드리겠습니다." 하고는 그 집에서 일을 해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진실을 밝히고 사과를 하고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진실한 마음, 이것이 링컨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대표적 예이다.
그 다음엔 교회 교육이다. 먼저 말씀을 가르치는 성직자부터 정직의 역할 모델이 되고 교회의 중직자들과 직분자들 그리고 모든 구성원들이 정직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 “누가 정직한가?” 라는 질문 앞에 곧바로 “교회 성도들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교회가 부흥되고 그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 아무리 “우리 교회에 오시오, 예수 믿으시오” 소리쳐도 외치는 자가 부정직하면 냉소적 반응은 물론 꾸짖음만 듣게 될 것이다. 특별히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동업자들과 손님들에게 더욱 정직하고 관대해야 한다. “그 사람 어느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데 형편없어.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짜고 욕심 많고 정직하지 못해” 라는 평을 받는 한 결코 교회를 통한 對 사회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 중시해야 할 부분은 지금껏 사용해 온 온갖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아닌 바르게 살기 운동, 인격 갖추기 운동, 옥토의 심령 가꾸기 운동, 착하게 살기 운동, 정직한 사람 만들기, 도덕과 윤리의 모델이 되기 등 소위 좋은 사람 만들기가 되어야 한다. 전도하는 사람, 교회를 소개하는 그 사람이 좋아야 듣는 사람이 따라 온다. 이 간접적인 방법이 오히려 직접적인 전도운동보다 속도가 빠르고 효과적이다. 한국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 먼저 신뢰와 존경을 받는 모습을 갖추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감격과 기쁨을 심어 주는 기능을 지녀야 한다. 이젠 잘 사는 일 보다는 바르게 사는 일을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과제 즉 바보처럼 살기의 생활관 정립에 따른 가정과 교회에서의 정직 교육과 실천은 성경의 가르침을 주 교재로 해야 한다. 성경은 정직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5:8). 악한 사람의 제사는 주님께서 역겨워하시지만, 정직한 사람의 기도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또한 잠16: 17은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 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고 강조한다. 또한 성경은 정직한 회개가 천국을 불러오지만 거짓은 패망을 선도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은 정직에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고 제 9계명으로 분명히 선언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거짓의 죄를 엄중하게 다루시며 거짓을 좋아하는 자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 동조하는 자라고 가르친다. 을 거짓의 아비 마귀로 소개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 44절).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 15). 다윗 왕은 고백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24: 3,4). 이사야서 26장 7절에는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시편 112장 4절에는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정직한 자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아담과 하와와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게하시와 아간을 통해 거짓의 심판을 증거한다.
이제 정직하게 살자. 아니 지금껏 정직하게 살아온 삶에 속도와 힘을 더 붙이자. 정직은 마음에 거짓이 없고 바르고 곧은 것을 의미한다. 정직은 의인의 상징이며 성도의 의무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기뻐하시고 정직한 자와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정직은 성공으로 이끄는 최고의 자본으로 가장 확실한 투자이다. 나카지마 요시미츠란 작가는 '일하기 싫은 사람을 위한 책'에서 노력한 만큼 정직한 결과가 주어지는 정직한 세상을 기대하지는 말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세상사람들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정직이 최선의 미덕이다.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무엇보다 정직에서 뛰어난 차이를 보여야 한다. 마치 별세계의 사람을 보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존 스타트는 그의 에베소서 강해인 ‘God’s New Society’에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 소속된 새 사람(A single new humanity)이라고 평가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세상과 다른 새 삶을 사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사회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말함이다.
오늘날 교회로 통칭되는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인이 욕을 먹는 이유 중 하나가 삶의 부재이다. ‘Fresh Encounter’ 를 쓴 헨리 블랙가비의 말 대로 세상이 어두운 것은 빛의 부재 때문이다. 빛으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세상을 밝힐만한 광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날은 신자처럼 보이는 데 나머지 6일은 罪日처럼 사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일부의 이야기이지만 어물전 망신 꼴두기가 시키고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리는 격이다. 신앙과 생활의 일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의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 솔직해야 한다.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삶에 있다. 그 삶은 정직과 진실함이다.
정직이란 건전한 도덕적 원리의 자질이다. 보석의 아름다운 광택을 보려면 깎아 내고 다듬어야 하듯 사람의 정직성도 끊임없는 자기 노력과 내적 수련을 통해서 얻어진다. 정직한 삶은 냉혹한 결단의 결과로 얻어진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시는 거룩과 정직의 영이신 성령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을 어둡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거짓이다. 모든 죄와 악의 밑바탕에는 거짓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 없는 삶을 원한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나다나엘 같이 속에 간교와 꾸밈이 없는 정직하고 착한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요즘 가정과 학교에서 "착한 사람이 되라. 정직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듣기 어렵다. 고전이 된 지 오래다. 대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좋은 대학에 가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 유능한 사람이 되라." 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정직해야 한다. 진실할 때만이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직은 선택이 아닌 필수조항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의 능력배양이다. 정직의 실력을 쌓는 일이다. 한국교회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치명적 병인 부정직을 오늘 내가 먼저 치유하자. 예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위선이다. 마태복음 23장 26절을 보면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깨끗해져야 세상이 깨끗해진다는 말씀이다. 어떤 사회도 그 시대 그 사회의 종교 이상 발전하는 사회는 없다. 또한 어떤 교회도 그 교회의 지도자들 이상으로 발전하는 교회는 없다. 이것은 법칙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적 삶의 실천의 선행이다. 구호가 아닌 삶이다. 정직이 힘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도하자. 한 가정과 교화와 사회와 국가의 행복은 개인의 정직에서 시작한다. 정직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 건강의 표식이다. 거짓이 판치는 이 시대에 정직한 사람이 보고 싶다. 우리 그리스도인만이라도~~
첫댓글 함께 읽어요. 우리 정직한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