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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동조(初月東照, 1878~1944)】 이 몸이 부서져 없어져도 조선독립을 이루겠다."
초월동조
이 몸이 부서져 없어져도 조선독립을 이루겠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오직 ‘조선독립’의 열망을 실천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초월동조(初月東照, 1878~1944)스님. 평소 지인들에게 “내 이 몸이 부서져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독립이 되도록 결심했다”고 의중을 밝힌 초월스님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스님은 독립운동 뿐 아니라 후학을 지도한 강사였으며, 삶과 수행이 일치한 선사였다. 부천대 김광식 교수의 논문 ‘백초월의 삶과 독립운동’ 등의 자료를 통해 초월스님의 삶을 조명했다.
“이 몸이 부서져 없어져도 조선독립을 이루겠다”
만해·석전스님 등과 임제종 운동 전개
동학사 강원 등에서 후학 지도한 ‘강사’
<사진> 일제강점기 형무소에 수감된 초월스님. 김광식 부천대 교수가 지난 2003년 발굴한 사진이다.
○…한일강제병합후 친일승려들이 조선불교를 일본에 귀속시키려 할 때 초월스님은 만해.석전 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전개했다.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지키고, 왜색불교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태동된 것이 임제종 운동이었다. 만해스님과 한 살 차이인 초월스님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동지들과 조선불교수호운동을 펼쳤다. 이때 초월스님은 “초월(初月)이 동조(東照)하니, 회광(晦光)이 자멸”이라며 당신과 대표적 친일승려인 이회광의 법명을 빗대어 법문을 했다. 이 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승달이 동쪽에서 비춰오니, 그믐날 빛은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초월스님은 청주와 인연이 깊다. 1917년 12월2일 속리산 법주사가 청주에 문을 연 용화사포교당의 낙성봉불 개교식(開敎式)에 참석해 법문을 했고, 청주 개교사(開敎師) 소임을 맡아 불법을 전했다. 초월스님은 생전에 “청주에서 3년간 포교를 했다”고 밝힌바 있다. 초월스님과 청주의 인연은 은사 남파스님이 법주사 주지로 있으면서 청주 용화사포교당을 내면서 비롯됐다.
○…초월스님의 의욕적인 포교는 그 무렵 충북도청에 근무하는 한 젊은이를 출가의 길로 인도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출가해 지리산 영은사 장학생으로 일본에서 유학하며 불교청년운동에 앞장선 이영재(李英宰)가 그 주인공이다.
귀국 후에 조선불교 혁신을 주창했던 이영재에 대해 지인들은 “신학문에 무소부지(無所不知, 모르는 것이 없음)한 사람인데 초월스님 법문을 듣고 발심 출가하려 한다”고 했다. ‘청년 사문 이영재’는 부처님 가르침을 좀 더 가깝게 체험하려고 인도 유학길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1927년 10월이었다.
○…1931년 초월스님은 계룡산 동학사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으면서 스님 30여명을 지도했다. 이때 초월스님 문하에서 공부했던 법륜종 초대종정 금암(錦岩)스님은 자필 기록에서 초월스님에 대해 이렇게 밝힌바 있다.
“…선사의 고매박학(高邁博學)은 당시 한국불교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또한 수도정진하심이 보살도 정신으로 우국우민(憂國憂民)하시며, 세태의 변천을 따라 왜인들의 강승(强勝)을 질타(嫉唾)하며 왜황(倭皇)의 사진이 지상(誌上)에 나타나면 반듯이 침을 발라 지두(指頭, 손가락의 끝)로 까뭉개며 압견(壓見)하심을 수차 발견했으며 유시에는 제1차 세계대전 종식 후에 개최한 만국공회(萬國公會,국제연맹)의 준비 시설 규모와 각국 대표 연설문을 2책으로 분류하여 표제를 금과옥조(金科玉條,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규칙이나 교훈)라 명제(名題) 한 책자를 비장하시고, 한적할 때에는 연중피람(披覽, 책이나 문서를 펼쳐 봄) 낭독하시매 의연한 정돈(整頓)을 하시고 울한(鬱恨)을 자해(自解)하시었다. 평생에 재색(財色)을 불식급심(不食急心)하시고 의식(衣食)의 검약은 후생지소수(後生之所守라)…”
○…1985년 5월 신촌 봉원사의 박송암 스님은 초월스님에 대해 회고한 적이 있다. “봉원사 강주로 계실 적에 여름 더운 날 모기가 까맣게 몸에 붙어도 모르시고, 추운 겨울에도 방문을 열고 계셔도 추운 줄 모르셨다. 두 손을 머리에 대시고 좌우로 흔드는 습관이 전번에 형(刑) 받으실 때 고문에 못 이겨 된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구정월(舊正月)이 돌아올 무렵 곶감 한점을 들고 나서시는 것을 뵙고 어디로 출타하시는지 여쭈었더니, 김활란 박사가 친히 아는 동지이기 때문에 방문한다고 하셨다.”
○…조영암은 1985년 2월 <불교사상> 15호에서 오대산에 머물 때 만난 초월스님에 대한 회고를 기록했다. “방한암 스님뿐 아니라 백초월 스님을 2년간이나 모시고 있었다. 월정사에서 초월스님에게 <화엄경>을 이수하고 있었다. 초월스님은 우리 불교계가 소유한 독립운동의 거봉이다. 스님은 일제에 의해 청주형무소에서 옥사하셨다. 봉원사 대웅전 주련은 초월스님 글씨이다. 스님 글씨는 힘차고 놀랍다. 스님을 모시고 오대산 산정에 오른 일이 있다. 그때 스님은 갑자기 큰 고함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깜짝 놀랐다. 그 후 금강산에 가셨을 때도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일경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을 때도 초월스님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다. 오히려 “이놈아 밥을 치면 떡밖에 더 되겠느냐, 그리고 아무리 행패를 부리더라도, 계란을 가지고 삼각산을 쳐도 삼각산이 없어질리 없다”고 호통쳤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온다. 두 번째 검거되어 입감됐을 때 미친 척을 하면 방면할 수 있다는 말에 오히려 추상같은 목소리로 야단을 쳤다. “내가 왜 미쳐, 너희 왜놈들이 미쳐서 남의 나라 땅을 강점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미쳤단 말이냐, 너희가 미쳤지
○…한때 스님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죽은 거북이’를 방안에 두고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일경들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죽은 거북이와 자문자답하는 스님을 정신이상자로 취급하도록 했던 것이다. 공주 동학사에서 초월스님에게 공부한 금암스님은 “동학사에서도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 놓고, 이따금 그 거북이를 관(觀)하셨다”고 밝힌바 있다. ‘죽은 거북이’는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수행자로서 ‘공부의 한 방편’으로 삼은 것으로도 보인다. 스님의 당호에 거북이를 나타내는 구(龜)가 들어간 구국(龜國)을 사용한 것이 우연만은 아닌듯 하다. 또한 구국의 또 다른 한자 표현이 ‘救國’임을 상기할 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도 반영된 것은 아닐까.
<사진>초월스님의 수형기록
■ 초월스님이 남긴 글 ■
초월스님의 글은 일제강점기 발행된 각종 매체와 서적을 통해 만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1913년 3월 발행 <조선불교월보> 14호 ‘지리산 화엄사 청하타정(淸霞彈靜) 선사의 입멸과 단상’ △1916년 5월 발행 <조선불교계> 1호 ‘금파화상약전(琴巴和尙略傳)’ △ 1915년 5월20일 <조선불교총보> 15호 ‘충청북도 청주군 사주면 용화사 창건기’ △ 1932년 2월 <금강산> 6호 ‘불법중요(佛法中要)’를 소개함’ △ 1924년 7월 <금강저> 2호 ‘금강저의 노래’ △1929년 <계룡산동학사사적(事蹟)>.
■ 행장 ■
선교 겸비한 ‘독립투사’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초월스님은 1878년 2월17일 경남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 금산부락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백하진(白河鎭) 선생, 모친은 김해 김씨. 세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으며, 속명은 백도수(白道洙)로 수원 백씨 26세손이다.
어린 시절 경남 진주군 정촌면 관봉리로 이사했다. 14세 되던 해(1892년)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있는 지리산 영원사에서 남파(南坡)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법명은 동조(東照)와 인영(寅榮). 법호는 초월(初月). 별호는 구국(龜國)이었다. 이밖에도 의수(義洙).의고(義告).최승(最勝).자인(自忍).인산(寅山)이란 이름도 사용했다. 이름이 여럿인 까닭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신분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지리산 영원사에 보관돼 있는 <조실안록(祖室案錄)>에는 초월스님이 1903년 겨울부터 1904년까지 영원사 조실로 기록되어 있다. 20대 중반에 조실(祖室)이란 소임을 맡은 것으로 보아 수행력이 뛰어났고, 대중에게 신망도 높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스님은 1907년 합천 해인사 선원에서 동안거 수행을 했다. 당시 방함록에 법명이 기록되어 있다. 스님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후 임제종운동에 참여하여 조선불교 수호에 앞장섰다.
스님은 1915년 조선불교 선교양종 30본산연합사무소 상치원(常置員) 총회에서 중앙학림(中央學林, 동국대 전신)의 초대 강사로 결정됐다. 이듬해 3월 중앙학림이 개교할 때 강사에 취임하지는 않았지만, 교학(敎學)에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초월스님은 계룡산 동학사(1929년 또는 1931년부터 3년간), 신촌 봉원사(1935년 3월 취임), 오대산 월정사(1930년대 2년간), 서울 진관사 마포포교당(1937년부터 수년간)등 경향 각지의 여러 사찰에서 강백으로 후학을 양성했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이밖에도 초월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부여 무량사, 밀양 표충사, 지리산 벽송사,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 등에도 있었다고 한다”면서 “그러나 구체적인 행적과 내용은 전하지 않아 아쉽다”고 밝혔다.
초월스님은 3.1운동 후 독립자금을 모으고, 중앙학림에 임시정부와 연결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또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1919년 11월25일(음력 10월3일) 단군의 건국기념일을 맞아 서울 종로에 태극기와 단군기념기 등을 내걸었으며, 당시 살포된 선언문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초월스님 이름이 실려 있다. 초월스님은 승려독립선언서및 의용승군 사건으로 체포되어 일제의 잔악무도한 고문으로 심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또한 초월스님은 1939년 경성발 봉천행 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를 썼다가 체포된 박수님의 배후 인물로 연행됐다. 스님은 3년형을 언도받고 투옥됐다. 일제강점기 초월스님의 수형기록 카드를 발굴한 김광식 교수는 “백초월은 1939년 낙서사건으로 1940년 5월경부터 구금되어 1943년 4월에 출소됐다가, 재차 구금되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면서 “재수감된 스님은 대전형무소를 거쳐,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수감생활을 하다 1944년 6월 순국, 입적했다”고 했다. 법납 53세. 세수 67세.
한편 조영암은 ‘구국당 백초월 대선사 옥사 순국록’에서 초월스님에 대해 “항상 상기된 머리를 바른 손으로 어루만지는 습관이 있었다. 키는 육척의 장신이요, 몸은 중후하였다. 옛말 그대로 헌헌 대장부였다”고 밝힌바 있다.
정부는 스님의 공훈을 기려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에 앞서 1986년에는 건국포장을 추서한바 있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