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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카페 게시글
⊙.....카페 도서관 스크랩 나의 문학의 길 / 위화
백현 추천 0 조회 59 12.01.17 04:03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나의 문학의 길


위화


이런 거창한 제목은 좀 허장성세일지도 모르지만, 내 삶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글쓰기를 해온 과정을 소개해볼까 한다. 문학의 길은 내 인생의 길이기도 하다.

 

  나는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발치사였다. 그때 소설을 쓰고자 마음먹은 이유는 발치사를 그만두고 문화관(대중들의 문화 활동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된 기구)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문화관 사람들은 매일 출근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 점에 끌린 것 같다. 당시 문화관에 들어갈 방법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그림을 배우는 것, 둘째는 작곡을 배우는 것이었는데, 이 두 가지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번거로웠다. 셋째가 소설을 쓰는 것이었고, 이건 도전해볼 만했다. 당시에 내가 아는 한자는 오륙천 자 정도였는데, 그 정도면 소설을 쓰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결과도 무척 순조로웠다. 가장 좋은 시기의 막차를 탄 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막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까지만 해도 문학 편집자들이 비교적 열심히 투고 원고를 읽었다.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지 이 년도 안 되어 나는 그 편집자들이 더 이상 투고 원고를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인들이 추천이라도 해야 한번 볼 둥 말 둥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문턱을 넘어서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좋은 시대를 타고난 셈이다. 그 당시는 막 ‘사인방’을 타도하고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몇 년 안 된 시점이라 모든 문학 간행물에 원고가 심각하게 부족했다.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이미 작품을 발표한 작가의 작품만으로는 수많은 문학 간행물을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야 했고, 나는 그 막차를 탔던 것이다. 이 년만 늦었어도 아마 여전히 이를 뽑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운명이 베푼 기회였으므로 나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처음 소설을 쓸 당시의 일들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첫 소설을 쓸 때는 소설 작법도 몰랐고, 인용부호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중학교에 다닐 때 작문을 해본 적은 있지만 인용부호를 써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글을 쓰는 데 인용부호를 쓸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인민문학』을 사서 읽었다. 아, 대화할 때 인용부호를 쓸 수 있구나, 심리를 묘사하거나 생각을 표현할 때도 인용부호를 쓰는구나. 그 다음엔 단락을 바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차례로 배웠다. 초기에 비교적 간결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 생각해보면 찾아봤던 책들에 쓰인 단어들이 간단했고, 작품도 비교적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내 글 쓰는 스타일은 무척 복잡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로부터 글쓰기의 역경이 시작되었다. 가장 곤란했던 것은 내가 당최 앉아 있질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내가 직면한 첫 번째 난관이었다. 우선 엉덩이와 의자 사이에 우정을 쌓고 오랜 기간에 걸쳐 그 우정을 유지해야 했다. 그 당시 갓 스물을 넘긴 청춘이었던 나는 다른 사람들이 밖에서 노는 걸 지켜보았다. 더없이 화창한 날, 나무에서는 새가 지저귀고 대로에는 차들이 내달리고 강에선 배가 떠가는데, 나는? 방 안에 처박혀 소설을 쓰고 있었다. 분명 엄청난 시련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단계를 넘어갔다.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 왜냐고? 계속 이를 뽑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의 쩍 벌린 입을 들여다보면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겠는가. 나는 직업을 바꿔야만 했다. 게다가 내 생각에 구강은 볼 만한 풍경이 제일 없는 곳이었다. 모든 사람의 구강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입속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랬고 죽을 때도 그대로일 터였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평생 구강에서 멀리 벗어날 방법을 짜내야 했기에.

 

  글쓰기 초기에 나를 매혹한 것은 문장이었다. 며칠에 걸쳐 글을 썼다. 이를 악물고 며칠 동안 써내려가다 문득 꽤 멋있게 쓰인 한두 구절을 발견했다. 지금 보면 아마도 형편없는 문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장이 나를 매혹했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보상으로 여겼다. 글쓰기 자체가 성실하게 노동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 이를 통해 글쓰기가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글쓰기에 관한 기억에서 최초의 흥분이었다. 그리고 미묘해서 표현하기 힘든 내용을 내가 문장으로 쓸 수 있다는 걸 발견하고 엄청난 힘을 얻었다. 그 이후부터는 천천히 써내려갔다. 나는 이야기를 제법 그럴싸하게 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나의 글쓰기에 대한 보상이었다. 처음에는 오자도 무척 많았는데 갈수록 적어졌다. 그렇게 천천히 글을 써나갔고 마침내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별」이 바로 그때 쓴 소설로, 나중에 『베이징문학』에 실렸다. 『베이징문학』은 나보고 베이징에 와서 원고를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나는 얼떨결에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가서 개고하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 이 일이 내 작은 고향 하이옌 현에서 엄청난 소동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곧 내가 천재이며 다시는 이를 뽑지 않을 테니 문화관으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놀고먹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이옌에서 작가란 그런 존재였다. 나는 내 시간을 스스로 지배했다. 작가의 유일한 장점은 자기 시간을 자신이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작가라고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회의에 가기로 해놓고 내일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왜냐고? 작가니까. 교수라면 그럴 수 없다. 참석하지 않으면 욕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라면 괜찮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갔다. 그렇게 지냈다.

 

  처음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을 느낄 때는 1980년이었다. 갓 스물을 넘긴 당시에 나는 닝보에서 이 뽑기 연수 과정에 다니고 있었다. 닝보에서 가르치는 이 뽑기 기술이 하이옌 같은 작은 도시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연수를 받을 때 소설 두 편을 읽었다. 하나는 『소설월보』에 실린 왕쩡치의 「수계」였다. 그걸 읽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어떻게 이런 소설이? 그것은 중국소설, 당대소설로 갓 발표된 작품이었다. 그리고 저장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최초로 국내에 소개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푸』(상, 하)을 보고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슨 『이즈의 무희』를 찾아 읽었다. 이 두 작품이 나에게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 년 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두 작품, 특히 야스나리의 소설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일정 기간 동안 나는 그에게 글쓰기를 배웠다. 말하자면 그는 최초의 스승인 셈이다. 쓰는 법을 배우고 싶으면 작품을 공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어떤 작품이 사람을 감동시키는지 알아보고 그런 작품을 시도해보라. 그 당시는 아직 상흔문학(문화대혁명 기간에 겪은 상처와 비극을 폭로한 작품들을 가리킨다)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즈의 무희』를 읽은 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 사람은 상처를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비난하지 않고 아주 부드럽고 온화하게. 나는 삼 년 정도, 아니 더 오랫동안 야스나리의 작품에 미련을 두었다. 그래서 야스나리의 거의 모든 책을 사서 읽었다. 내가 유일하게 모든 작품을 읽은 작가가 바로 야스나리이다. 그때는 그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읽었으니까. 그 뒤로는 그렇게까지 챙겨 읽은 작가가 없다. 다른 작가가 야스나리만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더 뛰어난 작가도 많았다. 그저 수많은 작가의 수많은 작품을 다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제일 집착했던 부분은 세부 묘사였다. 그의 세부 묘사는 당시 유행하던 문학잡지에 발표된 작품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세부 묘사에 무척 능했지만, 그것은 거리를 둔 묘사였다. 다시 말해 눈으로만 주시할 뿐 손으로 직접 만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세부 묘사가 무척 풍부하다고 생각했고, 그 묘사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어떤 작가든 당신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는 동시에 당신의 앞날을 끝장낼 수도 있다. 당신이 그 작가에게 미련을 둘수록 당신 자신의 길은 사라진다. 나는 야스나리의 길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의 길은 그가 죽은 뒤 막혀버렸다. 내가 가던 길은 야스나리 길의 환영이지 내 길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 두 사람의 문학의 길은 어느 정도 연관은 있었겠지만, 나의 경험은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한 작가는 다른 작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영향에 대해선 이전에 글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후안 룰포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오스카 와일드가 보르헤스에게 준 영향 등을 말이다. 햇빛이 나무에 주는 영향을 예로 들어 말해보겠다. 햇빛이 나무에 영향을 주더라도 나무는 나무의 방식으로 성장하지 햇빛의 방식으로는 성장하지 못한다. 한 작가의 다른 작가에 대한 영향도 마찬가지이다.

 

  야스나리에게 미련을 둔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길을 잃고 헤맸다.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글 몇 편 써보지도 못하고 재능이 다한 것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때 기회가 왔다. 항저우에서 한 작가 친구와 서점을 구경하러 갔다 카프카 소설선과 카뮈 소설선을 보았다. 모두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이었다. 카프카의 소설은 한 권뿐이었다. 친구가 그걸 샀고 나는 그에게 부탁해 책을 빌린 다음 하이옌으로 가져갔다. 이전에 내가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은 ‘세계문학’에 실린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 쓰는 작가라고만 생각했을 뿐 별다른 인상은 받지 못했다. 사실 독서에는 어떤 인연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인연이 닿지 않기도 한다. 그러면 그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겨울 무척 추운 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알다시피 남방은 북방처럼 따뜻하지 않다. 내가 1991년 베이징에 정착하자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는데, 베이징이 따뜻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모두 웃었지만 실제로 따뜻한 날씨가 어떤 작가에겐 몹시 중요하다.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 겨울에 하이옌에서 소설을 쓰던 풍경이 떠오른다. 늘 발에 감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얼어서 감각이 마비됐고 마지막에는 아예 발이 없어진 것 같았다. 일어나느라 한참 난리법석을 피우다보면 발의 감각이 슬슬 돌아왔다. 북방은 따뜻해서 마음 놓고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북방의 따뜻함을 알고 난 뒤부터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또하나의 얘깃거리다. 그 겨울밤 나는 카프카의 『시골의사』를 읽었다. 그 작품은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자유가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소설에는 말 한 필이 나오는데, 그 말이 참으로 신기하다. 카프카는 서술상의 논리를 무시했다. 그가 말을 생각하면 바로 말이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곧 사라졌다. 솔직히 이런 거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가가 이렇게 쓴다면 나도 배울 수 있다.

 

  당시에 『베이징문학』은 문예교류회를 열었다. 1986년 그 잡지사에서 나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주된 연락 방법이 편지였다. 전화도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오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물론 가겠다고 했다. 베이징에 갈 수 있는 기회라면 당연히 일단 잡고 봐야 했다. 그대는 베이징에 한 번 가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내가 원고를 가져오기를 원했다. 나는 줄곧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했고, 그 결과는 엉뚱했다. 그때 중국에는 석간신문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한 신문에서 짧은 기사를 읽었다. 사과를 실은 차가 신창으로 가다 강도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런 기사는 아주 흔했다. 지금이야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이젠 누가 누구를 죽여야만 기사가 된다. 난 그 기사를 읽고 나서 사과를 훔치는 내용을 소설로 쓰기로 했다. 어쨌든 쓸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베이징에 가서 문예교류회에 참가하려면 원고가 있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하고 있었다. 원고 청탁이 없었던 것이다. 누가 나에게 원고를 청탁하겠는가? 나는 글을 써서 그들에게 부쳤다. 그들이 그걸 싣겠다고 하면 베이징에 머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작품은 실리지 못했다. 반송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내가 여전히 오락가락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나는 사과를 훔치는 얘기를 썼다. 무의식중에 아주 중요한 나의 첫 작품 「십팔 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가다」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글을 쓰는 내내 참 즐거웠다. 반나절 만에 다 써버렸다. 다 쓰고 나서 글쓰기가 나를 이끌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카프카에게 감사했다. 카프카가 내 사상을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가와바리 야스나리와 카프카를 가장 큰 영감을 준 작가라고 생각한다. 글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준 야스나리가 나중에 내 재능을 질식시키려 하는 시점에 카프카가 나타났다. 카프카는 해방자였다. 그는 나의 글쓰기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야스나리에게 미련을 두었던 삼 년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삼 년간 세부 묘사 방법을 연마했다. 그 당시 작품은 세련되지 못하겠지만 글쓰기의 기초를 다진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은 리듬이 빠르건 늦건, 서술의 실마리가 거칠건 세심하건 작품을 쓰면서 세부 묘사를 잊지 않는다. 이미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루쉰의 작품으로 예를 들어보자. 루쉰에 대한 내 인식은 아주 독특한 과정을 거쳤다. 그는 나에게 가장 익숙한 작가이다. 어린 시절부터 소년기까지는 더 익숙했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과서에 실린 그의 글과 시를 암송해야 했다. 그의 글은 다른 작품보다 외우기 힘들었고, 그래서 그를 싫어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작가였던 내 친구가 드라마 감독이 되었는데, 그가 나에게 대본 작업을 맡겼다. 그 당시 내 책은 판매가 신통치 않았다. 나는 대본 쓰는 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이미 직업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발치사는 이미 그만둔 뒤였다. 그와 몇 작품을 하고 나서 그가 말했다. 우리 루쉰 작품을 대본으로 만들어볼까? 나는 좋다고 했다. 루쉰은 판권을 살 필요도 없었고, 어떻게 고쳐도 상관없었다. 나는 말했다. 나한테 루쉰 소설이 없는데. 그가 말했다. 그럼 어쩌지? 내가 대답했다. 서점에 가서 책을 사야지. 『루쉰 소설전집』을 사서 제일 먼저 「광인 일기」를 읽고는 깜짝 놀랐다. 루쉰도 이렇게 좋은 소설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공을기」까지 읽은 나는 친구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루쉰은 정말 위대한 작가야. 우리가 그의 작품을 망쳐선 안 되겠어. 「공을기」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이 작품은 전범과도 같다. 더 이상 간결하려야 간결할 수가 없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루쉰의 세부를 묘사하는 내공을 볼 수 있다. 그는 시작을 끝내주게 썼다. 간단하게 묘사한 루진의 술집 구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안에서, 짧은 옷을 입은 사람은 밖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 공을기는 장삼을 입고 밖에서 술을 마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되는 것이다. 루쉰이 쓴 『눌함』의 서언을 다시 읽어보자. 그는 진신이라는 친구가 자신을 보러 왓다고 썼다. 그 서언을 보면 당신은 루쉰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신이가 방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진신이가 앉기 전에 장삼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고만 쓴다. 이러한 묘사는 한 작가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무의식중에 썼을지도 모르지만, 대작가가 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평생을 살면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예로 든다. 나는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지 않고 중간의 한 단락 한 단락을 뒤적이며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조이스는 내가 읽었던 외국 작가 가운데 내공이 가장 단단한 작가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세 단계의 동작으로 표현했다. 먼저 문을 손으로 민다. 그런데 문틈에 두부 찌꺼기라도 끼었는지 잘 열리지 않는다. 이제 팔뚝으로 밀친다. 그래도 열리지 않는다. 결국 발로 걷어찬다. 그리고 그는 소년에 대해 쓴다. 아주 어린 소년이다. 손에는 뭔지 알 수 없는 봉투를 쥐고 있는데, 편지를 부치려는 것 같다. 아일랜드의 더블린 대로에 서서 소년은 그 봉투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이 전 과정을 조이스는 무척 탁얼하게 묘사했다. 한 신부가 다가오자 아이는 신부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묻는다. 조이스는 신부가 아이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무릎을 끓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고 쓴다. 신부는 길 건너편에 있는 붉은색 우체통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거 보이지? 아이가 눈으로 확인한다. 신부가 말한다. 편지를 저 우체통의 벌어진 틈으로 넣으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아이가 대로를 건너는 동안 이미 몇 걸음 걸어가던 신부가 뒤돌아 아이에게 말한다. 조심하렴, 네 몸을 그곳에 넣으면 안 돼! 전 과정이 세밀하고 논리정연하다. 이것이 조이스의 천재성이다. 그는 더블린의 날씨를 묘사하면서 이런 비유를 쓴다. 더블린의 날씨는 아이의 엉덩이 같다고. 똥을 눴다. 금세 오줌을 눈다고 말이다. 이로써 그가 얼마나 이미지에 민감한지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위대한 사실주의 작가이기도 했다. 

  루쉰도 마찬가지로 「공을기」앞부분에서는 한 번씩 방문하던 주인공 공을기가 오랫동안 발길이 뜸해진 장면을 묘사했다. 그러다 다리가 부러진 공을기가 다시 등장한다. 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묘사에 관심이 많다. 나는 생각한다. 앞부분에서 공을기의 다리가 멀쩡했을 때 루쉰은 그가 어떻게 오는지 전혀 다루지 않았다. 어떻게 올지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다리를 다쳤으니 루쉰은 그가 어떻게 왔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루쉰은 어떻게 썼을까. 공을기가 오는 모습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어떠한 언급도 없으면 그에게 정말 실망할 것 같았다. 그건 책임감 있는 작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가라면 중요한 대목에 직면했을 때 에둘러가지 않고 정면 돌파해야 한다. 루쉰은 정말 훌륭했다. 소설의 화자는 아이다. 아직 계산대 높이만큼도 키가 자라지 않은 아이. 아이는 계산대 밖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듣는다. “술 한 잔 데워주쇼.” 공을기의 목소리다. 아이는 마음속으로 공을기가 다시 왔다고 생각하면서 곧 술 한 잔을 데운다. 그리고 소리가 어디에서 났는지 확인한 후 계산대를 돌아 밖으로 나가서 공을기에게 술을 건넨다. 이때 공을기가 손바닥을 펼쳐 동전 몇 개를 내민다. 손바닥이 온통 흙투성이다. 루쉰은 이어서 쓴다. “그는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으며 왔던 것이다.” 이 한 문장으로 루쉰이 대작가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부에 대한 통찰력이다. 따라서 나는 말하겠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나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우리 생명이 살아 숨쉬는 세부에 주목하게 해준 것이라고.

 

  지금은 많은 이들이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상상력은 통찰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 엉터리로 만들어낸 공상이 될 뿐이다. 나는 보르헤스의 비유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보기에 그의 비유에는 상상력과 통찰력이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는 한 사람이 세계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물속에서 물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졌다. 여러분도 잘 생각해보라. 물속에서 물이 사라진 것보다 더 깔끔하게 사라지는 것이 가능할까? 이 비유는 풍부한 상상력임과 동시에 정밀한 통찰력이기도 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세부가 한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어떤 작품을 쓸 때든 세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잊지 않는다.

 

  나는 줄곧 강조해왔다. 어떤 사람이든 작가이기에 앞서 우선 한 사람의 독자이다. 좋은 독자라야 비로소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 작가의 읽기 경험은 디테일의 파악으로 전화(轉 化)되고 작가가 서술할 때 길을 헤매지 않도록 해준다. 나는 어떤 작가가 어떻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독자로서 나를 능가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문장과 이야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부 묘사. 이것이 내 글쓰기의 첫 단계이다. 나는 「십팔 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가다」「강가에서 일어난 일」「1986년」「어떤 현실」을 쓰고 나서 아주 곤혹스러운 문제 하나를 해결했다. 바로 심리 묘사였다. 나중에 나는 잡지 『독서』에 「내면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심리 묘사에 관한 글을 한 편 썼다. 그리고 이후에 같은 제목의 책을 냈다.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인용부호와 단락 배치를 해결했고, 그다음에는 서술과 묘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두려워햇던 것은 심리 묘사였다. 나는 심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인 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 당신이 일만 자를 쓴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십만 자도 부족할지 모른다. 나는 이걸 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른 작가가 나를 도와줬다. 내가 지금까지도 무척 좋아하는 윌리엄 포크너이다. 나는 「워시」라는 그의 단편을 읽었다. 이런 이야기다. 한 사람이 살인을 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윌리엄 포크너의 방법은 무척 탁월했다. 그는 살인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광기가 최고조에 이른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위대한 작가로서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살인자의 심장을 멎게 하고 그의 눈을 감긴다. 가난한 백인이 부유한 백인 친구를 살해하게 한 뒤 이어지는 단락 어디에서도 감정적 묘사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사람의 눈이 무엇을 보았고, 주위가 얼마나 적막했는지만을 썼을 뿐이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죽은 자의 피가 땅에 흐른다고 적었다. 주위에는 미국 남부의 경치와 분위기가 펼쳐졌다. 나는 미국 미시시피에 가본 적이 있어서 포크너의 고향이 얼마나 후덥지근한 곳인지 않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진정 탁월한 심리 묫는 심리를 묘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해가 지난 뒤 이런 나의 관점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찾아보았다. 20세기 작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를테면 헤밍웨이의 유명한 단편 「하얀 코끼리 같은 언덕」은 두 사람의 대화로 이뤄진다. 그러나 그가 쓰는 것은 모두 그들의 속내이다. 아예 그렇게 생각한다고는 쓰지 않는다. 또 전범이 되는 작품인 로브그리예의 『질투』는 시종일관 한 사람의 눈으로 사람들을 훔쳐본다. 그는 자신이 본 것들로 인해 내면에 파문이 일지만, 작가는 어떠한 심리 묘사도 하지 않는다. 심리 묘사란 사실 지식인이 거짓으로 구성한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내 관점을 더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 위대한 두 작가를 찾았는데, 바로 스탕달과 도스토옙스키이다. 나는 『적과 흑』과 『최와 벌』을 연구했다. 『적과 흑』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죄와 벌』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로 전당포의 늙은 여주인을 내리찍는 단락을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전체가 그의 심리묘사였다. 나는 다시 읽으면서 다시 한번 놀랐다. 쓰인 내용은 전부 눈으로 본 동작뿐이었다. 그러나 무척 치밀한 묘사가 진정한 심리 상태를 전달해주었다. 내 생각에는 사람의 내면이 무척 평온할 때에만 심리 상태를 묘사할 수 있다. 내면이 요동칠 때는 근본적으로 심리 변화를 파악할 수 없다. 심전도를 써도 측정해내지 못한다. 겉모습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정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작가는 모든 인물의 단순한 한마디까지도 정확하게 써야 한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면서 맞닥뜨린 아주 중요한 난관이었다.

 

  뒤에 나는 또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바로 대화 서술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써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정말 무서운 경험이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쓸 때까지 그랬다. 이 작품은 길이가 그다지 길지는 않다. 만약 길었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도 전체가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이었기 때문에 다 쓰고 나자 대화의 난관을 극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생각에, 대화는 인물의 발언일 뿐 아니라 작가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통찰력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것은 몹시 중요하다. 당신이 어떤 농민에 대해 쓴다고 하자. 겉모습은 농민인데 입을 열었더니 무슨 대학 교수나 할 법한 말이 튀어나왔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 작가는 분명 통찰력이 없는 작가이다. 인물의 신분에 어울리는 말로 써야 한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묻는다. 1980년대 작품과 1990년대 작품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이유가 무엇이냐고. 평론계에서도 몇 년 전에 많은 논의가 있었다. 나도 들었다. 내 입장을 말하자면, 인물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다. 1980년대에 나는 선봉파(1980년대 후반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중국문학 유파로 모더니즘 사조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중국적 특색을 드러냈다.) 작가였다. 인물은 하나의 기호일 뿐, 서술자는 작가인 나였다. 인물에게 어떤 말을 하라고 요구하면 그는 그 말을 해야 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첫 장편 『가랑비 속의 외침』을 쓰면서 문득 인물이 스스로 말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글쓰기 수련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글쓰기는 무척이나 긴 과정이다. 많은 일들을 많이 쓰고 나면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알 수 없던 것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터벅터벅 걸으면서 자신의 일생이 어땠는지 깨닫게 되는 인생길처럼 글쓰기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내가 창조한 인물이 갑자기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는 사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런 서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손아귀에 쥐고 있던 권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는 작가의 권력에 대한 미련이다. 작가는 펜 아래의 인물만 통제할 수 있다.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도 책임을 방기했다. 『인생』을 쓰면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허삼관매혈기』를 쓸 때는 완전히 놓아버렸다. 인물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앞의 삼분의 일은 내가 인물에게 만들어준 대사이다. 나는 나의 읽고 쓰는 감각으로 인물이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그가 한 말이 맞는지, 과연 그의 말투인지를 점검했다. 중간 삼분의 일쯤 쓰자 등장인물과 작가의 중간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내 글쓰기와 인물의 말하기 사이에 묵계가 성립된 것이다. 마지막 삼분의 일에서는 인물이 스스로 말했다. 그런 글쓰기의 경계가 유쾌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좋은 보상이다.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번거로운 일이 생기겠지만 나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장편소설을 쓸 때 나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진 않는 편이다. 글을 쓸 때 생각이 너무 많으면 재미가 없다. 나는 우선 실마리를 하나 생각한다. 그리고 중간에 넣을 몇 단락을 구상한다. 가끔은 결론도 없이 글쓰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면 오히려 글이 잘 써진다. 전에 누군가 중단편소설을 쓰는 게 장편보다 편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정반대라고 대답했다. 중단편을 쓰는 건 노동이다. 문학지에서 재촉하면 쓴다. 장편소설을 쓰는 건 생활이다. 나는 장편을 쓰는 게 더 좋다. 글을 많이 쓴 것도 아니고, 쓰는 것도 느린 편이지만 장편소설에는 이런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일 년 동안 한 편을 써낸다고 해서 빨리 쓴다고 말할 사람도 없지만, 십 년 동안 한 편도 써내지 못한다고 해서 느리게 쓴다고 말할 사람도 없다. 그런 압력이 없다. 당신이 만든 인물의 운명도 천천히 변화한다. 동시에 그 일 년, 이 년, 몇 년 동안 작가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긴다. 함께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이해하게 되고, 그런 관계가 형성되면 무척 유쾌해진다. 『허삼관 매혈기』를 쓸 때 후반부에서는 정말 그랬다. 나는 늘 나중에 잘 안 써진 곳이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데, 결과적으로 쓰고 난 후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나중에 골치 아팠던 곳을 어떻게 지나갔는지 확인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무척 만족스러웠다.

 

  1987년 『베이징문학』이 황산에서 문예교류회를 개최했을 때 어떤 사람과 산보를 갔다 들은 이야기이다. 그는 왕쩡치와 함께 선충원(저명한 중국 현대 소설가)을 뵈러 가서 선 선생에게 소설을 어떻게 쓰시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선 선생이 “인물에 밀착해서 씁니다”라고 대답했단다. 난 그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인물은 내가 통제하는 것인데 인물에 붙어서 쓴다는 게 무슨 말인가. 지금 생각하니 그 말이 옳다는 걸 알겠다. 인물에 밀착해서 쓰면 자신이 대화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총명하고 재능이 있다 해도 대화를 할 수 없다. 대화를 쓰지 못하는 작가는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다. 대화를 장악해야 감정이 앞질러나가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척 중요하다.

 

  지금도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 못하는 편이지만, 우연히 한두 사람의 말을 믿게 되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를테면 내가 막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주로 읽은 것은 문학잡지에 게재된 작품이었다. 그때 나는 유명한 사람의 경험담을 많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이의 경험담은 대부분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잭 런던이 문학청년들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내용인즉 이랬다. 바이런의 시 한 줄을 읽을지언정 수백 권의 잡지는 읽지 마라. 나는 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 당시엔 문학잡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을 왜 그렇게 못 쓰나 싶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 소설이 좋다고 말했다. 그건 정말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제야 나는 잭 런던이 문학잡지에 발표한 대부분의 글, 절대 다수의 글, 심지어 99.9퍼센트의 글이 쓰레기라고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잡지가 낡아감에 따라 거기 실린 작품도 폐품이 되고 만다. 바이런의 시 한 줄은 바로 대표적인 고전 작품을 의미한다. 그러니 쓰레기 같은 작품을 읽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고전 작품을 읽는 게 좋다. 적어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나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나는 문학잡지 대신 고전 작품만 읽어왔다. 때마침 서양문학 작품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후안 룰포나 그 밖의 수많은 작품을 읽었다. 처음엔 책을 읽은 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설을 썼다. 이제는 소설을 쓰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잠을 못 자면 글쓰기 속도에 영향을 받는다. 지금 보면 그때 문학 작품을 읽으며 잘못 들인 습관 탓이다. 지금은 소설 쓰기로 얾겨갔지만. 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한다. 그때부터 나는 문학잡지를 읽지 않는다.

 

  1986년 베이징의 문예교류회에 갔을 때를 기억한다. 그 당시 『베이징문학』의 부편집장(우리 문학계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은 당시 청년들이 모두 그의 눈에 들길 원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십팔 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가다」를 읽은 뒤 무척 맘에 들었는지 나와 얘기까지 나누었다. 그는 하이옌처럼 작은 현에서 이를 뽑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작품을 쓰게 됐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그렇게 쓰니까 재밌더라고 대답했다. 며칠 뒤에 그는 나와 잡담을 나누다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물음의 의미를 즉시 알아챘다. 그는 내가 하이옌에서 읽은 책이 그들이 베이징에서 읽은 책보다 적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읽은 책을 나도 전부 읽었다. 그래서 나는 독자로서의 내가 작가로서의 나에게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나는 과거의 글쓰기를 돌이켜보았다. 때때로 감개가 무량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너무 앉고 싶어서 털썩 주저앉아놓고는 이젠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안달이다. 작가는 다 이모양인 것 같다. 갈수록 나태해지고, 어디에도 가고 싶어하지 않다가 훌쩍 먼 길을 떠나길 원한다. 지금의 나는 글을 많이 썼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쓴 지 벌써 십팔 년이 넘었다. 더 됐을지도 모른다.(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나는 비교적 심오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 인생은 글쓰기를 통해 보다 온전해졌다. 인간은 많은 욕망과 상상력을 가졌고, 그것을 표현할 수단을 얻길 원한다. 그러나 현실 생활은 이런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사람에게 더 많은 욕망, 더 많은 상상력, 더 많은 영감을 주고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구의 세계는 현실 세계보다 더 풍부했고 나를 더 매혹시켰다. 나의 현실 세계는 매일이 똑같지만 나의 글쓰기는 매일 다를 수 있다.

  또 한 가지의 깨달음이 있다. 여러 해 글을 쓰고 난 뒤 나는 글쓰기가 뭔지를 알게 되었다. 글쓰기는 인생보다 더 기나긴 과정이다. 문학은 모든 사람보다 오래간다. 문학이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존경할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신이 알 수 있는 게 있고 알 수 없는 게 있다. 당신이 해낸 모든 작업은 고통스런 노력을 거친 당신에게 문학이 베푼 약간의 은혜일 뿐이다. 당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괜찮은 작품 몇 편을 쓰게 해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십팔 년 전 막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 지금 더 문학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2002년 쑤저우 대학에서 , 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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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01.17 09:50

    첫댓글 중국작가 '위화'하면 낯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임. 사실 강호도 그랬지만 그의 대표적 인기작 장편소설인 <허삼관 매혈기>, <인생>을 읽고 나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위트와 풍자 속에서 이루어진 장대한 서사를 만나 볼 수 있음. 물론 그런 작품에는 <형제>가 방점을 찍고 있지만, 어찌됐든 나에게 '위화'라는 작가는 이런 유명한 작품들로 다가와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고 한국에도 다수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음. 그런데 '작가'라는 게 작품을 써서 인정받으며 어느 정도 일가를 이루고 나면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소회담, 즉 작가로서 걸어왔던 자신의 문학세계를 밝히는 바 이를 소개함

  • 12.01.17 06:47

    긴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 쓰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12.01.18 00:33

    위화에 대한 글, 선생님의 도움말씀, 다 깊이 새겨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2.01.18 07:46

    오늘 모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특히 위화가 영향을 받았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은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던 탓에, 어떤 작가의 작품을 연구할까는 쉽지않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유학 2년은 문학 작품을 읽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중에 가와바타 작품에 빠져 그의 작품을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작품을 연구하지는 못했지만......선생님 감사합니다. 작가의 글 쓰기 경험을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쓴 글을 찾아 올려 주셔서.....이글은 우리 회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뭔가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

  • 작성자 12.01.19 16:22

    언젠가 한번 읽고 느낀 바가 많았던 터에,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깝다 싶어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데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반나절 고생 끝에 다시 찾아낸 글입니다. 그것을 아시면 많은 분들이 읽어 주실 텐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고생한 보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읽어주신 분들께서, 많은 도움이 되셨다고 댓글을 달아 주시니 기쁩니다. 서로 아끼면서 살기로 합시다.

  • 12.01.18 15:27

    밑줄 쫘~악 치고 싶은 말들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 12.01.20 03:05

    글쓰기에 기운을 잃었을 때 읽으면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는 좋은 글이네요. '당신이 해낸 모든 작업은 고통스런 노력을 거친 당신에게 문학이 베푼 약간의 은혜일 뿐이다.' 완전 동감합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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