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한미상호방위조약(1953.8) 서울서 가조인,10.1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장관, 덜레스 국무장관이 정식 조인, 군사동맹관계,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휴전후에도 유엔군 사령관에게 귀속되는 결과를 가져옴.
ㅇ발췌개헌 : 1952년 대통령 직선제 -1952년 7월 계엄령 선포 발췌개헌.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재선의 길을 마련함. ㅇ사사오입 개헌 : 1954, 3대국회 자유당의원 동원, 초대 대통령 3선제한 조항 철폐-종신집권 가능하게함(54.12.28)
ㅇ2.4파동 : 1958.12 : 야당의 국회 단상 발언을 봉쇄함. ㅇ3.15 부정선거 : 1960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 당선 위해
* 발췌개헌(1952.7) -5.10 선거후 2년만에 5.30총선거(50)-제헌의원선거 때 불참하였던 남북협상파들이 참여,무소속으로 다수 진출한 2대국회에서는 이승만의 지지세력이 1/4에 불과(한민당 24석) 전체 210석중 야당적 인사가 많은 무소속이 128석이나 차지.국회에서 대통령 선출 가능성 희박 계엄령 선포하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통과
* 사사오입 개헌안(1954.11) ㅇ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제한 조항 철폐 개헌안 11/27 표결 자유당 의석은 개헌 통과에 필요한 2/3의석에서 1석 넘었으나 표결 결과 1표부족 11/29일 재적 203의 2/3면 사사오입하여 135라 하여 통과되었다고 선포함.
* 2.4파동(1958.12.24)
ㅇ민주당의 진출에 당황한 자유당은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방자치법과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야당의 국회 단상 발언마저 봉 쇄시키려 하였다. 이 때 무술 경관을 동원하여 법안을 통과 시켰다.
2. 제2 공화국(60∼61)
1)3.15 부정 선거로 4.19 혁명→제 2공화국 의원 내각제, 양원제, 국회 간접 선거로 민주당(구파) 윤보선 대통령, 총리는 민주당 (신파) 장면 2)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정치력 부족→ 5.16 군사혁명으로 붕괴
3. 제3 공화국 (63-72)
1)61∼63년 2년간 군정, 국가 재건 최고회의 →제3공화국 2)대통령 중심제, 단원제 국회, 공화당 박정희 대통령 3)중요 업적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베트남 파병 65 /한일 국교 65 /한미행정협정 66 / 국민교육헌장 68 / 3선개헌 69년 /새마을 운동 70 /
4. 제4공화국 (72-81)
1)배경 : 미군 감축, 닉슨 독트린 69, 안보위기→ 10월 유신72 2)통일주체 국민회의 ,대통령 간선제, 권위주위 체제 3)10월 26일 (79) 유신체제 종식→사태 수습 과정에서 12.12(79),5.18 광주 민주화 운동
5. 제5공화국 (81-87)
1)민주정의당, 전두환 대통령 7년 단임, 간접 선거 2)6.29 선언(87) 대통령 직선제 수용 →제6 공화국
6. 제6공화국(88-93) 1)민자당, 13대 노태우 대통령, 5년 단임, 북방 외교
7. 문민 정부(1993∼1998) ㅇ14대 김영삼 대통령, 신한국당→한나라당, ㅇ금융실명제 94/ 본격적 지방자치 95/ 교육개혁 96/ ㅇ98년말 IMF 외환위기 실정 8. 국민의 정부(1998.2∼2003.2 ) ㅇ15대 김대중 대통령 ㅇ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연립으로 역사상 최초로 여야 정권 교체 ㅇ최초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비밀대북송금으로 햇빛정책 빛이 바램) ㅇ금강산 관광시작 (재벌기업 현대아산의 위기) ㅇ교육개혁으로 급격한 교원정년 3년단축으로 교사부족 파동, 혼란유발 ㅇ비판언론 세무조사로 언론탄압 ㅇ의약분업으로 의료수가 상승(실패) ㅇ2002. 한일월드컵 개최 성공적(4강달성)
9. 참여정부(2003.2∼2008.2) ㅇ16대 노무현 대통령 ㅇ언론과 불화 ㅇ노·사갈등, 보·혁갈등 심화로 국론 분열 심화 ㅇ내부분열로 여당 약화, 대의민주정치 외면, 인터넷, 토론, 시민단체를 통한 국민직접정치 추구
◈ 죽산 조봉암과 진보당사건 ☞ 1993.8월호 월간 말지에 의거함.
1 .조봉암의 약력 `1898년 경기도 강화생. 20년대 후반기에 조선공산당의 지도적 인물로 활약 1932년 일경에 체포되어 7년간 수감됨 8.15도 옥중에서 맞았다. `해방후에도 공산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다가 이승만 단독정부에 참여 노선전환의 모습을 보임. `48년 5.10선거에 인천에서 출마하여 당선, 농림부 장관에 입각함.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유효투표의 11.45% 획득.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투표 30%획득, 이 기반위에 1956년 진보당 창당.
2. 수사당국의 혐의 1) 진보당이 내건 평화통일론이 김일성의 지령에 의한 남한 전복책. 2) 북한에 포섭된 간첩 양명산이 북에서 가져온 자금 2500만환을 조봉암이 양이 간첩일줄 알면서도 받았다는 것. `양명산은 1심에서 북에서 가져온 돈을 조봉암에게 주었다고 진술하고, 2심에서는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번복함. 최종심 재판부는 1심진술을 중거로 채택, 조봉암과 양명산을 사형선고함. 1958.9.25 선고 1959.7.31 집행 `"이박사가 절대로 나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구명운동은 하지 마세요. 병으로 죽은 사람. 자동차에 치여 죽은 사람도 많은데 평화통일 운동을 하다 이렇게 떳떳하게 죽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양명산 :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장사로 번 돈으로 조봉암을 도와왔다. : 해방후 48년 까지 남북으로 오가며 비밀 교역. 미군첩보기관의 공작선을 타고 북의 대남 교역기관 선일사와 상대.
3. 토머스의 증언, 미국의 태도 `주한 미대사관의 정보요원으로 미국의 조봉암 담당자 토머스는 조봉암에 우호적, "나는 조봉암이 통일된 한반도를 만들어 가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한때 공산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한 민족주의적 성격이 짙었기 때문입니다." 토머스는 대법원의 사형 선고 6개월 전 본국으로 소환. `조봉암이 구속되기 얼마전 미군 첩보활동 중이던 니콜라스 중령이 검찰당국에 비밀정보 제공. 조봉암 사건의 단서가 되었을 것? `미국은 조봉암 사건에 어떠한 논평도 없이 침묵하였다. 미국은 이승만을 통해서 남한을 정리하겠다는 기본입장에 변함이 없었다.
4. 오제도의 증언. `오제도 : 진보당 사건때 대검 정보담당 검사 "조봉암이 김일성의 대남노선에 동조한 앞잡이 노릇, 대한민국 자체를 부인한 자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당시 미국에 갔을 때 CIA북한 지부장은 나에게 죽산은 간첩이라고 말하였다." `고정훈은 조봉암담당 미국정보원 `고정훈 : 진보당에 들어갔다가 서상일계로 분열되어 나왔으며, 진보당은 유물 정당이라는 불리한 증언을 한바 있다. 4.19직후 과거 폭로 분위기에서 느닷없이 진보당 사건의 배후를 밝혔으나 (오씨는 속으로 웃었다고 했다.) 증거를 대지 못하자 명예훼손으로 구속됨.(1988 사망) 5. 1991년 여야 의원들의 국회 법사위원회에 죽산의 사면복권 청원서를 제출해 놓고 있다.
◈ 시를 통해 본 4.19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랫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ㅇ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 가를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김수영(金洙暎)의 시 <푸른 하늘은> 중에서 [ 4,19 혁명 직후에 발표된 이시는 끈질긴 투쟁과 지상의 희생, 적극적인 저항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자유의 진리를 새삼스럽게 인식시킴으로써 4,19혁명의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4.19혁명은 정치 사회적인 의미 이외에도 문학적으로는 이른바 ‘현실참여적 성향’을 뚜렷하게 제시한 계기였다.
ㅇ 열씩/백씩/ 총알 총알 총알 총알에/ 돌돌/ 돌돌돌돌/ 주먹 맨주먹 주먹으로 /피비린 정오의 가도에 포복하여/ 아! 신화같이 육박하는 다비네 군(群)들 -신동문 (辛東門) <아 신화같이 다비네 군들> 중에서 [ 이 시는 4,19의 현장을 뒤덮었던 청년들의 함성과 분노의 폭발을 신들의 영상들으로 승화 시켜 그려낸 대표적 현장시로서 큰 감동을 준다.
ㅇ 지금도 광화문 그 부근에 살며/ 밤새워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4월 영혼들의 신음소리를/ 한나절/ 귀기울여 들어보아라./ -양성우 <4월 회상>에서 민중적 각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4.19 세대는 기성 세대가 되었고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은 희미해 지면서 소 시민적 세계에 안주하기도 한다.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위에서 소개)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안타까와하는 마음을 예리하게 형상화했다.
◈ N세대에도 혁명의 유전자 살아있으리... ☞ 2000.4.19 조선일보/ 김광규·시인·한양대 교수
4·19가 불혹을 맞았다. 1960년 대학 신입생으로 4·19를 겪었던 김광규 시인은 1979년, 4·19세대들의 변모와 당시의 정치적 암울을 노래한 문제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다시 20년이 지난 지금, 이순을 맞은 김 시인을 통해 4·19를 되돌아 본다. (편집자)
1960년 봄 나는 대학 초년생이었다. 4월19일 1교시는 권중휘교수의 영미소설 강독 시간이었다. 지금은 대학로 번화가가 되어버린 곳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본관 건물이 있었다. 나무로 된 바닥이 삐거덕거리는 낡은 교실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이 권교수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3월 중순부터 교정에서는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소요가 계속되어 왔지만, 이날이 바로 학생혁명의 아침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오전 11시쯤 우리는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밖으로 몰려 나갔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데모였다. 법대생들과 합류하여 연건동 쯤 진출했을 때 경찰기동대가 앞길을 막더니, 곤봉으로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옷이 찢겨지고 가방을 잃어버리고, 더러는 피를 흘리면서 오합지졸로 흩어져서 우리는 교정으로 쫓겨 들어왔다. 경찰의 과잉진압은 젊은이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날 오후 시위대는 경무대 대통령관저를 향해 행진했고, 직선동에서 경찰특무대가 발포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되돌아오지 못할 길로 발을 내디덨다. 순수한 정열과 의리 밖에는 아무런 야심도 없었던 학생들은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오자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은 친구들을 애통해하면서 거리청소와 학교복귀로 시위의 막을 내렸다. 비록 거대한 담론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20세기 후반기 청년저항운동의 효시가 된 4·19 학생혁명의 선구자들은 나중에 정치인이 된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렇게 순진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로부터 18년의 세월이 지난 1979년, 그러니까 4·19세대가 40세 전후가 되었을때,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전국에 확산되었다. 당시 부산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나는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겪으면서, 산천이 두번이나 변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회 엘리트 계층과 집권계층 사이의 갈등이 별로 달라진 바 없음을 깨달았다. 동래의 하숙방에서 쓴 참담한 고백 「희미한 예사랑의 그림자」는 1979년 「창작과 비평」가을호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대통령 시해사건에 뒤이어 등장한 신군부의 탄압 조치로 이 계간지가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와 함께 폐간됨으로써 발표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이 작품은 중남미의 보칼그룹이 노래한 「루나 레나」를 기억하는 4·19세대의 절망과 자괴감을 드러낸 시로 자주 인용되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내가 번역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신 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함께 동시대 우리 소설들의 제목으로 차용되기도 했다. 4·19세대의 패배주의로 지탄받기도 했지만, 정직한 절망은 혁명의 폭력이나 추상적 이데올로기보다 진솔한 것이므로, 폭넓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4·19세대는 이순의 나이게 접어든다. 지난 40여년간 이 세대가 이룩한 공과가 여러 분야에서 그 어느 세대보다도 큰 자취를 남겼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19정신이 이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퇴색되어 가고 있지만, 우리의 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분야에서도 1960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에서 1년 남짓이나마 민주주의, 시장경제, 평등사회, 자유문화가 마음껏 꽃피려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4·19세대는 우리말로 교육받은 첫번째 한글세대이며, 외국어를 직접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한 제1세대이다. 한국의 문학과 예술을 동시대의 세계수준과 겨룰 수 있게 만들었고 한국 산업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부정한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여 현실을 뒤엎었지만, 혁명의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지 않고 모든 일에 겸손하고 인내심이 강한 세대이기도 하다. 자유와 민주의 높은 꿈을 가졌으되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였다.
이제 4·19세대의 아들딸들이 우리나라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이른바 인터넷 세대로서, 그들이 바꾸자고 부르짖는 지상의 현실 외에도 컴퓨터 속에 또 하나의 가상 현실을 가지고 있는 디지털 세대이다. 이념의 대립으로 갈려졌던 두개의 냉전세계 대신, 그들은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마우스를 클릭하여 간단히 세계의 국경을 남나들고 현실과 가상의 두 영역을 수시로 오고가며 무한한 상상과 창조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출근하면 곧장 컴퓨터를 열고, 외출하면 항상 휴대폰을 들고 다니고, 퇴근하면 곧장 TV를 켠다. 이 N세대는 그러나 광속의 정보통신망속에서 익명의 존재로 가상의 현실을 누리려 할 뿐,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을 직접 바꾸려 들지는 않는 것 같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율이 60%를 밑돌았다는 사실도 어쩌면 이러한 세태의 간접적 반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혈관 어딘가에 4·19혁명정신이 유전인자로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
◈ 실미도 사건 [국편문답]
박정희 대통령 시절 북한의 31명 청와대 피습사건과 뒤이은 납북사건 이후 얘기로만 전해듣던 실미도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군요 저희세대는 그저 귀동냥이 전부였는데 제가 알아본 바론 <동아일보,kcia,남산의 부장들>등에는 자세하지 않더군요.
실미도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인천 앞 바다 실미도에서 수용 중이던 공군 특수부대원 23명이 섬을 탈출, 인천 송도에서 민간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하면서 곳곳에서 군경과 교전을 벌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입니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971년 8월 23일 오후 12시 10분 경 신원을 알 수 없는 23명의 특수부대원들이 수류탄과 카빈총, 권총 등으로 무장한 채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오후 2시 30분 경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긴급출동한 군경과 교전 끝에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했습니다. 15명이 자폭으로 숨지고 2명이 군경의 응사로 사망했으며, 6명이 부상했습니다. 부상자 가운데 2명은 나중에 병원에서 숨졌고, 4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이 해 가을 총살됐습니다. 이들의 난동이 한때 '무장공비 서울침투'로 잘못 발표되면서 전군에 비상령이 내려지고, 김포공항이 폐쇄되는가 하면 수도권 전체가 한동안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실미도 특수부대 창설 목적에 대해서는 고위관계자들의 증언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창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장지량 예비역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 부대는 '김신조사건'으로 유명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기도했던 '1·21사태' 직후인 19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은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에 분노해 남한에서도 동일 목적의 특수부대 창설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1·21사태 직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과 제1국장 이철희의 책임 아래 육·해·공군에 북파를 위한 특수부대 창설임무가 주어졌으나, 육군과 해군의 경우 북파를 위한 수송수단이 없다는 이유로 중도에 해체되었고, 공군 특수부대만이 창설되었는데, 이 부대가 바로 일명 '실미도 특수부대'였다는 것입니다. 사건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공군본부 검찰부장이었던 김중권 대위(전 청와대 비서실장)는 부대가 창설된 시점은 1968년 4월이며, 부대이름도 이를 따 '684특공대'라 불렀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대원들은 대부분 충청도 출신 민간인을 요원으로 임의차출했으며, 이들에게는 군번도 주지 않은 채 장교계급장을 달아주었다고 합니다. 차출된 요원 가운데는 전과자가 많았지만 모두 범죄자는 아니었다고 공군 관계자는 밝혔습니다. 장지량씨는 이 부대에 관한 주요 사항은 모두 중앙정보부가 직접 관장했으며, 모든 일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생 원인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물러나면서 이 특수부대의 관리·운영과 관련한 사항을 제대로 인수인계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김중권 검찰부장도 "당시 군 검찰의 조사결과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훈련과 비인간적 대접, 극도로 나빠지는 처우 등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일으킨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습니다. 즉, 관리나 운영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건직후인 8월 25일 공군참모총장직에서 경질된 김두만 예비역장군은 "실미도 상황이 심상 치 않다. 훈련은 가혹한데 급식이나 처우가 형편없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차례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는데, 사건 발생 3개월 전인 1971년 5월에 마지막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중앙정보부에 반납하든지 타군에 이첩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방치하면 이들이 총부리를 북이 아니라 남쪽에 들이댈 수도 있다"고 했는데, 국방장관은 "중정이 직접 관장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며 10월에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8월에 사건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사건 한달여 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국회 답변에서 "난동자들은 공군 특수범이 아니라 특수부대 요원'이라고 간단히 밝힘으로써 이들이 '무장공비'가 아닌 남한의 특수부대원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북파를 목적으로 한 무장 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해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실미도사건'의 수사기록과 공소장, 판결문 등 관련 자료는 '군사기밀'로 분류돼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실미도 사건에 대한 설명은 그 동안 중앙일간지의 기사를 토대로 재정리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 기사들은 한국언론재단의 기사 데이터베이스에서 뽑은 것들을 사건의 경과순으로 재정리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일간지 뿐 아니라 방송에서도 최근에 다루어진 적이 있습니다. 1999년 2월 23일 MBC PD수첩 <무장공작원>편, 1999년 12월 19일 MBC <이제는 말할수 있다-실미도 특수부대편> 등이 그것입니다. 아마 현재로선 이 정도의 사실 정도가 우리에게 알려진 전부일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각 시대 대통령 선출방식
ㅇ 제1대 이승만-제헌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선출 ㅇ 2,3대 이승만-국민에 의한 직접선거, ㅇ 4대 윤보선-내각책임제 헌법으로 바뀜에 따라 국회에서 선출 ㅇ 5,6,7대 박정희 대통령-국민직선제 투표 ㅇ 8,9대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ㅇ 10대 최규하 대통령-통일주체국민회의 ㅇ 11,12대 전두환 대통-통일주체국민회의 ㅇ 13대 노태우 대통령-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나서 국민직접투표로 ㅇ 14대 김영삼 대통령-국민투표로 ㅇ 15대 김대중 대통령-국민투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