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또예프스끼는 <백치>를 통해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렸나? 아니라고 생각된다.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영혼'을 재현해놓지는 못했다. 콘스탄틴 모출스키는 미쉬낀이 상황속에 들어와 펼쳐진 <백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둠의 세계'안으로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한 인간이 들어온다. 혼란과 추함이 지배하는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이 들어온다. 그는 악한 세력과 투쟁하는 활동적인 투사도, 운명에 도전하는 비극적인 주인공도 아니다. 그는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나, 그의 외모 자체가 비극적 갈등을 일으킨다. 하나의 인격이 전 세계를 상대로 대치된다. 이런 대조 위에 이 소설의 역동적인 구조가 세워진다. 개성의 내적 법칙은 암흑 세계의 법칙에 정면 대치된다."(534쪽, <도스토예프스키 1>, 책세상)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당시 러시아를 암흑의 세계로 보고 있다. 4년간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 마을에서 치료를 받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미쉬낀이다. 아버지를 피해 멀리 피해있었던 로고진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뻬쩨르부르그로 돌아가고 있다. 그 두 사람은 우연하게 기차 안에서의 만났다. 미쉬낀과 로고진의 기차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나중 미쉬낀과 로고진의 운명적인/결정적인 하룻밤이 된 채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백치였던 미쉬낀 공작과 거액 상속자 로고진, 그리고 묵시록에 대해 적(敵)그리스도적 해설을 하는 전형적인 우스꽝스런 관리인 레베체프가 만나는 기차안의 얘기에, 사실상 <백치>에 등장할 다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얘기를 통해 전개될 사건의 복선들이 신속하게 노출된다. 그들이 돌아와 치료받기 위해, 형 집행을 위해 떠나기까지 거의 6개월 정도의 세월이 소요된다. 간질 발작과 무도증의 증상으로 슈나이더 박사에 의해 '백치'로 진단받았던 미쉬낀은 유럽에 의해 치유된 상태로, 신념을 지닌 조국 러시아로 돌아온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미쉬낀이 말하는 스위스가 낯선 환상이듯이, 미쉬낀에게도 자신의 조국 러시아는 환상의 장소다. 미쉬낀 공작이 돌아오게 된 이유는 뭔가? 인간관계가 하나 없는 조국 러시아가 돼버렸기 때문에, 사실은 딱히 귀국하게되는 목적이 뚜렷하지도 않다. 자신을 돌봐주던 슈나이더 박사에게 개인적인 일이 생기고 러시아와 자신과 연계된 예빤친 부인에게 소식을 전해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겸사겸사 해서 그의 조국 러시아를 찾아온다. 작품은 결과적으로 보면 백치였던 미쉬낀이 영혼에 충격을 받아, 아름다운 영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신념을 더이상은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치유불가능한 백치상태가 된 상황을 말해주는 것에서 끝난다. 결말이란 미쉬낀이 찾아왔던 예빤친 부인(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이 프랑스로 여행가서, 하루라도 빨리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예브게니에게 전하며 끝난다. 어서 빨리 러시아가 니힐리즘의 아성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영혼을 찾길 꿈꾸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외국 것에 한눈을 팔았으면 충분하지, 이젠 이성을 찾을 때도 됐는데 말야. 이 모든 것, 이 모든 외국 것, 당신네 유럽의 모든 것은 오직 환상에 불과해......외국에 나와 있는 우리 모두도 환상일 뿐이야. 예브게니, 내 말을 새겨 들어요. 당신도 직접 보게 될 테니까요!> 그녀는 예브게니와 헤어지면서 분통이 터질 듯한 소리로 외쳤다."(943쪽)
사건의 결말로 보자면, 로고진이 나스따시야를 죽인 다음, 로고진은 고열증상과 의식장애의 뇌염을 앓게 되고, 미쉬낀은 백치가 돼버린다. 그후 로고진은 15년형을 언도받게 되고 미쉬낀은 다시 슈나이더 박사의 보호아래 속하게 되고, 예브게니는 스스로 '잉여인간'이라 칭하며 조국 러시아를 떠난다. 1867년 뚜르게네프와 러시아와 서양의 관계의 대한 생각차이로 말다툼을 했다고 하는데, 뚜르게네프의 서양(특히 독일)예찬에 대한 평소 반감과 함께, 러시아적인 것이야말로 신적인 것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견해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실제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작품에서도 <백치>에서도 <악령>에서도 투르게네쁘에서 도래된 니힐리즘은 신랄하게 비판받는다. 이에 대해 모출스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바덴에서 투르게네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러시아의 애국주의자와 독실한 기독교인을 모욕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작가는 소설 <악령>에서 자신을 모욕한 투르게네프에게 맹렬하게 복수하고 있다."((692쪽). <도스토예프스키 2>, 책세상)
나는 나스따시야와 미쉬낀, 로고진의 삼각 혹은 아글라야, 가냐, 또쯔끼등의 다각관계로 <백치>를 보기보다는, 1867이후 외국에서 생활했던 도스또예프끼가 쓴, 그의 (백치의) 조국 러시아를 향한 '뜨거운 연서'로 읽는다. 여기에서 조국은 아버지이기도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또한 나는 <백치>를 푸슈킨에서 빌린 가난한 기사 , 고골에서 빌린 광인의 인물상으로부터, 세계화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러시아의 인물에 대한 가능성을 탐구한 것으로 읽는다. 미쉬낀은 아글라야의 입을 빌어 얘기되는 돈 키호테와 가난한 (중세) 기사이다. 스스로 유로지비(바보성자)가 된 듯한 미쉬낀이다. 유로지비는 바보성자로, 세속적인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수도사나 기독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치이면서도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음 또한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에는 "바보에게 복이 온다"(406쪽)는 러시아 속담도 있다고 한다. 백치가 된 채 중세유럽 성과도 같은 스위스의 외딴 곳에서 고립된 상태에서 치유된 미쉬낀은 순수로만 채워질 수 없는 근대 러시아에서 다시 백치로 오염됐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유럽에 의해 치유된 정신으로는 러시아의 영혼을 견디기 어렵다는 게 될까?
그런데 과연 미쉬낀이 러시아에 들어와서 무엇을 했는가? 분명 사건의 중심인물이 되는 듯한데, 그는 어떤 사건과 행동을 자발적으로 했는가?그의 행위의 대부분은 자발적이지 못했다. 사황을 말리고, 사건이 발생되면 받아들이고, 떠나면 찾아다니기는 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일이란 '신념으로서의 말과 시선으로서의 눈'의 역할만이다. 분명 중요한 요소는 되지만, 사건의 중심인물로 사건이 엮어가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 사건에 홀리고 파묻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외로 그가 한 일도 있기 있다. 그것은 바보성자의 이미지이다. 병이 있다, 즉 미쳤다고 다들 알고 있는 미쉬낀이지만 , 그럼에도 그가 하는 일이 비웃는 가운데서 인정받는 것은 빈자를 구원하는 성자의 역할이다. 그의 후견인에게서 받은 유산에 대해서, 도움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관여하지 않고 베푸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와중에 신문지상에 오르는 유산상속취하 소송에 관한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다시 한번 신념의 말이 들려진다. 물론 이 사태는 가냐에 의해 파렴치한 처사로, (무리들이 모르고서 저지른 행위로) 판명난다. 이렇듯 선심쓰는 바보 성자를 제외하고는 그가 한 일이란 (사라져야 하는) 매개자만이 아닐까?
그렇다면 <백치>의 등장인물들은 무엇에 의해 움직여지는가? 유산상속에 의한 돈(혹은 지참금)과 이상(환상)에 의해서이다. 돈에 의해 움직여지는 측면을 살펴보면, 로고진은 유산상속을 받은 후에야 맘껏 나스따시야를 따라다닐 수 있다. 무작정 자신이 러시아인인가를 확인하려했던 미쉬낀은 러시아인임을 증명하듯 후견인으로부터 거액의 재산(사실상은 소액 재산)을 상속받는다. 공작이라는 지위와 분에 넘치는 유산으로 인해 그는 러시아에서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 가냐는 7만 5천루블이라는 돈 때문에 나스따지야를 사랑하는 채 했다. 또쯔끼의 재산으로 인해 나스따시야는 교육 받고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인해 그녀는 육체만큼 소중한 영혼을 잃어버렸다. 그 잃어버린 영혼을 미쉬낀에 의해 되돌려받을 수 있을까 하여, 미쉬낀과 결혼도 약속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운명적인 돌발상황에서 일은 그르치게 된다. 묵시록의 해석자인 레베제프는 돈이 필요해 로고진에게도, 미쉬낀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처지다. 미쉬낀 후견인의 아들이라는 굴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돈을 요구하는 부르도프스끼 무리가 있다. 이들은 모두 돈에 의해 이상이 은폐되버린 경우이다.
미쉬낀과 로고진의 만남에서 말을 잃어버린 채 울고 있는 사건까지를 살펴본다. 미쉬낀과 로고진이 러시아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우연하게 만났다. 그후 로고진을 통해 알게 나스따시야와 예빤친장군의 비서인 가냐가 결혼을 한다고 하자, 가냐는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것이니 그만두라고 만류한다. 이유는 물론 서로 감정에 충실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후 나스따시야는 자신을 아름다운 고통받은 영혼으로 보고 잇는 공작에게 청혼한다. 공작은 승락하나, 나스따시야는 로고진과 도피해 버린다. 시간히 흘러 미쉬낀과 아글라야의 약혼발표에 앞서, 나스따시야와 이글라야의 미쉬낀 쟁탈전이 벌어진다. 결국 나스따시야와의 (구원)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미쉬낀이다. 그러나 나스따시야는 그후 다시 로고진의 손을 붙잡고 뻬제르부르그로 떠난 나스따시야가 질투/정념의 화신이 된 로고진에 의해 주검이 되기까지가, <백치>에서 전개되는 큰 사건의 개요다. 이렇듯 분명 미쉬낀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닌데, 그가 연계됨으로써, 연계되어야만 하는 쪽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그렇다면 창백한 얼음의 이미지인 미쉬낀과 불의 이미지인 로고진의 과연 어떤 관계일까를 살펴본다. 초면에 로고진에게 호감을 일으켰던 미쉬낀공작은 분명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비대칭 지점에 놓여있다. 한쪽에는 없는 분신이지는 않을까? 그에 대해서 미쉬낀에게 빈번하게 포착되는 그를 쫓는 로고진의 눈이 있다. 이렇듯 미쉬낀과 로고진은 서로 아닌 것으로서의 분신이 아닐까? 미쉬낀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성으로 무장된 신념의 측면만이 있다면, 로고진은 육체에 대한 욕망이 전부인 측면만이 있다. 이들은 서로 뭔가에 홀렸다는 것도 동질의 것으로 출발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에서의 섬뜩한 조우가 있다면, 미쉬낀과 로고진의 첫만남은 분명 이질의 것에서 비롯된 호감으로 스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공히 한 여자에게 홀리게 된다. 한 사람은 정념에서 비롯된 소유로, 다른 한 사람은 순결로의 구원의 몸짓으로 말이다. 미쉬낀에 의해 자꾸만 언급되는 "누군가 보고 있는 눈"은 사실 그것은 분명 로고진의 눈이고 타자의 눈이지만, 홀린/홀려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외부에 존재하는 또다른 자신의 눈으로 자꾸만 나는 읽혀졌다. "아까의 두 눈이, 바로 그 두 눈이 갑자기 공작의 눈과 마주쳤다. 구멍 속에 숨어 있던 사람도 벌써 거기서 한 발자국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순간 마주섰다. 갑자기 공작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환한 층계쪽으로 그의 몸을 돌렸다. 공작은 좀 더 분명하게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로고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광기가 도는 미소는 그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오른손이 치켜 올라가고 거기서 무엇인가가 번쩍였다. 공작은 그 손을 저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지 한 가지만 기억할 수 있었다. 소리를 쳤던 것 같은 기억....."(363쪽)
눈을 따라 흘러가는 듯한 사건을 따라보자. 다른 눈 끼리 마주친다. 나스따시야가 로고진의 손을 잡고 결혼식날 떠나버리자, 공작은 그녀를 찾아 뻬제르부르그로 떠난다. 하루종일 로고진의 집으로, 나스따스야의 집으로 찾아다니던 그가 마주친 것은 바로 그 '눈'이다. 로고진은 공작에게 집으로 가자고 말하고는, 자신은 반대편 인도로 가서 걷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로고진은 뭔가 쫓기듯이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그리하여 둘이 로고진의 집에 도착하는데, 집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아미 죽음의 정적이 깔린 방으로 묘사된다. 문자화되기 전에 이미 독자는 분위기만으로 나스따스야의 죽음을 알게 된다. 주검을 확인한 후, 둘은 서로에게서 흘리는 눈물을 확인하지 못한 채 울고 있다. 분신처럼. 의식 상실과 백치와도 같은 모습으로 그들은 발견되어진다. "공작은 조용히 상체를 수그리고 그와 나란히 앉았다. 그의 가슴은 몹시 심하게 두근거려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공작은 그를 훑어보았다. 로고진은 마치 공작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그를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공작은 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시간은 흘러 날이 새기 시작했다. 로고진은 간간히 그러다가는 돌연히 두서없는 내용의 말을 날카롭게 소리 내어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함을 치다가는 갑자기 웃어 버리기도 했다. 공작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로고진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공작 자신은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다리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감정이 끝없는 우수를 동반하며 그의 마음을 짓눌려 왔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다. 마침내 공작은 무기력과 절망의 나락에 빠져 버린 듯 쿠션 위에 누워, 자기의 얼굴을 창백하게 굳어버린 로고진의 얼굴에 갖다 대었다. 공작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로고진의 두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공작은 자신의 눈물을 의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이상 눈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938쪽)
바보성자 미쉬낀의 대립쌍으로는 무신론자 로고진이 놓인다. 그리고 미쉬낀과 로고진의 사이에 나스따시야가 끼여 있게 된다. 그리고 정념의 노예를 만드는 나스따시야의 대립쌍으로 대지주 예빤친장군의 딸 아글라야의 충동을 놓고 있다. <백치>를 미쉬낀, 로고진, 나스따시야, 이글라야의 사랑 얘기로도 볼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없는 열정으로 읽어도 될까? <백치>에서의 열정은 나스따시야가 중심에 놓여 있다. 나스따시야는 어떤 인물인가? 지방도시 소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부호 또쯔끼의 자선에 거둬진 경우이다. 또쯔끼가 아무런 사심없이 한 어린 영혼을 구원한다는 의미에서의 나스따시야를 보살폈다면, 점차 미모가 눈에 띄이자 또쯔끼는 그녀를 따로 교육시키고 보살펴준다. 그게 9년전이다. 1년 중 2달정도는 굴욕스러운 그의 노리개가 되는 나스따시야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육체적으로 더렵혀진 자신에 대해 구원의 손길을 뻗쳐줄 성자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다림(속죄)보다는 자신에 대한 모멸감을 견디기 어렵다. 왜 죽지 못했느냐고, 그녀는 끝없이 질문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이제 그녀가 살 길은 죽지 못하게 하는 모멸을 생성하는 상황연출이다. 다음은 그녀가 공작과 그녀의 생일 연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심경고백이다. "내가 저 사람의 시골집에서 5년 동안 홀로 외롭게 살고 있을 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당신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지요. 정직하고 착하고 다소 어리석은 듯한 사람이 문득 나타나더니 <나스따시야, 당신은 죄가 없어요. 나는 당신을 존경해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러한 공상을 하다가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어요. .....그러고 있으면 바로 저 사람이 찾아와서 1년에 두 달쯤 머물며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화나게 하고, 구역질나게 하고, 추잡하게 하곤 떠나 버리는 거였어요 그래서 나는 천 번이나 연못에 죽으려고 했는데, 삶에 무슨 미련이 있는지 죽어 버리질 못했어요. 자......로고진, 이제 준비가 되었나요?"(269쪽) 그런 그녀이기에 또쯔끼가 준비해준 7만 5천루블의 돈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가냐에게 갈까도 저울해 본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가냐의 본심을 알고 있는 공작에 의해 그것은 저지된다. 물론 공작이 저지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식으로 결혼은 회피됐을 것이다. 결혼에 대해 공작이 나스따시야에게 말하고 있다. "그 사람과 결혼하지 마세요. 자신을 파멸시키지 마세요.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돈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다고 직접 말했어요. 아글라야 예빤치나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그걸 당신에게 말해 주러 온 겁니다."(213쪽) 그리고는 나스따시야는 공작의 말에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공작이 말하는 대로 따르겠어요"(242쪽) 물론 공작, 욕망의 소용돌이에 자신을 내던지는 나스따시야를 '지옥에서 빠져나온 순결함'으로 말하며 만류한다. 나스따시야는 따른다. 하지만 곧바로 벗어나는 모멸을 되돌려주는 방법을 선택하고는, "가공을 하지 않은 다이아몬드"(276쪽)인 나스따시야는 로고진과 함께 떠나버린다. 6개월이 흘러, 모스끄바로 떠난 이들이 다시 페쩨르부르그/빠블로프스끄에 모인다. 그 사이 나스따시야는 계속 결혼식 직전 세번째나 도망쳤다. 푸슈킨의 시 [옛날 어떤 곳에 가난한 기사 살았네](<백치>에서는 [중세의 장면들]에서 발췌했다는 푸슈킨의 시)에 등장하는 가난한 시가라 아글리야의 이상향으로서의 사랑이라면, 나스따시야에게 있어 이상적인 사랑은 과거를 깔끔히 잊게 해주는 그 다음을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나스따시야는 로고진의 손을 잡고, 때론 로고진의 손을 피해 도망칠 뿐이다. 성스러운 결혼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순결해야할 신부의 자리를 피하는 것만이 그녀가 세상을 견디는 방법이다. 이것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란, 미친(착란)상태나 완전한 망각인 백치상태이거나, 죽음 밖에 없다. 아글라야의 나스따시야에 대한 질투심과 공작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나스따시야가 선택하는 방법은 또 다시 모멸감의 승리와 함께 도피하는 것이다. 공작과 결혼을 약속하지만, 다시 또 어김없이 그녀는 로고진의 손을 잡고 이곳에서 벗어났고,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망각이 자행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나스따시야의 편지에 담겨졌다고 얘기하는 "꿈, 악몽, 광기"(696쪽), 그게 바로 나스따시야의 삶을 대변하는 단어다. 꿈과 광기의 날들이었던 것이다. 아글라야가 공작과의 결혼발표에 앞서, 짓밟힌 순결을 되찾을 수 있다는 착각을 더이상을 하지 말하는 발언에, 나스따시야 처참하게 발언한다. "공작 ,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당신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나를 조......존경한다고 분명히 말했지? 그래, 바로 당신이 그런 말을 했어! 나는 당신을 풀어 주기 위해 당신에게서 떠났지만, 지금은 아냐, 이 아가씨가 왜 나를 방탕한 여자로 취급하는 거지? 내가 행실이 바른지 아닌지는 로고진에게 물어 봐."(880쪽) 이렇게 아글라야와의 싸움에서 되찾은 공작과 결혼식날, 그녀는 또 어찌하는가? 군중속에서 로고진의 시선을 발견한다. 그녀는 미친듯이 로고진에게 달려가 로고진의 손을 잡고는 말한다. "살려 줘! 날 데려가! 어디든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에!"(913쪽) 결혼(순결)이라는 꿈, 사랑받는다/사랑한다는 환상,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광기로 말해지는 나쓰따시야의 모습이다. 작품에서 인용하는 푸슈킨의 시가 바로 그녀에게 있어 공작과 로고진과의 최후를 예견해준다. 푸슈킨의 시에서 인용한다. "그대와 보내는 이 밤에 내 목숨을 걸고!"
<백치>는 '에피소드를 얘기하는 향연'에서 다성이 두드러지게 들려진다. 삽화를 통해 소설은 인물들의 이상(理想)을 말한다. 얘기를 잘 하는 공작에 의해 얘기되는 목가적이고도 환상적인 스위스 마을에서의 마리와 아이들의 얘기, 가냐에게 전하는 단두대 에피소드, 어린 시절 나폴레옹과의 조우를 얘기하는 이볼긴 장군의 얘기를 통해 러시아적인 것의 뛰어남에 대한 강조를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일 뿐이다. 이뽈리뜨를 통해 얘기하는 니힐니스트들의 투쟁/이상도 있다. 이렇듯 에피스드(삽화)가 인상적이다. 1부의 마지막에 들려지는 나스따시이 생일날 초대된 인사들의 프티죄(petit jeu) 놀이는 과연 향연의 재현이다. 여기에서 채택되는 놀이는 프티죄 놀이로, 이것은 "각자 자리에 앉은 채 돌아가며 자기 얘기를 털어놓자는 거였는데, 살아오는 동안 저지른 고약한 짓 중에서 가장 못된 짓을 양심적으로 고백하는 거였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얘기는 진실되어야 하고 거짓이 아니어야 하는 겁니다"(223쪽) 이러한 에피소드화된 진실게임이라고 볼 수 있는 프띠죄놀이를 통해서도 죽음의 순간은 또한 얘기된다. 그리고 또한 사상/생각에 관한 토론 또한 극적인 이 작품을 흥미롭게 읽어가는 요인이 된다. 기타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이 이 작품 또한 끝없어 보이는 (신념/정념) 홀린 자들의 장광설이 눈에 보인다. 작품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신념/정념에 홀린 사람들이다. 4부 시작에서 말해지는 평범한 사람들인 바랴, 그녀의 남편 쁘찌찐, 가냐를 제외하고 말이다. 나쓰따시야가 말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서 들려지는 '저 여자 미쳤다', 미쉬낀에 대해 반복되는 '미쳤다'는 말, 이볼긴 장군의 황당무계한 끝없는 환상(거짓말), 아글라야의 열정의 쉼없는 이동, 이뽈리뜨의 자살를 예고하는 낭독은 모두들 홀린 사람들이라는 예가 된다. 미쉬낀 공작의 유산상속에 대한 부당함을 기고한 껠레르 포함 부르도프스키등의 무리들은 또 어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젊은이 이뽈리뜨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유서가 있다. 유물론자 무신론자 니힐리스트 2주정도의 생존기간을 선고받은 폐병환자 이뽈리뜨의 <해명>은 다음이다. "나의 신념은 나의 사형 선고와는 전혀 무관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딱 한가지만 물어보라.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두들 확신하리라고 믿지만, 콜럼버스가 행복을 느꼈던 것은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발견하려고 시도했을 때였다. 틀림없이 그의 행복이 절정에 다다랐런 순간은 신세계를 발견하기 정확시 사흘 전이었으며, 절망에 젖은 승무원들이 유럽으로 뱃머리를 되돌리려던 찰나였으리라! 신대륙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신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콜럼버스는 신세계를 거의 보지 못하고,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발견했는지조차 모른 채 죽어 버렸다. 문제는 삶에 있다. 오로지 한 가지 삶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끊임없이 그 삶을 추구하는 데 있지, 그 삶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606-607쪽) 이는 니힐니즘과 연결된다. 로고진의 음침한 현관문 위에 걸려진 그림이 이뽈리뜨의 니힐리즘으 도화선이 됐다. 그 그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꿈꾸지도 못하는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복제화이다. 이 그림은 보고 있노라면, 그리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깡그리 무화(無化)시켜버리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니힐니스트의 대변인으로서 로고진을 드는데, 거기에 묵시록 해설가인 레자예프의 시선도 또한 그 당시 주류인듯 싶은 니힐니스트와 연계된다. 그럼, 여기에서 레자예프의 묵시록 해설을 들어보자. 요한의 묵시록, 6장 6절과 8절에 대한 해석을 레자예프는 다음으로 말한다. "내가 인간이란 <제'3의 말[馬]인 검은 말과, 손에 저울을 든 기사(騎士)와 함께 살고 있는 거라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요즈음에는 모두 다 저울과 계약에 의거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권리만 찾고 있어요. <하루 품삯으로 고작 밀 한 되, 아니면 보리 석 되를 살 뿐이다......>모든 게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내려 주신 자유로운 정신, 깨끗한 마음, 건강한 육체 마저 그런 기준으로 소유하려고 해요. 그러나 권리만으로 이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는 없어요. 푸르스름한 말 한 필이 있고 그 위에 탄 사람은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지옥이 따르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해 얘기를 했더니 아주 강한 반응을 보이더군요."(313쪽)
작품에서 자칭 잉여인간이라 부르는 예브게니가 나오는데, 그가 말하는 공작의 환상(이상)에 관한 문제점을 들어본다. 나스따시야와의 문제에 대한 견해다. "원한다면, 당신의 진면목을 파헤쳐 보이겠소! 젊은 당신은 스위스에서 조국을 갈망했소!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러시아에 대해 많은 책을 읽었소. 아마도 훌륭한 책들이었을 거요. 그러나 당신에게는 유해한 책들이었지요. 당신은 실천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이 땅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다짜고짜 실천에 뛰어들었지요! 러시아에 도착한 바로 그날, 당신은 가슴을 도려내는 슬픈 얘기, 즉 불행한 여자의 얘기를 들었소. 순결한 기사인 당신은 바로 그날 이 여성을 만났고, 그여의 환상적이고 악마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소. 물론 나도 그녀가 미인이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게다가, 당신의 나약한 신경과 간질병, 신경을 자극하는 해빙기의 뻬쩨르부르그 날씨, 거의 환상적인 생소한 도시에서의 만남과 헤프닝의 하루, 뜻하지 않은 낯선 사람과의 사귐, 예기치 않은 현실의 노출, 아글라야를 포함한 예빤친 가의 세 미녀, 이 모든 사실들을 그날 하루에 첨가해 보시오. 거기다 피로와 현기증,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거실과 그 분위기를 더해 보시오."(892-893쪽) 공작의 문제는 "자신의 죄가 아닌 혐오스런 상류층 호색한의 죄로 더렵혀진 여자를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고 선언"(893쪽)함으로써, 스위스에서의 마리의 경우를 재현시킬 수 있는 착각에 빠져있는 공작이라는 것이다. 공작의 환상에 의해 공작이 다시 백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예브게니의 진단이다. 물론 "불상한 백치! 앞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899쪽)로 걱정스런 예상을 해보지만, 결국 미쉬낀의 정신(마음)상태는 "설명하기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군요"(898쪽)라고 말하지만, 분명 나스따시야도 사랑했고 아글라야도 사랑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 '왜', '누구를', 사랑했냐고 질문한다는 건 어리석은 게 아닐까? 이해할 수 없지만 미쉬낀은 나스따시야아도 아글라야도 사랑했다.
<백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정은 점차로, 행동반경이 세계로 넓혀져 간듯하다.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간, 즉 그리스도/바보성자를 통해 (세계) 종교화 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이상(理想)/사랑은 단편 <우스운자의 꿈>(1877)에서 더욱 눈물나게 환상적인 이야기로 펼쳐진다. 전제되는 구원(사랑)은 <백치>에서 조국애에서 <우스운 자의 꿈>에서의 인류애로 더욱 넓혀지는 듯하다. 러시아이건 세계이건 사랑의 도화선은, 여성이 아니다. 비록 여성의 몸을 빌렸을지언정 남성과 여성의 쌍이 아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헐벗은 아이다. 내 팔꿈치를 잡아 당기는 배고픈 아이다. <백치>나 <우스운 자의 꿈>에서 말/신념이나 마음의 변화만이 있었다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알료샤에게서는 '행위'까지일까? <백치>를 읽고난후 내게 가장 강력하게 남아 있는 것은 , 백치 미쉬낀의 형상도, 세상에 모멸감을 던지는 나스따시야도, 멋모르고 세상을 향해 충동적으로 접근하는 아글라야도, 무신론자 로고진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로고진의 집에 스며들어있는 음침한 죽음의 기운이다. 마지막 말을 잃어버린 산-주검들이다. 그는 살아있는 자인가, 죽은 자인가? 아니면 죽기 바로 직전의 모습인가? 산-주검이 아니겠는가? 의식이 백지(백치)화된 미쉬낀과 의식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로고진은 산-주검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건 사랑과 이상이 상실될 수밖에 없는 그당시 뻬쩨르부르그의 조건/상황으로 봐야할까?... 그런데 꼭 그때 그곳만일까?
[김근식, "열린책들", 2002년]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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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둠의 세계'안으로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한 인간이 들어온다. 혼란과 추함이 지배하는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이 들어온다. 그는 악한 세력과 투쟁하는 활동적인 투사도, 운명에 도전하는 비극적인 주인공도 아니다. 그는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나, 그의 외모 자체가 비극적 갈등을 일으킨다. 하나의 인격이 전 세계를 상대로 대치된다. 이런 대조 위에 이 소설의 역동적인 구조가 세워진다. 개성의 내적 법칙은 암흑 세계의 법칙에 정면 대치된다."--콘스탄틴 모출스키
다시 읽는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