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헌[ 李庭憲 ]
분야
역사/전통 시대,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47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정의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무신.
가계
본관은 공주(公州). 고조 할아버지는 임파 현령 이진이고, 할아버지는 1513년(중종 8) 생원이 된 이함이며, 아버지는 성균관 유생 이석간이다. 이석간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뜻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이린의 딸이다. 형은 기장 현감 이정견이다. 이정헌(李庭憲)의 집안은 고조 할아버지 대부터 경상북도 영주에 살았고, 증조 할아버지 대부터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활동 사항
이정헌은 문과 시험을 준비하다가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1591년(선조 24) 무과에 응시, 급제하여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鄭撥)의 조방장(助防將)[주장을 도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이 되었다. 이정헌은 상관인 정발이 손님을 맞이하는 예에 대하여 자문을 구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14일 이정헌은 부산진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정발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정헌의 순절 사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0여 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1742년(영조 18) 손자 이회일, 이정일 등이 집안의 고서를 정리하던 중 이정헌이 형에게 보낸 편지 두 통, 1599년(선조 32) 10월 25일 형 이정견이 조카와 함께 이정헌을 위해 초혼제를 올릴 때 사용한 제문, 그리고 이정헌의 큰아들의 글 등을 발견하였다. 문서에는 이정헌이 순절할 때의 상황, 시신을 찾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도 적혀 있었다.
이정헌에 대해 재미있는 전설도 전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부산에 첨사가 내려가기만 하면 어찌된 일인지 며칠 안 되어 급사를 하곤 하였다. 변고가 잇따르자 아무도 부산 첨사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성을 자성대(子城臺)를 중심으로 다시 쌓게 하였다. 구성지(舊城池)를 팔 때 동문(東門) 못에서 많은 해골이 나오자 잘 수습하여 자성대 아래에 묻었다. 그 후 근처 마을에 사는 노인의 꿈속에 위엄 있게 갑옷을 차려입은 장수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영천 조방장(助防將) 이정헌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정발 장군과 함께 부산진을 지키려다 전사하였으나 조정에서 나의 공로를 알아주는 자가 없어 섭섭하기 짝이 없다. 나의 서러운 사정을 호소하려고 역대 부산 첨사들의 꿈에 나타났더니 모두가 소인이라 말도 하기 전에 죽어 버려 애통함을 참지 못하겠다.”
노인이 이런 꿈을 꾼 다음날부터 마을에 병이 돌아 하루에 40여 명씩 급사자가 생겨났다. 이를 괴상하게 여긴 노인은 동래 부사 박명한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박명한은 즉시 조정에 이정헌의 공로를 알려 좌승지 관직을 내리게 하고, 옛 성에 가서 기치(旗幟)[군대에서 쓰던 깃발]를 갖추고, 군고(軍鼓)[군대에서 쓰던 북]를 울리며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 이정헌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그 후 변고가 사라졌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1760년(영조 36) 동래 부사 홍명한(洪名漢)이 지방의 사림과 의논하여 송공단(宋公壇)에 배향하였으나 이정헌이 동래읍성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하여 파향되었다. 그 후 1766년(영조 42) 부산진 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조성한 정공단(鄭公壇)에 배향되었다.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에도 배향되었다.
디지털부산문화대전-이정헌
[네이버 지식백과] 이정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정공단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