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마루] 106년 5월 홍주성 의병 전투도(박흥순 작)

[글마루] 청년 도산이 세운 점진학교

[글마루] 신민회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

[글마루] 공립신보
글마루... 116년 전인 1898년 9월 10일, 음력으로는 7월 25일.
아직은 한여름, 또약볕이 내리쬐는 토요일. 평양 대동강 서편 언덕에 솟은 쾌재정(快哉亭).
정자 위에는 이완용의 처남인 평양감사 조민희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날은 광무(고종) 황제의 탄신 기념일, 독립협회 관서지부 주최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대중집회라는 것이 처음이었고 연설이라는 것도
처음이었다.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만민공동회가 평양에서도 열린 것이다. 20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 연단에 올라 입을 열었다.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快)한가 했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신일인데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축하를 올리니 임님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이라, 어찌 쾌재가 아니리요?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우리들과 자리를 함께하였으니 이는 관민동락(官民同樂)이라, 또한 쾌재가 아니리요. 남녀노소 구별없이 한데 모였으니 이는
만민동락(萬民同樂)이라, 더욱 쾌재라고 하리니 이것이 오늘 쾌재정의 삼쾌(三快)라 하는 바이로소이다"
이렇게 말문을 연 연사는 백성들이 당하고 있던 고통을 조목조목 들어 불쾌(不快)로써 말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박장대소하며 웃기도 하고
함께 울분을 터뜨리며 연설에 빠져들었다. 이 쾌재정 연설의 청년 연사가 도산 안창호였다.
일제가 을사5조약을 강제하는 등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잔불같이 위태로울 때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된 도산은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신보>를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도산은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취지서를 가지고
귀국하여 서울로, 대구로, 원산으로 다니며 전국의 지사들을 만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공화정체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자유공화국 수립을 위해 국민을 새롭게[新民]하고 사회, 국가의 모든 부분을 새롭게 하는 사업에 나섰다.
세월호로 대한민국의 휘황찬란한 발전의 이면에 이끼처럼 껴 있었던 탐욕과 이권결탁과 무사안일과 적당주의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100여 년전
800명밖에 되지 않는 신민회 회원들이 일제의 갖은 탄압과 어려움 속에서 자유의 나라 이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재산을, 가족을, 목숨까지
바쳤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대로 좌절하거나 누구 탓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국민을 새롭게 하고, 정치를, 교육을, 산업을, 민생을,
복지를, 안전과 국방을, 대한민국을 반듯하게 만들 새 신민회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출처: 글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