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 유학(儒學)을 공부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좋아하여 배불(排佛)하다가 눈이 실명(失明)하게 되므로 곧 맹성(猛省)하여 불전(佛典)을 공부하게 되었고, 참회(懺悔)하고 기도하는 지극 정성으로 말미암아 눈병을 치유하였다.
나이 21세(歲)에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연화동사(蓮華洞寺)의 도순장로(道純長老)에게 출가(出家)하여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광서(光緖, 淸德宗의 年號) 8년(1882년)에 호북성(湖北省)의 죽계(竹溪) 연화사(蓮華寺)에 있다가 미구에 섬서성(陜西省) 흥안 쌍계사(興安 雙溪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26세(歲)에 정토도량(淨土道場)인 홍라산(紅螺山) 자복사(資福寺)에 들어가 염불(念佛)하면서 계여산(継廬山) 행자(行者)라고 자호(自號)하여 그의 뜻을 밝히었다.
그 후에 절강(浙江)의 보타산(普陀山) 법우사(法雨寺)에 있으면서 20여 년간 조석으로 장경(藏經)을 열람하며 염불(念佛)만을 하고,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으며 두 차례나 문을 닫고 선정에 든 적이 있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원년(元年, 1912년)「불학총보(佛學叢報)」에 투고(投稿)하여, '상참괴승(常慚愧僧)'이라고 서명하였는데, 그 이름이 전역(全域)에 널리 퍼졌다. 민국(民國) 7년(1918년)에《안사전서(安士全書)》를 발간하려고, 늘 상해(上海)에 가서 태평사(太平寺)에 주석하였으며, 각 지방(各 地方)에서 많은 투고(投稿) 부탁이 있어도 대사(大師)께서는 모두 다 자비로 받아주셨다.
대사(大師)께서 평생(平生) 동안 정토(淨土)를 홍양(弘揚)하면서 주지직(住持職)을 맡지 않고 권속을 두지 않고 대좌(大座)에 오르지 않는 삼대원칙(三大原則)을 굳게 지키시었다. 그러면서 명리(名利)에 담박(淡泊)하고 각고근검(刻苦勤儉)하며 항상 사람들에게 진실수행(眞實修行)만을 가르쳤다.
나이 70에도 오현 보은사(吳縣 報恩寺)에서 문을 닫고 정진하시다가 그 후에 비로소 대중에게 법문을 개시(開示)하였으며, 보타(普陀), 청량(淸凉), 아미(峨嵋), 구화(九華) 사대(四大) 명산지(名山誌)를 편찬하고, 또한 오현(吳縣)에서 영암산사(靈岩山寺)를 건립하여 진달화상(眞達和尙)으로 하여금 그 직무를 맡게 하니, 그로부터 중국(中國) 정토종(淨土宗)의 제1 도량(道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영암산사(靈岩山寺)에서 입적(入寂)하시니, 세수(世壽)는 80세(歲)였다. 다비(茶毘)한 후에 무수한 오색사리(五色舍利)의 꽃과 사리(舍利) 구슬이 나왔다.
대사(大師)께서 일생(一生) 동안 조수(操守)가 근엄(謹嚴)하고 학덕(學德)과 행덕(行德)이 뛰어나 그의 감화를 받은 이가 많아서 민국(民國) 이래로 정토종(淨土宗)의 제1존숙(尊宿)으로 알려졌다.
인광대사(印光大師)의 문초(文鈔)와 인광대사(印光大師) 전집(全集)이 세상에 널리 전하는데, 이 힐록(擷錄)은 그 중에서 정화(精華)를 뽑아 놓은 책이다. 그 내용은 열 가지로 되었는데, 정토수행법(淨土修行法)을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잘 밝히셨다.
이번에 변호사(辯護士) 박병규(朴丙圭) 거사(居士)께서 일찍이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불경(佛經)을 많이 독송하고, 정토(淨土) 신행(信行)을 굳게 가져 선행(善行)을 널리 닦고, 또한 여러 대중에게 좋은 법보시(法布施)를 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이《인광대사법어힐록(印光大師法語擷錄)》을 번역하여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보급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원고를 나에게 보이고, 또한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내 또한 수희찬탄(隨喜讚嘆)하는 뜻에서 사양하지 못하고, 불재(不才)의 서문을 짓는 것은 위로는 불조(佛祖)의 심은(深恩)과 인광대사(印光大師)의 깊은 노력과 박병규(朴昞奎) 거사(居士)의 아름다운 뜻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글을 보는 이가 모두 발심하여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대인연(大因緣)을 맺어서 윤회고(輪回苦)를 벗어나고 빨리 성불(成佛)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발로된 것이다.
첫댓글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