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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커진다 – 맥스 루케이도
*우주의 중심을 보실 때 하나님은 당신을 보시지 않는다. 하늘의
무대 연출자가 극의 스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때 나는 선글라스가 필요 없다. 조명은 나한테 쏟아지지 않는다.
하위 행성, 그게 우리다. 아낌과 귀히 여김, 극진한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중심? 핵심적 존재? 중추? 미안하지만 아니다. 우리 안의 프톨레마이오스와는 반대로, 세상은 우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우리의 호강은 하나님의 최우선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만일 본무대가 우리 몫이라면 "지구는 평평하다"고 외쳐대는 죽음, 질병, 경제 불황, 지진 따위의 도전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즐겁게 하려고 존재하신다면 우리는 늘 즐거워야 옳지 않은가?
우리에게도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나? 어쩌면 우리 자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떠받들려 존재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그분을 떠받들려 존재한다. 중요한 건 당신이 아니다. 나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분이다.
달이 우리의 좋은 모델이다.
달이 하는 일은? 달은 빛을 생성하지 못한다. 노래가사와 달리 중추절의 보름달은 광명이 없다. 태양 없는 달은 칠흑같이 캄캄한 곰보 암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리만 잘 잡으면 달은 빛난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한낱 흙덩이가 영감과 로맨스의 확실한 근원이 된다. 달은 더 큰 광명을 반사한다. 그리고 달은 그것으로 행복해 한다! 달의 불평은 금시초문이다. 조수(潮水)를 일으키면서도 달은 법석을 떨지 않는다. 토끼가 떡방아를 찧든 우주비행사가 착륙을 하든 달은 군말이 없다. 일광욕은 괜찮고 달밤의 체조는 흉이 되어도 달은 투덜댈줄 모른다. 달은 제자리에서 평화롭다. 그렇기에 그 조요한 빛이 캄캄한 지구에 닿는 것이다.
우리가 제 자리를 받아들여 아들의 반사체로 산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그런 전환은 좀처럼 쉽지 않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발을 쿵쿵 구르며 자기 방식을 고집했다. 우리는 다 이기적 충동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던가.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해줄 배우자, 항상 내 의견을 묻는 직장동료들을 원한다. 나한테 딱맞는 날씨, 나한테 유리한 교통상황, 나를 떠받드는 정부는 말할 것도 없다. 중요한건 나다. "세상의 중심에 선 남자를 위하여"라는 광고 문안에 우리는 솔깃해진다. 한 유명 여배우는 포르노 잡지에 실리면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로 그것을 정당화했다.
자화자찬, 자기보호, 자기중심. 중요한 건 나다!
다들 우리한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중심인물 자리를 노리라고, 태양의 위치에 서라고, 제 이름을 내라고, 다들 그렇게 배우지 않았던가. 우리는 자기를 떠받들며 살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철학은 아수라장을 부른다. 교향악단이 그런 식으로 한다면 어찌될까? "중요한 건 나다"는 태도를 가진 오케스트라를 상상할 수 있는가? 연주자마다 자기표현을 요구하며 아우성이다. 튜바 주자는 논스톱으로 분다. 타악기 주자는 시선을 끌려고 쳐댄다. 첼로주자는 무대 중앙부의자에서 플루트 주자를 밀쳐낸다. 트럼펫주자는 지휘자 자리에 올라서서 불어 댄다. 악보 무시, 지휘 무시, 끝없는 튜닝밖에 무엇이 남겠는가?
화음? 어렵다.
행복? 이런 악단에 속한 뮤지션들이 행복할까? 어림도 없다.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며 즐거울사람이 있을까?
당신은 아니다. 누구도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라고 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죄를 짓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제자리에 들어가 제 몫을 다한다면 어떻게 될까? 명지휘자에게 받은 악보대로 연주한다면? 그분의 노래를 우리의 최우선
으로 삼는다면?
가정에 변화가 보이지 않을까? 변화가 생길 것이 틀림없다. "내 뜻대로 할거야!"는 줄고 "하나님은 무얼 원하실까?"는 늘 것이다.
사업가가 그렇게 한다면 어찌될까? 돈과 명예의 목표는 밀려날 것이다. 하나님을 반사하는 삶이 전면에 부각될 것이다.
또 당신의 몸은? 프톨레마이오스식 사고는 "내 몸 가지고 내가 즐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사고는 "내 몸은 하나님 것이니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난도 다르게 볼 것이다. "내 고통은 하나님의 부재를 입증한다"가 "내 고통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펼친다"로 대치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건강한 전환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제 자리를 받아들일 때 삶은 의미를 찾는다. 즐거움의 선물도 고통의 뜻도 모두 그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통한다.
그리고 통하지 않는 삶에서 우리를 건져 준다.
하지만 전환의 방법은? 어떻게 우리는 삶의 중심에서 내려올 수 있나? 세미나에 참석하고, 달을 보며 짖고, 책을 읽으면 되나? 다 아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 가려면 그분을 생각해야 한다. 그분을 목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면 된다.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그분을 볼 때 우리는 변화된다. 그 변화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번 해보자. 누가 아는가? 우리는 우주의 제 자리를 발견할지도모른다.
*"주의 광채를 보여주십시오." 모세는 기도한다. "심장을 멎게 하고 지축을 뒤흔드는 주의 위용과 수려한 장관을 보고 싶습니다. 돈과 힘은 없어도 좋습니다. 청춘도 개의치 마십시오. 늙어가는 몸으로는 살수있어도 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더 원합니다. 주의 영광을 더 보고 싶습니다."
모세는 왜 하나님의 위엄을 보려 했을까?
비슷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라. 당신은 왜 석양을 바라보며, 왜 여름날 밤하늘 아래서 생각에 잠기나? 왜 가랑비 속에서 무지개를 찾고 그랜드캐니언에서 눈을 떼지 못하나? 왜 태평양 파도에 도취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넋을 잃나? 이런 경관에 매료되는 우리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름다움? 맞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그 누구를 가리키지 않는가? 망망대해는 무한한 창조주를 일깨우지 않는가? 이주하는 두루미와 철갑상어는 그 누군가의 수려한 지성을 암시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닌가? 아름다운 조물주, 무한한 창조주, 새들을 거느리고 물고기에게 명하실 만큼 능하신 하나님 말이다.
"하나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모세는 애원한다. 은행 따위는 소용없다. 그는 정부의 금보관소가 보고 싶다. 하나님의 재물 창고 안을 걸어야 한다. 주의 힘으로 저를 기절시키시고 주의 지혜로 저를 마비시키소서. 주의 입김으로 제 숨이 멎게 하소서. 은혜의 폭포수 물안개 속에 잠시만 있게 하소서. 하나님, 주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보게 하소서. 이것이 모세의 기도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이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 이것이 빽빽해지자 너무 놀라 똑바로 설 수 없었다.
에스겔은 이것을 보고 엎드려야 했다.
이것은 천사들을 에워쌌고 베들레헴 목장의 목자들에게 두루 비취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발하셨다.
요한은 이것을 보았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이것을 목격했다.
그리스도는 이것의 왕으로 다시 오신다.
천국은 이것으로 환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심해 속을 흐른다. 모든 삶을 변화시킬 잠재력을 안고 모든 인간을 만진다.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단 한번만 보고 한번만 맛보고 한번만 체험해도 당신의 믿음은 영원히 달라진다.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주의 임재가 사방에 빽빽하게 하소서. 주의 위엄으로 대기를 촉촉하게 하소서. 하늘의 휘장을 가르시고 주의 성품을 쏟으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이소서.“
유럽의 산맥이 알프스라면 하나님의 속성은 영광이다. 알프스는 계곡, 봉우리, 낙엽, 뛰노는 고라니 등 무수한 아름다움을 아우른다. 알프스를 보겠다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다 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다는 것은 그분의 전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그분의 모든 속성이 그 무게만큼 에누리 없이 담겨 있다. 그분의 사랑, 성품, 능력 등등.
*하늘은 왜 존재하는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려 존재한다(시 19:1).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나? 이사야를 통해 그분은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부르셨다(사 43:7).
사람들이 왜 고난당하는가?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사 48:10-11).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그분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21).
선지자 이사야는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라고 선포했다(사 63:14).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성을 기도의 최우선으로 삼도록 가르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9).
천국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도 그랬다. 사실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다(히 1:3)”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셨음을 이런 말로 선포하셨
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4).
하나님의 목표는 하나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뜻밖인가? 감히 말한다면 이는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아닌가?
우리는 이런 행동을 "자화자찬" 이라 하지 않던가? 하나님은 왜 자신을 선전하실까?
구명보트 선장이 자신을 선전하는 이유와 똑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 당신은 어둡고 차가운 바다에 목까지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배는 가라앉고 있다. 구명조끼는 바람이 빠지고 있다. 힘은 떨어져 간다. 이때 캄캄한 밤을 뚫고 구명보트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보이지는 않는다. 당신은 구명보트 선장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조용히 입을 꾹 다물기를? 익사하는 승객들 사이를 쥐 죽은 듯 지나가기를? 말도 안된다! 당신은 큰 음량이 필요하다! 그대여 소리를키우라 성경의 표현으로, 당신은 그가 자기 영광을 보이기 원한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힘이 있다. 여기 당신의 자리가 있다. 나는 당신을 구할 수 있다!"는 그의 말소리가 들려야 한다. 익사하는 승객들이 원하는 것은 선장이 자신의 수려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도 똑같이 하시기를 우리는 원치 않는가? 주변을 둘러보라. 사람들은 죄책과 분노와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삶은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실 수 있다. 중요한 메시지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분의 메시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께 자존심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영광을 드러내시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위해 그분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강한 손이 우리를 안전한 보트로 끌어올려야한다.
일단 배에 오르면 무엇이 우리의 최우선이 될까?
간단하다. 하나님을 선전하는 것이다.
* "보라! 여기 튼튼한 보트가 있다! 유능한 선장이 있다!
그분은 당신을 끌어올릴 수 있다!"
승객들은 선장을 선전한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시 115:1). 자랑할진대 우리는 "주 안에서 자랑" 한다(고후 10:17).
이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 당신에게 호흡이 주어진 이유는 하나다. 한순간 더 "주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이다(고후 3:18, NIV). 하나님이 오늘 아침 당신과 나를 깨우신 목적도 하나다. "그 영광을 열방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대상 16:24).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롬 11:3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고전 8:6).
지구가 자전하는 이유는? 그분을 위해서다.
당신에게 재능과 능력이 있는 이유는? 그분을 위해서다.
당신이 돈이 있거나 혹 가난한 이유는? 그분을 위해서다.
힘이나 고난도? 그분을 위해서다.
만유와 만인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도 포함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분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나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2-5).
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 스랍들이 한 단어를 끝없이 삼창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히브리어의 반복은 우리의 고딕체에 해당한다. 강조의 도구다. 여섯 날개 천사들은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선포한 게 아니다. 그분은 거룩하고 거룩하신 분도 아니다. 그분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분이다.
이렇게 강조되는 속성이 또 있던가? 하나님을 "지혜롭다. 지혜롭다. 지혜롭다든지 "능하시다. 능하시다. 능하시다"고 묘사한 구절은 하나도 없다. 오직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집중적 주목을 요한다. 다른 모든 형용사를 합한 것보다 이 형용사가 그분의 이름을 더 많이 수식해 준다. 성경 최초의 노래와 최후의 노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미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후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1). 요한계시록도 짐승과 싸워 이긴 사람들의 노래가 나온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15:4).
히브리어로 거룩하다는 말의 가도시(qadosh)는 '떼어내다, 분리하다'는 뜻이 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은 '타자'(他)다. 유일무이하신 분이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세상과 다르다.
*사방의 우주를 생각해 보라. 기존의 것을 취하여 다시 빚는 도예공과 달리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지으셨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절대적 명령으로 무에서 창조하셨다. 그분은 미리 존재하거나 영원히 공존하는 재료에 의존하지 않으셨다. 창조 전의 우주는 어두운 공간이 아니었다. 우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두움도 하나님이 지으셨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사 45:7). 요한은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선포했다(계 4:11).
우주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고, 그 능력을 상류까지 따라가면 다시 그분의 지혜가 나온다. 하나님의 전지성이 전능성을 지배한다. 무한한 지식이 무한한 힘을 다스린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욥9:4).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욥 12:13).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 지능이 무궁하사" (욥36:5).
그분의 능력은 변덕스럽거나 부주의하지 않다. 정반대다. 그분은 능력에 필적하는 지혜로 능력을 관장하신다.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당신에 대한 그분의 지식은 우주에 대한 지식만큼 완전하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4,16).
당신과 나의 시야를 가리는 휘장도 하나님의 시야는 가리지 못한다. 입 밖에 나지 않은 말도 이미 발설한 것과 같다. 가려진 생각도 마치 광고된 것과 같다. 닥쳐올 순간도 지난 역사와 같다. 그분은 미래와 과거를 아신다. 숨겨진 부분과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아신
다. 그분께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며 어
디에나 계신다.
다윗 왕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고 경탄했다(시 139:7). 하나님은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우리를 일깨우신다(렘 23:23-24).
'거룩한 타자' 이신 하나님이 보이는가? 이사야의 알현 장면을 보면, 그분을 가장 선명히 보는 자들이 그분을 가장 높이 받든다. 그분은 죄 없는 스랍들이 감히 우러를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신 분이다. 스랍들은 날개로 얼굴을 가린다. 이상하게 그들은 발도 가린다. 왜? 히브리어는 발에 해당하는 단어와 생식기에 해당하는 단어가 같다.' 외람된 생각이라면 용서하기 바란다. 하지만 천사들의 고백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는 자기들이 절대 무력한 존재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 곧 영원하신 존재로 자처하셨다. 자신을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시는 분과 동일시하신 것이다(사 57:15).
성경은 이 속성을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선전한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계셨고(시 93:2). "영원한 왕"이시고(렘 10:10), "썩어지지 아니하고(롬 1:23),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딤전6:16). 천지는 없어져도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다(시 102:27). 하나님의 존재를 측량하느니 바닷가 모래알을 세는게 빠를 것이다. "(하나님의] 수를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욥36:26).
나무를 거슬러 올라가면 씨가 나온다. 옷을 거슬러 올라가면 공장이 나온다. 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가 나온다. 하나님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도 하나님을 지으시지 않았다.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사 43:13). 그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8:58)는 예수님 말씀이 나온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절대 "내가 있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지금도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로 지금 아브라함 시대에 계시며 또 말세에 계신다. 그분은 영원하시다. 그분은 일렬로 늘어선 순간들을 순차적으로 사시지 않는다. 그분의 세계는 한순간이다. 아니 순간이 없다고 해야 맞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말한다. "인생은 짧다. 견뎌라"
짤막한 인생은 도피할 구실이 아니라 지속할 능력을 준다. 세월이 덧없다고 문제에서 도망쳐도 되는 것은 아니다. 덧없는 세월은 오히려 우리에게 문제를 견딜 힘을 준다. 당신의 문제는 사라질까? 보장이 없다. 당신의 고통은 끝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천국은 이 약속을 준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
"영광의 중한 것"이라는 말은 고대 접시저울을 연상시킨다. 눈가리개를 쓰고 있는 정의의 여신이 생각나는가? 그녀는 접시저울을 들고 있다. 접시는 양쪽에 하나씩 두 개다. 한쪽 접시에 물건을 놓고 한쪽 접시에 추를 놓아 물건의 무게를 단다.
당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도 그리하신다. 그분은 한쪽에 당신의 모든 짐을 쌓으신다. 빈곤, 해고, 당신을 잊어버린 부모. 당신을 무시한 직장상사. 실패. 건강 악화, 나쁜 일진. 모두 쌓으라. 한쪽 접시가 푹 가라앉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반응을 보라. 그분은 고난을 치우시나? 짐을 없애시나? 아니다. 짐을 제하시지 않고 상쇄하신다. 한쪽 접시에 영원한 영광의 추를 놓으신다. 끝없는 기쁨. 무궁한 평안, 영원하신 그분. 당신의 저울에 그분이 영원을 두시자 어떻게 되나 보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짐이 쑥 올라간다. 영원과 마주 달자 무겁던 것이 가벼워진다. 삶이 "잠깐"일진대 어떤 도전이든 우리는 잠깐만 견딜 수 없나?
우리는 잠깐만 아플 수 있다.
우리는 잠깐만 외로울 수 있다.
우리는 잠깐만 핍박당할 수 있다.
우리는 잠깐만 고생할 수 있다.
그럴 수 없나?
우리는 평안을 기다릴 수 없나?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절대 지금도 아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하나님? 그런 일은 없다. 그분의 은혜가 바닥날까봐 두려운가? 정어리 한 마리가 대서양 물을 다 삼키는 편이 더 빠르다. 그분이 당신을 포기하신 것 같은가? 불렀다. 그분은 당신에게 약속하시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민23:19). 그분은 토라지거나 삐딱해지거나 심통을 부리거나 저기압이 되는 법이 없다. 그분의 힘과 진리와 길과 사랑은 영원불변하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13:8). 그런 분이시기에 주님은 "너의 시대에 평안함[안전]"이 되신다(사 33:6). …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변치 않는다. 훤히 다 아시고 계획하시기
때문이다. 예보의 확률이 다 뭔가. 그분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
신다(사 46:10). 그 무엇도 그분의 허를 찌르지 못한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시 33:11).
십자가는 위력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는 힘이 다하지 않는다. 천국은 교량 붕괴를 발표할 일이 없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실 일이 없다. "하나님이 때가 되어 행하시는 일은 이미 영원 전에 계획하신 일이다. 영원 전에 계획하신 모든 일을 그분은 때가 되면 이루신다."1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사 14:27). 하나님은 절대변치 않는다. 사람은 다 변한다. 세상도 다 변한다.
*그날부터 하나님은 나를 쿡쿡 찔러 물러나게 하신다.
공감이 안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조명에 끌리지 않는다. 당신과 세례 요한은 같은 노래를 부른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3:30). 하나님의 축복이다. 당신은 나머지 우리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우리 박수 중독자들은 다 해 보았다. 명사들의 이름을 들먹였고, 큰소리로 노래했고, 지체 높게 보이려 차려입었고, 유행에 맞추려 허름하게 입었고, 읽지도 않은 책들을 인용했고, 배우지도 않은 헬라어를 쏟아냈다. 아무래도 사탄은 우리 귀에 이 하나의 질문을 속삭이도록 귀신들 대부대를 훈련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니?"
치명적인 질문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시지 않는다(사 42:8). 다음에 혹 그분이 당신을 쿡쿡 찌르셔서 조명에서 비켜나야 할 일이 생기거든 이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사슬의 한고리, 그것도 중요하지 않은 고리일 뿐이다.
수긍이 안되나? 사도에게 가보라.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중요하지 않되, NCV]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하나님께 쓰임 받은 다른 메신저들이 기억나는가?
발람에게 말한 건 나귀였다(민 22:28).
바로를 들쑤신 건 뱀이 된 지팡이였다(출 7:10).
그분은 우직한 소를 통해 경외심을 가르치셨고, 큰 물고기를 통해 설교자들의 반항을 지적하셨다(삼상 6:1-12, 욘 1:1-17).
하나님은 당신과 내가 없어도 일하실 수 있다. 우리가 쓸모 있는 메신저와 대사가 된 것은 그분의 은혜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아니다. 중요한 게 나라는 생각은 그분을 노하게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작품을 가리는 화랑 가이드들에게 무섭게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2).
조랑말 속달우편 기수들은 정겨운 서신들의 공로를 취하지 않았다. 화랑 가이드들은 명작에 대해 박수받을 자격이 없다.
복음을 부탁받은 우리도 감히 박수를 구하지 않는다. 박수에서 비껴남이 마땅하다. 우리 메시지에서 중요한 분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 "예수"의 신학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많이 믿는다. 단 오직 그리스도만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율법주의를 무해하다고 일축하려는 마음이 있다. 어쨌든 율법주의자들은 훌륭해 보인다. 그들은 경건하게 행동한다. 도덕성과 단정함과 바른 생활을 옹호한다. 저들의 가르침에 해로운 점이 있나?
바울은 목청 높여 "그렇다"고 답한다.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어조는 신랄하기 짝이 없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빌 3:2). 아니, 이 무슨 불관용의 표현인가, "행악"에다 "개" 라니. "손할례당"이라니. 이는 "몸을 베기를 요구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왜 이빨을 드러낼까? 왜 필치가 과격할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맨주먹을 휘두른 적이 없는 바울이다. 간음을 배격한 그였지만 외도하는 자들에게 욕을 퍼붓지는 않았다. 동성애를 용납하지 않는 그였지만 게이 집단에게 말의 화염을 뿜지는 않았다. 술취하지 말라고 설교한 그였지만 술꾼들을 "개"라고 부른 적이 있던가?
이 정도는 화난 것도 아니다. 그가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랐는지 보라.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5:12).
왜 이리 살벌한가? 율법주의자들에게 왜 이리 가혹한가? 간단하다. 자력구원은 인간의 문제를 가볍게 여긴다. …
정확히 바울의 요지다. 당신과 하나님을 갈라놓고 있는 것은 100미터 깊이의 바닷물이 아니라 결함과 죄의 불가항력적인 홍수다. 당신의 도덕적 근육으로 이 배를 수면으로 밀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세례와 주일 성수로 자신을 족히 구원할 것 같은가?
율법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문제의 중력을 못 본다. 그래서 거들고 나선다. 하지만 이는 죄를 가볍게 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우롱하는 처사다.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이렇게 말하나? "예수님, 큰일 하셨습니다. 다 이루시지 못해 유감입니다만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최고 사역에 이의를 제기한단 말인가? 내 도움이 있어야 천국의 구원 사역이 가능하다고 감히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 우리는 해저에 처박혀 있다. 일광조차 볼 수 없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무시하며 그 결과 우리를 망쳐 놓는다.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이렇게 말하냐? "예수님
큰일 하셨습니다. 다 이루시지 못해 유감입니다만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최고 사역에 이의를 제기한단 말인가? 내
도움이 있어야 천국의 구원 사역이 가능하다고 감히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 우리는 해저에 처박혀 있다. 일광조차 볼 수 없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무시하며 그 결과 우리를 망쳐 놓는다. 천국을 얻어내려는 자에게 바울은 묻는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의 복(기쁨)이 지금 어디 있느냐" (갈4:9,15).
율법주의에는 기쁨이 없다. 율법주의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수강할 과목이 또 있고 교육할 사람이 또 있고 먹일 입이 또 있다. 자력 구원에 갇힌 수감자들은 일만 많지 기쁨은 없다. 얼마나 해야 다 한건지 절대 알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 율법주의는 기쁨을 걸러낸다.
그러나 은혜는 평안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인은 완성된 일을 믿는다. "율법을 지키려는 몸부림은 끝났다. 율법주의의 극기와 금욕도 끝났다. 할 것 다 하고도 여전히 미달인 듯한 불안도 끝났다.
우리는 계단이 아니라 승강기로 목표점에 이른다... 자신을 구원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약속된 의를 보장하신다. "
은혜는 쉼을 준다. 율법주의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율법주의에 사족을 못쓰나?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잠28:26). 왜 우리는 자기를 믿나? 왜 하나님의 완성된 일에 뭘 보태나? 그 답에 자랑이라는 말이 들어갈 것 같다. …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 자리를 얻을 수 없다. 행여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메시지를 놓친 것이다. 바울은 묻는다. "그런즉 자랑할데가 어디뇨" (롬 3:27). 정말 뭐가 있나? 당신이 기여한 게 뭔가? 전적인 타락을 인정한 것 외에 나는 단 하나도 생각해낼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전 1:30). 구원의 영광은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구원하신 분께 돌아간다.
*당신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를 선전한다. 당신의 공로는 하나도 없고 전적으로 그분의 공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5).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유대인을 구원하신 이유와 똑같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9-11).
이 구원에 당신이 뭔가 더해도 되나? 아니다. 일은 끝났다.
이 구원을 당신이 얻어 낼 수 있나? 아니다. 시도조차 하지 말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이 구원을 두고 감히 우리는 제 자랑을 할 것인가? 천만의 말이다. 칭송받을 자는 거지가 아니라 빵을 준이다.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고전 1:31).
중요한 건 우리의 행위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분이 하신 일이다.
*아니, 우리는 어찌 그럴 수 있나? 우리 몸에 관한 한 성경은 우리 것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당신의 몸으로 정욕을 탐닉할까? 남의 시선을 끌까? 성향을 표현할까? 아니다. 당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 지채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당신의 몸은 하나님의 도구다. 그분의 일과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부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몸에 관한 한 그들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 고집했다(고전 6:12). 육과 영을 편리하게 분리하는 철학이었다. 육으로는 재미를 보고 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토요일은 화끈하게, 일요일은 경건하게. 꿩 먹고 알 먹고 식이다.
바울은 달랐다. 그는 이분법을 거부했다. 하나님이 몸과 영을 하나로 엮어 동등한 지위로 격상시키셨음을 그는 독자들에게 지적했다. 당신의 몸은 장난감이 아니다. 정반대다. 당신의 몸은 도구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5). …
당신의 몸, 하나님의 도구다. 정비하라.
당신의 몸, 하나님의 성전이다. 존중하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20).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쳐다볼 만큼 하나님의 집을 그렇게 관리하라. 그들은 물을 것이다. "저 집에 누가 살지?" 그들이 대답을 들을 때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신다.
* 이런 비극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그들도 그들이지만 당신의 비극은 또 어찌 설명할 것인가? 가정의 긴장, 직장의 부담. 책상에 쌓인 고지서, 몸속의 종양. 당신은 포로로 잡히지는 않았어도 이따금씩 하나님의 침묵에 곤혹스럽지 않나? 당신이 당하고 있는 일을 그분은 아신다. 이를 어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이 실수하신 걸까? 그분이 안 보고 계실 때 당신의 DNA 속에 암세포가 파고들었다. 그분은 캔자스의 돌풍에 몰두하신 나머지 우간다의 기근은 잊으셨다. 그분은 당신 남편의 고집을 꺾으려 했으나 힘이 부치셨다. 우리 솔직해지자. 창조주가 실수하신다 조물주가 방심하신다? 성경에 그런 시각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어디 있나? 자연 속에 무슨 증거가 있나? 천지를 지으신 분이 교통지옥을 처리하실 수 없고 불행한 결혼을 막으실 수 없나? 물론 있다. 그런데 왜 안 하시나?
어쩌면 그분은 화가 나셨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행 구좌에서 자비를 바닥내서 기도마다 부도수표로 돌아오는 건 아닐까? 인류가 수천 년 전에 선을 넘어 지금 우리가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주장도 약간 일리는 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가 미련한 결정의 결과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
보상에 비하면 고난의 시절은 작은 직무다.
당신의 문제를 못마땅해 하기보다는 탐색하라. 숙고하라. 무엇보다. 그것을 사용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
마틴과 그라시아(필리핀 선교중 남편은 총상을 입고 죽었다.아내도 총상을 입었다.)는 그랬다. 잡혀 있는 동안 그들은 예수님을 전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았다. 불평하지 않았다. 본분을 다했고 그 이상을 자청했다. 밤마다 감시병에게 사슬로 묶여서도 마틴은 늘 범인들에게 밤 인사를 건네며 예수님 얘기를 해주었다. 번햄 부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의 고난을 사용하시게 해드렸다.
마틴의 죽음 때문에 온 세상 나라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들었다. 나는 그 소식을 영국 런던에서 뉴스 채널로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아내의 의연한 모습을 보았고, 마틴의 아버지와의 감동적인 인터뷰를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어려움을 이겨 내게 해주실 거라고 말했다. 모든 주요 방송이 목숨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던 한 남자의 사연에 소중한 시간을 할애했다.
번햄 부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났다.
마틴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났다.
당신과 나의 문제를 통해서도 그분이 드러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