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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
전쟁에 이용된 노스트라다무스의 가짜 예언
아돌프 히틀러가 전세계를 상대로 무제한의 전쟁에 돌입했던 1939년 여름,
선전상 요셉 괴벨스의 아내는 이미 400년전에 행해진 일련의 경악스러운 예언을 주목하도록 남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프랑스인이 쓴 예언은 히틀러의 출현을 예고한 것 같았고 독일의 지도자를 지칭함에 있어서도 '히스터'라고 씀으로써 이름마저 비슷하게 맞히고 있었다.
히틀러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예언을 아무리 잘 풀어봐야 제 3제국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으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전상은 가짜 예언을 조작해 냈다.
1940년 독일 공군은 독일이 승리할것이며 프랑스의 남동부에는 전화(戰禍)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수 천장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을 프랑스와 벨기에 상공에 투하했다.
피난민으로 파리에 이르는 길과 영국 해협에 면한 항구에 이르는 길이 막힐까 두려워 그걸 미연에 방지하려는 게 그 목적이었다.
그에 맞서 영국의 정보부에서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만들었는데, 물론 그것은 추축군에 대한 연합국의 승리를 예언한 내용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위대한 대예언가의 삶
혁명적인 의사 미셀 드 드 노스따르담은 1503년 프로방스 지방의 셍 레미에서 출생했다.
그는 후에 이름을 라틴식으로 노스트라다무스로 고쳤다. 그의 가문은 유태계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했고 어린 미셜도 가톨릭교도로서 양육되었다.
그는 두뇌가 비상한 의학도였고 흑사병 환자를 다루는 능숙한 의사로서 처음에는 유명해졌다.
의료 부문에서 그가 거둔 성공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다른 의사들과는 달리 환자들의 '피를 뽑기를' 거부했던
것에 기인했으며, 그것은 16세기 초엽으로는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그는 다른 분야에서도 당대 사람들보다는 선각자였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갈릴레오가 자동설을 주창한 것보다 100년 앞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다. 그가 예언의 재능을 처음 보인 것은 그저 [세기 (世紀) ]라는 제목이 붙은 10권의 전집중 1권을 출간한 1551년이었다.
이 전집은 각 권마다 100개의 예언이 담겨 있으며, 예언은 시처럼 운문으로 되어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비결을 절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는 금속 삼각받침대 위에 물 한그릇을 떠 놓고 마치 서양 점장이가 수정수(水晶球)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점을 치듯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때때로 예리한 섬광과 같은 직관에 의해 예언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청년시절의 어느날,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그는 펠리테 뻬레띠라는 지나가던 수도승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그 수도승과 행인들이 놀랄 만한 발언을 했다. '교황님 앞에 무릎 꿇나이다.'
그 수도승은 1585년에 정말 교황이 되었으니 식스투스 5세가 바로 그였다.
또 언젠가 왕비 까떼린 데 메디치가 그를 방문했을때 그는 왕비의 수행원 중의 한 소년에게 나중에 프랑스의 왕이 될거라고 예언함으로써 소년을 당황케 했다. 그 소년은 앙리 드 나바르로서 후에 앙리 4세가되었다.
앙리 4세
자신의 죽음과 예언
언젠가 프랑스의 한 귀족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능력을 시험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 키우는 돼지 두 마리의 운명을 예언해 보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검은 놈은 귀족이 먹게 될 것이고 흰 놈은 늑대가 먹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귀족은 즉시 흰 놈을 잡아 저녁 식탁에 대령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 노스트라다무스와 함께 식사하던 귀족은 집안에서 기르고 있던 길들인 늑대가 흰 돼지의 고기를 물고 가 버려서 검은 돼지를 잡아 식탁에 올렸다는 얘기를 듣고 대경실색했다.
예언자는 1566년에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도 미리 내다보았다.
죽기 전에 그는 작은 금속판에 어떤 숫자를 조각케 하고 자기가 죽으면 관에다 그걸 넣도록 지시했다.
1700년에 더 눈에 잘 띄는 좋은 장소로 옮기기 위해 그의 관을 134년만에 무덤에서 파냈다.
금속판은 예언자의 해골 위에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1700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종교재판소가 그를 마법사로 낙인 찍는 걸 피하기 위해 노스트라다무스는 예언 속의 연대와 날짜를 일부러 뒤섞어 버렸고 어구(語句)의 묘한 배치와 기호, 고대 프랑스어, 라틴어 또는 기타 외국어를 써서 난해하게 표기했다. 이 같은 의도적인 혼란때문에 그의 예언이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예언 대부분은 사실과 기막히게 접근되어 있으며 유럽이 낳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는 명성이 실로 당연하다 할 만큼 절묘한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그의 예언은 현대적인 어투로 고쳐 번역한 것이지 만 그 안에 쓴 고유명사들은 원본과 똑같은 것이다.
프랑스의 앙리 2세
그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프랑스 궁중에는 국왕 앙리가 어떻게 죽어가는가를 기술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악명높은 예언에 대해 아무도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야전의 단 일격의 싸움에서
젊은 사자는 늙은 사자를 압도하리라.
황금투구안의 눈을 그가 찌르니
일격에 두 군데의 상처로 그는 비참하게 죽더라.
이 예언은 4년 뒤인 1559년에 현실이 되었다.
사자(獅子)의 문장(紋章)을 가진 앙리는 국왕 직속 의 스코틀란드 근위대 대장인 몽고메리라는 젊은 사관과 진선 마상(馬上) 창시합을 겨뤘다. 그런데 우연히 몽고메리의 창이 앙리의 금빛 투구를 관동하여 눈과 목을 찌르게 되었다. 왕은 열흘이나 괴로와 신음하다 죽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은 앙리의 미망인 까떼린 데 메디치에게는 충격이었다.
왕비는 예언자를 철저히 믿게 되었고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앞날을 보장받게 되자 비로소 노스트라다무스는 전인류의 미래를 웅장하게 예언한 저작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까떼린 왕비의 세 아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을 정확히 예언했다.
루이 16세
찰스 1세
대화재와 페스트
루이 파스퇴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최근에의 역사적인 일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여기서도 시대와 이름이 예언되고 있다.
파스퇴르는 신과 같은 명성으로 축복받으리니
때는 달이 태음주기를 끝냈을 때의 일이로다.
파스퇴르는 1889년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여 의학부문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지구의 태음주기는 19년이다. 1889년이 바로 이 태음주기가 완료되던 해였다.
히로시마
미래에 대하여
예언자는 전쟁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정확한 시기마저 예언하고 있으니 '세기의 주기가 바뀔 때'라는 것이다.
1999, 7의달
하늘로부터 공포의 대왕이 출현하리라....
그것을 전후하여 전쟁은 평정되리.
북반구가 가장 심한 참화를 입을 것이다.
'괴질의 파동이 일으킨 유례없는 대기근은 북극에까지 이르도록 긴비를 내리리.'라는 무서운 예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