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프고 억울하고 성스러운 인생'
1937년, 병마에 시달리던 김유정이 만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생전에 교분이 깊었던 평론가 김문집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덧붙여 '세상에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 많으되 김유정만한 사람이 드물고,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많으되 유정만큼 불쌍한 사람도 드물었다'며 가슴아파했다. 왜 하필 그는 김유정의 생애를 일컬어 '슬프고 억울하고 성스러웠노라'고 했을까.
그로부터 50년 뒤, 그의 고향을 찾은 필자는 그 말이 주는 쓸쓸한 울림을 되씹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고향에서 김유정이라는 이름이 갖는 화려한(?) 명성만큼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음에 대한 실망이 그 울림을 더욱 크게 해 준 것일까. 아니면 명문가에게 태어났으되 일찍이 부모를 잃고, 죽는 날까지 가난과 실연과 병고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그 와중에서도 불꽃을 사르듯이 문학적 생명을 불태우다 그 말년에 30여 편의 주옥같은 단편을 문학사에 남기고 간 유정의 생애가 너무 애잔해서인가.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한 20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래야 쓰러질 듯한 헌초가요, 그나마도 50호밖에 못되는 촌락이다.
-「내가 그리는 신록향」중에서
실레. 현재의 이름은 강원도 춘성군 신남면 증리. 바로 김유정의 고향이다. 이제 그 강원도 산골 앞에는 서울과 춘천을 잇는 철길이 열리고 번듯한 역사가 들어서 20리 가량 꼬불꼬불 돌아가야 했던 옛 산골 풍취는 사라져 버렸다.
신남 역사와 철길은 80년대 학번인 필자에게 남다른 추억의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대성리, 청평, 강촌, 춘천간을 잇는 그 열차길은 80년대의 MT코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 때 차창 너머 건조한 풍경으로만 스치던 신남역 바로 맞은편이 김유정의 고향이라는 것을 그때는 왜 한번도 기억해 내지 못했던 것일까(돌아올 때 남춘천역에서 열차를 타고 왔으므로 다시 한번 신남역을 지나쳐야 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과 같이 앉아 있었으나, 그들 역시 차창 너머의 풍경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두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의 머리 속에도 예전의 필자처럼 좀더 현실적인 담론으로 가득 차 있었을 터).
신남역을 오른쪽으로 끼고 조금 걸어 내려가면, '김유정 유적지'라는 입간판이 도로 한켠에 쓸쓸히 서서 과객을 안내해 준다.
예전엔 이곳에 저 금병산 물을 실어 내리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복개하여 운동장같이 넓은 시멘트 언덕이 저 산밑까지 덮어 버렸다. 양쪽에 들어선 현대식 건물과 아직 남아 있는 촌가가 함께 어울려 다소 부자연스런 근대적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때부터 길눈 어두운 필자는 그 부자연스러운 풍경 속에 어색한 몸짓을 보태어 헤매야 했다. 입간판까지 있는 만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김유정'에 대해 훤히 알려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판이었다. 산밑의 한 허름한 농가에 들어가, 웬 할머니를 붙들고 "요 근방에, 김유정의 생가가 어디 있지요?" 하고 우문을 던졌다가 "김유정이 대체 누군고?"라는 할머니의 눈 먼 대답만 듣고 쫓겨 나왔다. 용달차 운전석에 앉아 있는 어떤 젊은이에게 되묻자, 그는 다시 돌아나가라 했고, 그가 알려준 길로 걸어 올라가니, 이번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마을 아저씨 둘이 다시 왔던 길로 올라가라 해서 똑같은 길을 몇 번 왕복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그렇게 몇 사람을 거치고, 이 집 저 집을 탐문하고서야 간신히 실레 마을의 윤곽을 잡아 나갈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같은 자조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몇 호 되지 않아 보이는 마을 집의 대문들은 서울 담장처럼 꼭꼭 안으로 잠겨진 채 인적이 좀처럼 없었고, 예전의 유정이 태어나고 머물렀던 집터에는 파란 기와의 양옥집이 들어선 채, 마당 안에 풀어둔 예닐곱 마리의 개들만이 컹컹 낯선 방문객을 경계하였다. 유정이 이곳에서 야학을 꾸리던 시절에 대해 증언해 줄 수 있는 나이 든 제자의 거처를 물어 물어 찾아갔으나, 그는 노환으로 춘천 시립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온 외지인이 나뿐만 아니었던 듯, 그 노인의 아들은 창문 너머로 "저기저 파란 기와집 터에서 형이랑 살았다지요"하고 다소 피곤한 어조로 몇 마디 응해줄 뿐이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았다 싶다.
마을을 병풍처럼 에워싼 금병산이 저 너머에서 어슴푸레하다. 「봄봄」에서 나오는 욕필 영감(원래 이름은 봉필이었으나 욕을 잘하여 욕필이라 불렀다)네 집터와 밭이 있다는 잣나무 숲이 그 언저리에 있다 하나, 위치를 짐작할 길 없다. 「산골 나그네」의 주막집, 즉 돌쇠네 집도 여전히 남아 있긴 한데, 물론 그 형체는 몇 번 개축하여 현대식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까닭에 옛 자취는 상상으로만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실레 마을은 분명 김유정 문학의 산실이고, 「봄봄」의 욕필 영감, 「동백꽃」의 점순이, 「산골 나그네」의 들병이 등 김유정 소설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이 모두 이곳에서 채취되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안내문조차 없는 것에 문득 안타까운 심정이 앞선다. 마치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대형 안내판처럼 김유정 유적지 입간판 옆에 '김유정 문학의 현장'이라는 제목으로, 마을의 요소요소에 깃든 소설의 현장, 「동백꽃」과「만무방」의 무대인 금병산과 주막집과 물레방아, 산들주막집을 안내해 놓은 그림지도와 설명문이 갖춰져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닦아내듯, 어떻게 빛을 내느냐에 따라 실레 마을은 문화 마을로 탈바꿈이 가능할 터이다. 물론 이를 나의 지나친 욕심이라고 몰아붙인다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한 요절 작가에 대해 사후 그 정도의 대접도 못해 줄 것인가.
2.
조선조 효종 때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10대손이자 서울에도 1백여 칸의 집을 지닌 춘천 천석지기의 막내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을 때만 해도 유정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유복한 자손이었다. 장남 유근 뒤에 내리 딸만 다섯을 낳다가 얻은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출생은 집안의 경사였고, 온 식구의 귀염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아명도 멱설이. 명이 길라고 부모가 붙여 준 이름이었다(누나 유경씨에 의하면 유정은 사실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났으나 이곳 실레 마을에 적을 올렸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행복했던 멱설이의 유년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6살 때 어머니가 병사하고, 그 2년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유정의 생애에도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난봉꾼에다 괴팍한 성격의 맏형이 가계를 맡으면서 화목했던 집안은 급격히 기울어 갔는데 당시의 모습은 자전적 소설 「형」에 슬프고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심약하고 예민했던 그는 이때의 충격 때문인지 오랫동안 말더듬이 증상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나중에 눌언(訥言)교정소에 다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훗날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빠져든 배경에는 이러한 불우한 가정 환경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즉, 어려서 여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의 감정이 그로 하여금 연상의 여인에 대한 병적인 사랑으로 몰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우울하고 내성적인 그는 생애에 단 한 번도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말하자면 유정의 비극은 한때 부유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던 청년이 가난한 삶 속으로 추락하고, 건강마저 폐병에 의해 무너져 가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김유정의 절망과 궁핍의 한편에는 이렇듯 그의 불행한 가족사가 놓여 있었던 셈이다.
누나의 손에서 자라던 그가 실레 마을을 떠난 것은 12살 때. 서울의 제동 공립 보통학교를 거쳐 1923년 휘문고보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만난 단짝친구가 훗날 월북한 안회남이다. 김유정의 조카 김영수에 의하면, 휘문고보 시절의 유정은 바이올린 배우기, 아령, 축구, 스케이팅, 권투, 영화감상, 소설 읽기에 열중하느라 일기 쓸 틈도 없이 지냈으며, 하모니카 연주 실력이 뛰어난 소년이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이선영 교수는 '송깃송깃, 한들대는, 껍죽거리는, 간들대는'과 같은 의성어나 의태어를 적절히 활용한 뛰어난 리듬 감각이 생동하는 김유정 소설의 인물과 사건이 나온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하나, 학칙에 의해 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한 그는 다시 실레에 와서 한동안 집시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때 이미 형은 10년 방탕 끝에 천석지기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먼저 솔가하여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뒤에 이 맏형과 재산분쟁을 벌이면서 형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그는 이 시절, 형집에 머물지 않고 주막집을 드나들며, 들병이들과 어울려 지냈다고 하는데, 그가 자주 드나들었던 주막집은 현재도 그 터가 남아 있는 한들 주막집이다. 이때 들병이들과 어울린 경험이 바탕이 되어 「산골 나그네」,「총각과 맹꽁이」등이 쓰여졌다. 그런데 김윤식 교수는 김유정 문학의 출발점에 놓인 것이 이 '들병이 사상'임을 지적한 바 있다. '들병이'란 남편 있는 여인이 시골 주막으로 돌아다니며 술과 몸을 파는 것. 이 들병이에서 김유정이 이끌어낸 철학이 '자기 아내를 매음시켜 생계를 삼을 뿐만 아니라 즐기기조차 하는 남편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김교수는 이 '들병이 사상'이 구현된 작품으로 「총각과 맹꽁이」,「봄봄」,「동백꽃」,「두꺼비」를 꼽고 있는데 매우 시사적이다.
한편 유정은 매형의 권유에 의해 충청도 광업소(금광)에서 몇 달 동안 현장 감독을 한 적이 있는데, 「금따는 콩밭」,「금」에 나오는 영식, 수재, 최서방, 덕순이 등의 인물이 모두 그곳에서 만난 인간 군상들이다. 금점을 둘러싸고 횡재를 꿈꾸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그는 수없이 만났다. 그리고 고향인 실레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물골'에서는 사금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 개울 바닥은 온통 파헤쳐져 성한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체험에서 유정은 꿈을 찾아 헤매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을 통해서 횡재를 노리며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이 건강은 나날이 나빠져 갔다. 형과의 불화, 잦은 폭음이 그를 정신적·육체적으로 무너뜨려 가고 있었고 그의 몸 속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명적인 질병인 폐결핵이 자라나고 있었다.
1932년은 유정은 생애에서 가장 활발하고도 의욕적인 기간이었다. 조카인 김영수와 문우인 조명희 등과 함께 고향 실레에서 '농우회', '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 계몽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당시 유정 밑에서 공부했던 제자들이 지금까지도 실레에 생존해 있어, 그의 생전의 모습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다.
유정이 야학운동을 펼쳤던 그 금병의숙터 앞에 섰다. 금병의숙터는 실레에서 김유정의 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기념물이다. 지금은 현대식 마을회관 겸 예식장으로 둔갑하여 있는 터라, 바로 문 앞에 설치되어 있는 조그마한 기념돌을 통해서야 유정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예식장 옆에 세워진, 이제는 그 키가 제법 장성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것을 직접 심었던 김유정의 생전 자취를 묵묵히 떠올려주고 있다. 느티나무 옆으로, 한국문인협회와 모 방송국이 공동으로 정초한 표징물과 김유정 기적비(紀蹟碑)가 안쓰럽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의미를 후손들에게 알려 주는 인공 조형물들인 셈이다.
유정의 금병의숙 시절은 머지않아 막을 내린다. 형이 전재산을 팔아, 그 중의 일부를 그에게 나누어주는 식으로 해서 그를 다시 서울로 쫓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나 집에 얹혀 사는 서울 생활 속에서 그는 점점 비참하게 변해 갔다. 생활 관념이 부족한 그는 곧 빈털터리가 되었으며, 경제적인 곤궁과 울화와 폭음 속에서 점점 찌들어 갔다. 그가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을 바로 이때였다. 작품「따라지」에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나이가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왜 이리 할 일이 없는지 밤낮 방구석에 팔짱을 지르고 멍하니 앉아서는 얼이 빠졌다. 그렇지 않으면 이불을 뒤쓰고 줄창같이 낮잠이 아닌가. 햇볕을 못 봐서 얼굴이 누렇게 찌들었다. 경무과 제복 공장의 직공으로 다니는 제 누이의 월급으로 둘이 먹고지낸다. -「따라지」중에서
이 소설에서 나오는 '톨스토이'는 바로 김유정의 분신이기도 하다. '매캐한 방구석에서 열벙거지가 벌컥 오르면 뛰어 나와'(「심청」중에서) 하릴없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한 몰골로 거리를 헤매는 그는 거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가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유일한 돌파구로 찾아낸 것이 있으니, 바로 문학이었다. '요즘에 나는 헤매던 그 길을 바로 들었다. 전일 잃은 줄로 알고 헤매고 있었던 나는 요즘에야 비로소 나를 위하여 따로이 한 길이 옆에 있음을 알았다'(「길」중에서)고 그가 마침내 찾아낸 그 길, 그 길은 그가 젊은 날의 어둠과 고난과 실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찾아낸 비상구였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지존을 확인하려 했으며, 가난과 우울과 치욕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문학적 저력은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의 머리 속을 맴돌던 인물 형상들이 「소낙비」,「만무방」,「노다지」의 완성된 형태로 창작되어 나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가, 조선중앙일보에「노다지」가 차례로 당선되어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하게 된다. 이후 1937년 사망하기까지, 그는 30편 가까운 작품을 한꺼번에 써내며 창작열을 불태웠으니, '무지개처럼 나타났다가 무지개처럼 사라진 작가'라는 누군가의 표현이 걸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뒤늦게나마 헤매며 찾던 바로 그 길, 문학의 길을 찾아내었을 때, 이미 그의 몸 속에는 생명의 불꽃이 아스라이 꺼져 들어가고 있었다.
3.
엔간해서 술이 잘 안 취하는데 취하기만 하면 딴 사람이 되고 만다. 그것을 무엇을 보고 아느냐 하면……
보통으로 주먹을 쥐이고 쓱 둘째 손가락만 쪽펴면 사람 가리키는 신호가 되는데 이래 가지고는 그 벙거지 차양(遮陽) 밑을 우벼파면서 나사못 박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허릴없이 젖먹이 곤지곤지 형용에 틀림없다.
-이상의 「김유정」 중에서
이상이 쓴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1939)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을 보면 김유정의 취중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유정은 평상시엔 말이 없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문학토론에 열을 올리고 소리를 곧잘 뽑아냈다고 한다. 이상과 김유정이 구인회의 동인으로 만났고 둘 사이가 각별했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로다. 작품 세계는 달랐으나 모두 문학을 구원처럼 생각했으며, 폐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을 지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꼴의 인생이었다. 이상이 서울을 떠나 현해탄을 건너갈 때, 그 누구보다도 아쉬워하고 침울했던 이 또한 김유정이었다. 그리고 김유정이 절명하고, 그 한 달 뒤에 이상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 다 식민지의 황폐하고 우울한 삶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비극적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셈이다.
그들의 삶과 작품 배경은 모두 30년대의 식민지적 고통과 굴절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30년대의 그 어떤 작가도 그 고통에 찬 식민지살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제각기 불행했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풍자, 은유, 리얼리즘, 해학 등으로 각기 달랐는데, 가령, 염상섭, 채만식, 최서해 등이 당대의 식민지 백성이 짊어져야 했던 고통의 현실을 풍자 또는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그려냈다면, 김유정의 소설은 익살과 해학으로 일관되어 있다.
김유정 소설이 보여주는 독특한 해학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평가가 나와 있는데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 단순하고 소박하여 복잡하고 억압적인 당대의 현실과 거리가 있지 않느냐는, 즉 현실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김유정의 유머러스한 표현 방식과 위악적인 인물 묘사는 오히려 전통적인 판소리의 해학적 표현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1930년대 한국 민중의 생활과 감정과 관습을 깊이 이해하여 알맞은 언어감각과 제스처를 갖춰 작품화한 문학적 안목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이선영 교수는 반박한다.
특히 김유정의 작품 배경인 1933∼1937년은 그야말로 일제의 가혹한 수탈정책으로 말미암아, 대다수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곤궁과 피폐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소낙비」의 춘호, 「만부방」의 응칠이, 「금따는 콩밭」의 수재,「노다지」의 꽁보, 「땡볕」의 덕순이 부부 등은 이러한 시대에 자신의 고향에서 떠밀려 나와 유랑하는 하층 농민들이었다.
「소낙비」의 춘호가 아내를 매음으로 내모는 것은 그것이 삶을 유지하기 위한 막다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을 곱씹어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할만큼 막다르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 놓인 것이 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김유정은 이러한 현실의 비극을 경쾌한 가락과 토속적이면서도 해학적인 독특한 문체에 실어 웃음으로 뒤바꿔 놓는 역량을 보여준다. 그 자신이 가난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면서도 작품 속에서는 시종일관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삶과 당대의 현실을 대비해 본다면 그의 해학은 슬픔과 한을 총상처럼 안에 숨겨 두고 있는 고통의 해학이며, 그러므로 겉으로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웃음과 슬픔의 이중적 구조를 지닌 해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유정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풍부한 방언에 있다. 등장인물의 대화마다 드러나는 강원도 지방의 방언들, 순수한 우리 고유어, 여기에 보태어 '꾀송거리다, 나릿나릿, 버듬히, 설면설면, 시적시적' 같은 김유정만의 독특한 의성어, 의태어들이 작품마다 장관을 이룬다.
지난 1994년엔가, 국립국어연구원에서 김유정의 소설 31편에 실린 어휘를 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그의 소설에 나오는 토속적이고도 순수한 우리말 6백 11개가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우리말 큰사전」이나 「금성판 국어대사전」등에 실려있지 않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해방 전까지도 문학작품에 살아 있던 아름다운 우리 어휘들이 반세기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사전에서조차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문인어휘사전은 불가능하더라도 대사전에서라도 그 어휘들은 마땅히 부활되어야 할 것이다.
4.
1936년, 폐병이 더욱 악화된 까닭에 김유정은 정릉에 있는 암자로 거처를 옮겨 요양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유정은 줄기차게 글을 썼다. 그 해에 발표된 작품 연표만 봐도 「동백꽃」,「야앵」,「정조」,「가을」,「심청」,「봄과 따라지」,「두꺼비」,「이런 음악회」…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겨진「생의 반려」가 있다. 그는 나날이 수척해 갔으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펜을 놓으려 하지 않으며 생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다. 그가 숨지기 열흘 전 안회남에게 쓴 편지에 그의 삶에 대한 집착과 갈구가 구구절절 깃들어 있다.
형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다시 살아날 것이다. -김유정의 편지 중에서
그러나 닭 30마리를 고아 먹고 싶다는 유정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37년 3월 28일 새벽 6시, 김유정은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매형 유씨 집에서 고통에 가득한 생애의 마지막 숨을 놓았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그리고 춘천 시내 가까운 의암에 '김유정 문인비'가 세워진 것이 1968년, 그가 죽은지 31년 뒤였다.
필자의 기억으론, 1994년도 3월의 '이 달의 문화인물'은 김유정이다. 그때 춘천 지역의 뜻 있는 인사들이 유정의 생가터 뒤편으로 보이는 금병산에 김유정 문학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3천 평의 땅까지 기증 받았다는 기사를 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산 부족인지 그 이후론 흐지부지되고 만 모양이다. 춘천 방송국에서도 이곳을 취재해 갔고, 일간지에서 기자들이 한 번씩 이곳을 다녀갔다 하나, 지나고 나면 그뿐이니, 전시 행정의 한 표본을 여기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일과성 행사처럼 그때 반짝, 이곳 실레 마을도 주목을 받았을 것이고, 외지인의 발길도 잠시 번다했을 것이나, 조명이 비껴 지나가면 깜깜해지듯 도로 잠잠해지고 만 것이 그 증거다. 10년 이상 김유정의 발자취를 조사해 온 강원대 교수이자 소설가인 전상국씨가 푯말이라도 세우자고 관계 기관에 요청했으나 헛일이었고, 언젠가 생가 앞에 누군가 개인 돈으로 푯말을 만들어 세웠지만 뽑혀져 버렸다는 믿지 못할 소리도 풍문으로 들려 온다.
김유정처럼 폐병에 시달리다가 그보다 한달 늦게 세상을 떠난 이상, 역시 폐병을 앓다가 20대의 반도 못 채우고 간 나도향, 시인 남궁벽 그 외에도 이장희, 백신애, 김소월, 최서해, 심훈 등이 모두 30대 초반에 창작의 불꽃을 꺼뜨려야 했던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해 주는 독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내보낸 고향은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국문학 교실의 한 문헌에나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국문학사에서는 아예 그 이름이 매장되다시피 한 작가들도 있지만, 이름이 화려해도 막상 그만큼의 대접을 못 받는 작가들도 많다. 그런데 그것이 요절 문인일 경우에는 남다른 안타까움이 그 이름 위에 머물게 된다. 유정과 같이 우리 앞에 무지개처럼 왔다가 사라진 작가의 경우는 더더욱. 고향 사람들의 기억 속에 「소낙비」의 작가, 김유정은 외지인이 흔들고 가는 바람 정도의 의미로 자리잡고 있는가. 그리하여 김유정의 슬프고 억울했던 생애는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는가. 피부로 느끼는 이 을씨년스러움이 쌀쌀한 봄날씨가 가져다주는 계절감에 불과하기를 기원하며 필자는 힘겹게 발길을 서울로 돌렸다.
첫댓글 송연형, 잘 읽었습니다. 감상문을 쓰면 좋겠는데 어제도 시간을 못내고 오늘도 희망없고 내일이나 모레는 시간이 날런저... 김유정 작품집도 있고 사진도 볼수 있답니다. 둘째 누나와 조카와 찍은 사진과 휘문고보시절 사진이 보이네요. 나중에 대구 사랑방에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