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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가 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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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흔하게 듣던 말이라 별생각 없이 그렇게 써져 있으니 그런가보다
하며 스쳐 지나가기 쉽지만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며 되새겨 봅시다.
번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떠오르는 모든 마음(생각)을 통칭 하여
번뇌라 하고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起滅현상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어록에
나산 도한이 석상선사를 만나 묻기를 "일어나고 멸함이 멈추지 않을때는 어떻게 합니까?
석상 "식은 재나 마른나무같이 하고 한생각을 만년가도록 하고, 함과 뚜껑이 맞듯이 하고
맑은 하늘에 티가 없는 것 처럼 하라."
도한이 말귀를 못알아 듣고 암두를 찾아가 다시 묻자.
암두가 할을 외치며 " 누가 일어났다 멸했다 하는가!" 이말에 깨쳤다고 합니다.
花中之甁이라 여러분은 이말 듣고 깨칠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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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전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수덕사 말사 주지로 있던 비구니스님이
사찰 음식점을 차려놓고 상호를 '수자타'라 하고 스님이 직접 경영하다가
신도(보살)에게 맏겼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모거사의 안내로 들렸습니다. 그분은 당시 교직에 있으면서 어느해
여름방학동안 하루 삼천배씩 십만배를 하신분으로 신심이 강한 분입니다.
그리고 얼마후 저를 이끌어주신 성오스님과 함께 들려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주방에서 주모가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리도 다시 얼마후 오후 2시경 늦은 점심시간에 혼자 들렸습니다.
홀에는 한 팀 밖에 없었고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모가 커피를 들고 제앞으로 다가와 앉더니
" 얼마전 스님과의 대화 하시는걸 들었는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초관 " 글쎄 뭔지 모르겠으나 말씀해보세요."
주모 " 선방에도 있어 봤고 요즘도 아침마다 한시간씩 참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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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모르겠으나 예전 수덕사에 재가자 선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참선을 배울때 듣는 말이 있지요 가부좌던 반가부좌던 경추골을 세우고
반드시 앉아 눈은 코끗을 스치듯 방바닥을 향하라고..
(화두가 뭐냐고 묻지도 않고)
초관 "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뭐가 궁굼하십니까?."
주모 " 앉기만 하면 방바닥에 점이 두개로 보였다 세개로 보였다 하면서
신경이 써져서 마음이 산란해 지는데 이럴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초관 " 선방에도 있었다면 큰스님들도 많이 아실텐데 물어보신 적 있습니까?."
주모 " 물어봤지만 화두에만 집중하라고 하시는데 아무리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걸 어찌합니까?"
스님들이 법문할때 이렇게 말하지요 "근심한다고 해결되는가 내버려 두십시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몰라서 못하나요 알면서도 안되는 걸요"
법문하시는 분은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으나 이론으로는 맞는 말이지요.
초관 " 답이 될런지 모르나 잘들어보십시요,"
(잠시 침묵한 후,)
초관 " 본래 점이 몇개요?"
주모 " 하나입니다."
이럴때 割! 한다고 하지요.
초관 (큰소리로) " 바보요! 멍청한거요! 본래 하나 인 줄 알았으면 됐지!."
주모 " (??,,놀라며.잠시 어리둥절,,) " 아!, 그러군요." 얼굴이 밝아지며
합장을 하고 고맙습니다. 내버려 두는(방하착) 실체를 알아 챈겁니다.
법명을 물어보니 '금강심'이라고 하더군요. 마지막 글에 또 나올겁니다.
色(대상)에 끌려가지 않는 마음 어려운 말로 '不應住色生心 是名수다원'
알고나면 너무 쉬워서 허탕한 마음이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보이는 대로) 볼줄 아는 직관(直觀)을 얻은 겁니다.
마음은 가볍고 편안해 졌지만 너무나 찰라간이라 왜그런지 모릅니다.
만물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기에 깨치는 찰라도 그와 같습니다.
빛의 간극, 빛의 틈새..
과학은 모르나
깨달음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마지막 장에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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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긍이 남전에게 묻기를 "호리병속에 거위를 어떻게 꺼내야 합니까?"
남전이 손벽을 치며 큰소리로 "육긍! " 그러자 육긍이 깜짝놀라며 " 네! "
그러자 남전이 " 보라 거위는 나왔다."
"왜 나왔다고 했을까요?." 이것도 좋은 화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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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句를 많이 보신분이 머리를 굴리면 이해가 되겠지만 설사 맞게 답을 해도
지해풀이는 안됩니다. 만일 지혜가 있다면, 직관력이 있다면...
남전과 다른 방식으로 꺼내 보십시요. (흔한 글이라 간략하게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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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가을쯤 당시 강주스님 法聞이 생각이 납니다.
깨달음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한소식 하신게 맞습니다.
그때 제가 이곳 카페에 써놓기를
" 물위에 오리 평온해 보이나 발 밑은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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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식으로는 성품을 보기는 커녕 본 자리 지키기도 어렵기 때문이지요
돌아보면 동문회시절 다른분들 모르게 스님과의 논쟁도 있었습니다.
당시 카페에 제나름대로 금강경을 해석하다가 강원에 학감으로 계셨던
스님과 해석을 두고 다퉜었는데 전 그분이 학감스님인 줄 몰랐습니다.
동문회를 떠난 후 몇번 연락도 주시고 만나 식사도 했지만 어느해 이곳
교구본사 주지스님 진산식 사회를 보시고 계시더군요. 식이 끝날 무렵
나무 뒤로 몸을 숨겼는데 사회를 보면서 보셨는지 곧바로 오시더군요.
그때 만난 것이 마지막 이였습니다.
행사 의식때 큰스님 법문이 있었는데 유명하신 분이 올라오시더군요.
한참 법문을 하시는데 보살이 제 귀에 대고 "거사님 앞뒤가 안맞아요."
이분은 제가 건네준 한마디에 의문을 품고 제일 먼저 한소식한 분으로
저와 성오스님 그리고 본각 앞에서 '악!~' 하고 일어서더니
" 거사님! 거사님! 제 몸이 컵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제가 화두를 건네준 줄 몰랐기에 어리둥절 하셨고..
보살은 법열에 쌓여 양팔을 너울 너울 흔들며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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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온 김에 이분의 예를 들겠습니다.
도반으로 만나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스승처럼 저를 받들어주던
보살로 저와 성오스님과의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본 분입니다.
어느날 " 어떻게 해야 깨칠수 있냐?" 며 졸라대기 시작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겁니다.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소리가 귀로 다가와서 들리는가? 귀가 소리를 쫒아가서 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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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하고 지식이 많은사람은 이럴때 음파의 파장을 생각할 겁니다.
깨달음은 아는 것(지식)을 거부한다!.
" 대답해 보시요?."
보살 " 으음~?? 모르겠어요."
초관 "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요, 매일 듣고 사는 것 아닙니까?"
보살 " ( ??..)
초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십시요."
이틀후 말하길 " 가슴이 답답해 죽겠습니다. 숨쉬는 것도 힘들어요."
초관 " 그러면 안되는데.. 그러면 병듭니다. 너무 애쓰지 말고..
그러나 생각은 놓지 말고 자연스럽게 " 이게 뭘까? 만 생각하시오 "
(답답함을 하소연한건 이틀후였지만 만나는 것은 매일 이였습니다.)
대화하는 가운에 문득 문득 상기시켜주며 풀고 조임을 지속했지요)
그리고 5~6일 후
저와 스님, 본각, 보살, 넷이 스님의 도반이 주지로 계시는 남해를
갔을때 였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식당에 들려 식사를 마칠 무렵
앞에서 말한 대로 空 體得 '성품의 계합' 을 체험 한 겁니다.
조사 어록에 相卽相入이라 했지요.
스님 말씀
"종단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법상을 피고 난리가 났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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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미함은 너무나 찰라간이라 '간밤에 이소식은 뉘에게 전할까?' 했듯이
마치 꿈에 떡 맛 본듯 不知不識間에 일어났다 사라지고 法悅만 남게됩니다.
'백문이 불허일견' 보고 확인하기 전에는 의심(번뇌)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어느날 보살이 묻기를 "거사님은 어떠세요" 하고 묻기에
신고 있던 양말을 도르르 말아서 벗어 던지며 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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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초관 " 살갓이 이와 같이 벗겨졌다는 뜻입니다. (안과 밖 = 空과 色) 경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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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분은 '內外明徹', 또 어느분은 안밖에 밝아 유리병속에 달을 담은듯하다.
고했습니다. 모 유명스님 글에 경계가 어떻십니까? 물으니 " 유리병 속이다."
이치는 맞지만 어록에 나온 글 말고 자기식으로 말을 해야지요
나는 안밖의 경계가 없는 것을 인식(自覺) 한다! 涅槃自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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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眼의 智慧로 열반의 경계를 구하면 안됩니다.
이분은 3년후 역 대합실 인산인해속에서 출발 10분전 두번째 관문을
통과 했습니다. 진정한 참선은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후 이분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한소식한 후 ㅇ석사에 들려 평소 알고 있던 스님을 만났나 봅니다.
몇마디 나누다가 스님이 "저는 안되겠으니 잠시 기다려 달라" 고
하더니 잠시후 사형인 수좌수님을 모시고 왔답니다.
열을 내며 대담을 주고 받은 후 스님이 말하길
" 출가이래 보살님 같은 분 처음 봤습니다,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보살이 답하길 " 대전에 거사님과 스님이 계십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하길 " 인도 다녀온 후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했다며
스님이 찾아올지 모른다 고 하기에
" 안옵니다. 올 것 같으면 당장 와야지 출가의 본분사가 무엇인가?."
하긴 이미 보살과의 대론에서 막힌데다 체면도 있고 그랬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스님은 상이 높아서 재가자보다 더 어렵습니다.
거기에 법납까지 많아지면 스님들끼리 법담을 피하는 것 같습니다.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法談(법담)외에는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재가자인 法光의 경우에는 단한번 언하에 깨친적도 있고 서연의 경우
세번 만나 초선에 들었듯이 아는게 많으면 앞 생각이 뒷 생각을 장애하기에
육조 혜능이 말하길
'앞 생각이 미혹하면 범부요 뒷 생각이 깨달으면 부처다' 라고 한겁니다.
禪家에서 유명하다는 임제스님도 백장 밑에서 삼년이나 공부를 했고
마조는 남악회양 밑에서 앉으면 일어날줄 모르는 절구통 수좌였습니다.
그래서 회양이 절구통 옆에서 벽돌을 갈며 거울을 만든다고 했던거지요.
초선에 들면 그때부터 탁마가 필요합니다. 탁마는 잡생각 군더더기를
털어내주고 정사유로 가는 길을 은연중에 가르킵니다.
어록에 유일하게 나오는 탁마는 오조 홍인과 육조 혜능스님입니다.
그후 십수년간 살생을 업으로 삼는 사냥꾼들 틈에 숨어살았다고 하지만
숨어산 것이 아니고 범소유상 개시허망을 현실속에서 통찰했을겁니다.
(色)모양에도 물들지 않고 (空)모양 아닌 것에도 물들지 않는 마음을..
그렇게 17년을 보내다가 법을 펴기 시작했는데 안타까운 것은 여래의
경계를 보이지 못했다는 겁니다. 만일 법을 보고 여래를 보았다면
육조단경에 나왔어야 하고 기록문화와 과장법에 능한 중국인들이
그것을 간과했을리가 없습니다.
세존께서 대중법문을 하실때 반드시 상수제자를 앞세우고 주고 받으며
설법을 하시는 것이 스승과 제자의 탁마입니다. 이때 회중에 참석하는
면면을 보십시요. 모두 대비구 아라한들이지 일반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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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어갑니다.
어느날 이곳 카페에 어느 스님이 이렇게 글을 올렸더군요 .
" 산승은 산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돌아 올때는 나귀고기 개고기를 함께 삶아 공양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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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멋진 글입니다. 내용으로 보아 절을 떠나며 깨닳아 돌아오겠다는
구도의 열기를 글로 남긴듯 한데 많은분들이 합장()을 했더군요
그런데 주제넘게 댖글을 달았습니다.
" 山僧이라며 도대체 어느 山으로 간다는 말입니까?
다시 오실때는 나귀고기 개고기에 스님고기까지 삶아 오시면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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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우셨더군요 미안했습니다. 분심으로 작용했다면 좋으련만..
화두타파하면 한소식 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소식입니다.
소식이란 직접 만나거나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전해 들었다는 뜻 입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 자신이 확인이 안되기에 검증 받으러 다니는 것이지
직접 보고 알았다면(知見)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따라서 '해탈을 보고 알았다' 해서 '해탈지견(解脫知見)' 이라고 합니다.
검증은 직관(直觀) 테스트로 '말귀를 알아 듣는가' 를 묻는 것으로
直觀(곧바로 본다) 한문으로 正見이 되는가 테스트에 해당합니다.
그냥 직설로 " 견성하셨습니까?" 소식과 見性은 글자부터 차원이 다릅니다.
만일 했다고 하면 " 지금 무엇을 보십니까?." 물었을때 經에 '약이색견아' '
했다고 "모양으로 보는게 아니다" 라고 한다면 글자풀이 입니다.
차라리 '차나 드시게' 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말해도 본 뜻을 알고 하는지?
'약이 색견아...' 모양으로 여래를 구하지 말라 했지만,
오해가 생길까 염녀가 되어 조심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모양이 없다면 空을 어데서 찾을수가 있겠는가?. 중생이 부처라 했는데,,
色과 空은 한몸과 같아서 " 色을 떠나 空이 없고 色을 떠나 空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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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師西來意? 했더니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性' 이라 했고 조주는
板齒生毛라 했습니다. 화두도 되지만 實像을 전해주는 말인데
말귀를 못알아 들었기 때문에 화두가 되는 겁니다.
똑같은 의미로
'뜰앞에 잦나무' 역시 말귀를 모르면 화두요, 알면 實像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달마 이후 육조 혜능까지만 가사를 전달 한다나..??
스님들도 그랬지만 이런 엉터리 해석이 지금까지도 떠돌고 있습니다.
板齒生毛란 앞니에 털났다는 뜻인데 달마는 앞니가 없다 고 합니다.
사대(지수화풍)를 모르면 바르게 말해도 틀린 말이 됩니다.
마음이 생기면 곧 죄가 생기는 때이니라. / 달마스님의 글로 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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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몇가지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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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타파는 왜 미하다 했는가?
화두는 중국조사들이 창시했는가?
아라한과 성불은 같은 뜻인가?
여성은 왜 성불할 수 없다고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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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에는 여성 아라한이 많이 등장합니다.
화두는
세존때 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고 깨치면 아라한이라고 했고 아라한이
됐어도 자신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미숙한 내용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법회에 모인 사람을 칭할대 '1250인구개시대 아라한' 이라고 했습니다.
초기경에 여성 아라한이 8000명이 넘는다는 글도 본 적이 있습니다.
'소냐'가 한탄합니다 " 나도 성문인데 아직도 번뇌가 다하지 못하는걸까?"
세존께서 "거문고 줄에 비유하며 너무 조여도 안되고 너무 늦춰도 안된다."
믄득 空을 체득했어도 너무나 찰라간이라 찾기가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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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마라가 칼을 들고 쫓아가면서 " 앞에 가는 사문은 게 섯거라"
세존이 뛰어 도망가면서 답하길 " 나는 멈춘지 오래다."
그러자 앙굴마라가 의심합니다. "뛰어가면서 멈췄다고? 이무슨 말인가?"
앙굴마라의 살생은 깨달음을 향한 집중이였지 살인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후 세존께서 앙굴리마라에게 산모의 집에 가라고 하니 살생을 해서
못간다고 합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그것은 전생이였고 금생에는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 고 합니다.
이와 같이 아라한이 되었어도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미하다고 하는 겁니다.
바보 주리반특에게
"너는 머리가 나빠서 내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한쪽에 가서 먼지나 털어라."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먼지 터는데 만 집중했겠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시간이 지나면서 " 왜 나에게는 먼지나 털라고 했을까?" 슬프기도 했겠지만
의심도 했겠지요. 그러다가 제일 먼저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세존께서 주리반특에게 설하시길
" 비록 머리가 나쁘다 해도 한가지 일에 집중하면 도를 이룰수 있다."
이게 화두가 아니고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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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청소하고 먼지 털어 도를 이룬다면 청소부 아주머니와 환경 미화원이
먼저 도를 이뤘어야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백만배로 성불한다면 오체투지로 수백리길을 가는 티벳
사람들이 먼저 도를 이룰 것이요, 진언이나 염불로 도를 이룬다면 자나깨나
진언을 외우는 라마교 수행자가 먼저 도를 이룰 것입니다.
경전을 마치 소설처럼 보고 해석하기에 본뜻을 모르고 수박 걷핥기 처럼
표면으로 흐르는 말만 이해를 하기 때문에 현실에 대입을 못하는 겁니다.
여성 成佛에 대해서는
아라한과 成佛이 같은가 다른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보통 아라한이면 공부가 끝났다고 하여 無學이라고 합니다.
이말은 사마타를 문수의 지혜로 비유하고 비파사나를 보현에 비유하여
지혜를 체득했으면 이제부터는 이론 공부는 끝났으니 行으로 가라는
뜻으로 달마의 理入四行에 해당하고 문수의 지혜와 보현의 행과 같습니다.
여기에 준하면 여성도 아라한이 될수 있고 초기경에 많은 여성 아라한이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완전한 열반에 이른 제자가 없다 고 하는 것이고
세존께서 유마를 내세워 십대제자 들에게 중도를 설하게 하셨고 따라서
오백제자수기품에 나오는 것처럼 아라한과 성불은 전혀 다릅니다.
여성 성불은 불가하다고 했지만, 경험상 초선은 여성이 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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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반면에 애착도 강합니다.
호기심은 본인이 믿기만 하면 쉽게 받아들이는 특성이 있기에 正法을
만나면 쉽게 깨칠수가 있습니다.
호기심은 수행으로 연결되어 아란한이 되는데는 빠르지만 애착심은
성불을 장애하기에 불가하다고 했지만, 남자는 체면과 허세 때문에
애당초 다가오는 자체가 어려워 성불은 고사하고 초선도 어렵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요가 수행자 대부분이 남자였고 지금도 태국등 동남아
불교에서 비구니를 볼수 없으니 애당초 기회균등에서 어긋난거지요.
또 사성계급과 일부 다처제하에서 여성의 존재, 그런 불교가 중국의
유교문화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됐다고 보여집니다.
참고로 제 남동생도 요가를 배우러 인도에 건너가 일년여 머물다 왔는데
도시가 생각나지 않지만 백만이 넘는 인구 대부분이 수행자 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요가를 몸매 관리한다고 남자보다 여성들이 많이 하고 있지만
본래 요가는 싯달타도 배우고 익혔던 하타요가로 인도의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법입니다.
보통사람은 하타요가의 명상과 호흡법이 불교의 비파사나와 비슷해서
구분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인도에서 불교가 멸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소개하고 싶어도 길어서 략하고
오래전 인도에서 성자로 블렸던 '라마나 마하리쉬'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는 요가수행자로 불교와 다릅니다. 인간은 신비주의를 신봉합니다.
불법에 기적이나 신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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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 하겠지만 저에게도 보통사람들이 보면 이해할수 없는
기적같고 신비하다고 할수 있는 일들이 금년은 물론이고 수없이 있었지만
신비를 떠나서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하기에 因緣果에 합당하게
원인없는 결과는 모두 삿된 것 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라한은 남녀 공통으로 누구나 될수가 있고 아라한과
성불은 차원이 다릅니다. 經에 가섭이 염화미소로 정법안장을 받았다면
성불해서 반열반에 들어야지 계족산 석굴속에서 선정에 들어 彌勒佛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이법은 부처님이 오기전이나 입멸 후에도 사라지는 법이 아니기에
말세던 어느 때 던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자' 라면 깨칠 수 있습니다.
禪定과 열반은 전혀 다릅니다.
세존께서 선정에 들어 피골이 상접하도록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을때는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했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또다시 괴로움은 시작되었기에
올바른 깨달음이 아니라 단정하시고 네란자라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비틀거리며
나오십니다. 그 모습을 수자타가 보고 곧 죽을 것 같아서 우유죽을 드립니다.
이후는 제 경험에 비춰 마지막 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깨달음에 있어서 타파해야할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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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중국 사대주의 사상과 한자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3~4십년 전, 30대 젊은 시절에 예언도 하고 한학에 밝은 탄허스님의
책을 읽고 막연하게 존경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평을 略하겠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한소식하면 아상이 수미산을 넘을 정도로 하늘을 찌르면서
뭔가 그럴듯하게 글을 쓰고 싶은데 한문은 모르고 한글은 값없어 보이고,,
그러나 조작하지 말고 느낌 그대로 표현하면 됩니다.
경허스님이 부셨어야 하는데 코구멍 없는소가 1700공안에 있습니까?.
한소식하고 자신이 없었던 거지요.
어느날 술상을 받쳐들고간 스님이 묻기를 " 깨친분도 술을 드십니까?
한문 게송은 기억을 못하기에 게송의 뜻을 기억으로 더듬어 옮깁니다.
단박에 깨달아 부처님 지위에 들기는 했으나 무시 이래 쌓은 습기는 어쩔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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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용인데, 평가는 여러분 스스로 지혜가 발현됐을때 하십시요
화두는 대상이 무엇이던 평범한 사고로 이해가 안되는 것에 의심이 들면 됩니다.
고로 道로 들어가는 門이 팔만사천 門이라 하나 둥굴어서 정해진 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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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을 이어가겠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어떤 문제에 봉착해서 다시 그 상태가 되면 되살아 납니다.
주모가 생각을 떨치려 해도 자리에 앉기만 하면 그생각이 떠올랐던 겁니다.
마치 운동 선수들이 징크스를 말하듯 요즘말로 '트라우마' 라고 하지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 혜가에게 마음을 찾아보라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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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50년이 넘는 오래된 친구가 있습니다.
제가 초막같은 암자에 머물고 있을때 50년 지기 친구가 찾아오더니
법당에서 백팔배를 하기에 자리를 피해 법당 옆방으로 피해줬습니다.
끝나갈 무렵 가보니 절을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군요.
되는일 없고 근심 걱정에 항상 수심이 얼굴에 가득해 보였던 친구가..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심만 있을때라 아무말도 못해줬습니다.
그리고 절집과 인연이 끊어진지 2년 후, 봄부터 석달간 거의 한달에
서너번씩 두어시간에 걸쳐서 현실과 삶에 관한 말을 해줬습니다.
그런 대화를 하는 가운데 어떤때는 눈빛을 반짝이며 환희심을 보였고
어떤 때는 이해가 안된다며 고개를 갸웃둥 하면서도 제말을 집중하며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되새겨 주는 것 뿐입니다.
'초상 안난 집 쌀 얻어오라, 약초 아닌 풀 뜯어 오라' 같은 내용입니다.
照顧脚下(조고각하)란 이런 것을 가르키는 것이지 신발짝이나 반듯히
벗어놓으라 했다고 신발짝이나 챙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훗날 비파사나로 정리해서 설하셨지만..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롭다'고 하는 현실을 자기관점으로 보지말고
객관화 시켜서 눈을 크게 뜨고 보는 것을 설명해준 것 뿐입니다.
흔히 말하길
"근심 걱정한다고 근심이 사라집니까? 그러니 근심걱정 하지 마십시요"
그러면 " 누가 몰라서 못하나요 안되니까 그렇죠 " 합니다.
삼대독자 잃은 부모에게 "초상 안난 집에서 쌀을 얻어오면 살려주겠다."
이말 듣고 쌀 얻으러 다니다 허탕치고 돌아오자 세존께서 세상살이를
말해줍니다. 보통의 경우 이런 말 듣고 마음이 편해지 겠습니까?
말이나 생각을 현실(사실)로 받아 들일 수 있을때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여름날 공주쪽으로 유명한 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왔을때 마당 한켠 돌 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 사는게 힘들지? " 고개를 숙인체 아무말 없는 친구에게
" 마음을 편안하게 할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내가 시키는대로 해보겠나?"
그러자 고개를 들고 저를 올려다 보더군요.
당시 친구는 불면증에 시달려 밤마다 소주를 취하도록 마시고 잠에 들었다가
술이 깰때쯤 잠에서 깨어나는 반복적인 생활속에 수전증까지 있어서 악보를
그릴려면 소주를 마시고 그릴 정도로 수전증이 심했습니다.
"아무리 가벼운 물건도 손에 들고 오래 있으면 손(몸)이 아프듯
근심도 오래 지니고 있으면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아프겠는가?"
"자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해보게"
눈을 반짝이며 제말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초관 " 먼저 숨을 한번 크게 쉬어보게"
(친구가 숨을 흠~ 하고 들이 마신후 휴~ 하고 내밷자 곧바로 말하길
이번에는 나와 함께 하는데 먼저 숨을 먼저 내밷은 후에 들이 마시게
그래야 가슴은 물론 창자속까지 차있는 탁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새롭고 신선한 공기가 몸 속 깊숙히 들어가지 않겠는가?.
그런후 내쉬면서 가슴(마음)은 물론 몸 속 구석까지 쌓여있던
근심의 때까지 씻어서 내보낸다고 생각하며 길게 내쉬게.."
몸속의 공기를 모두 빼냈으니 새로운 공기가 한결 깊숙히 들어갔겠지요.
많이 들어간 만큼 나오는 시간도 길어집니다.
들어갔던 숨이 모두 나오고 다시 들어가기 직전 잠시 멈추는 순간..
" 숨도 버리니 편하지 않은가? 빨리 찾아 보게! "
친구 (...) " 아~ 왜 이렇게 편하지.?. 이상해?. 이게 뭔가??..
초관 " 편한 걸 알겠는가?."
친구 " 응,, 알겠어,,
초관 " 다른 느낌은 없는가?"
친구 " 뭔지 모르겠는데.. 마치 머리 뚜껑이 떨어져 나간듯해.."
초관 " 오늘부터 '송암' 이라 하겠네."
가끔 스님들 방에 좌선하는 스님의 이마 위가 잘려진 그림이
붇어 있는 것을 보신적 있을겁니다. 割!~
이치를 설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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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들이 마시고 곧바로 내쉬지 않으면 잠시 여유도 없이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내쉰 후에는 곧바로 들이 마시지 않아도 잠시 편안한 틈새가 있습니다.
무엇이던 가지고 있으면 무겁고 힘이 들듯 버렸을때의 편안함을 발견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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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에서 벗어남.. 業(習)은 반복된 행위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날 밤부터 불면증이 사라지고 수전증까지 사라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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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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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기는 복식호흡을 합니다. 인체의 본능으로 자연현상이지요.
나이가 들고 생각이 많아지면 스트레스가 생기고 호흡은 점점 위로
올라가 자연현상을 역행하면서 여러가지 질병까지 유발시킵니다.
이런 것을 착안해서 복식호흡, 단전호흡 같은 수행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生者必滅.. 그런 수행을 아무리 했다 해도 죽음이 임박하면
숨이 목을 통과하지 못해 나간 숨이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고로 편안한 곳(安心立命處)을 발견 못하면 평생 헛수고 입니다.
성(화)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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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열로 변하고 열은 공기를 팽창시킵니다. 가슴(폐)의 면적은
한정되었는데 팽창된 공기때문에 새로운 공기(산소)가 들어갈
공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호흡이 빨라지며 헐떡이게 되지요.
근심을 떨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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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근심이 많으면 가슴을 옥조이게 됩니다. 가슴이 조여지면
폐가 압박을 받아 수축이 되겠지요. 그러면 역시 새로운 공기가
들어갈 공간이 작아 지겠지요.
그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산소부족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육신(色)은 자연의 산물이라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한숨을 쉽니다.
근심이 많으면 자신도 모르게 無意識的으로 한숨을 자주 쉽니다.
無意識(本能識) 살아있는 것는 본능적으로 삶에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펴라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답은 되지만
근심은 지속되기에 근본적인 답은 못됩니다.
스스로 떨쳐버린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편안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한생각 돌이키면 너무 쉬운 것, 다음에 또한가지 예로 설명하지요.
달마가 '괴로운 마음을 찾아보라' 했다고 이말에 혜가가 깨치고
주리반특이 먼지 털다 깨쳤다고 청소부 아주머니가 못깨치듯
아무나 그렇게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방편은 그가 처한 환경과 생각이 때(時)에 맞을때 가능 합니다.
넘어진 자가 일어서듯 괴로움을 심하게 느끼는 자가 깨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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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가끔 이렇게 말합니다.
" 이상해.. 걱정거리가 있는데도 왜 걱정이 안되는거지..?"
근심이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안다는 말이지요.
'불응주성향미촉법' '대상에 끌려가지 않는 마음'
왜 금강심의 경우에는 불응주색생심을 말하고 거사에게는
불응주성향미촉법만 말했는가?
보살은 點이라는 색(모양)에 끌려가지 않는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거사는 근심에 끌려가지 않는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풀리면 모두 풀리지만 照見五蘊皆空 다음에 色과
受想行識을 나누어 설해졌듯이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나눠서 설명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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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거사는 가끔은 이렇게도 말하기도 합니다.
" 모를때가 좋았어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속이 다보여서 괴로워.."
거짓, 위선, 어리석음이 보여서 안타깝다는 표현이지요.
그럴때면 " 뭐를 알았는가? 말해보게.."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니
더 이상 정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
부지불식간에 체득한 것을 自覺(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애당초 어떤 종교인도 이니였고 인연으로 만나 緣이 닿았던 것 뿐.
그래도 믿음이 있어선지 저도 안차는 단주를 꼭차고 다닙니다.
깨달음은
믿음의 종자가 발현된 것, 종교라는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018년 8월 26일 草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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