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을 지나서, 아카시아·오리나무·상수리나무 따위가 얼키설키 엉킨 사이에 뻥 뚫린 터널 길을 달린다. 덤부렁듬쑥한 수풀이 내뿜은 생기가 가쁜 숨을 타고 가슴 깊이 들어온다. 이따금 얼굴이나 팔다리에 걸려서 끊어지는 거미줄이 몹시 성가시면서도 먹이를 사냥하는 터전이 결딴나서 울부짖는 거미의 통곡소리가 귓전을 때려서 마음이 쓰리다.
황조롱이 서너 마리가 바리톤으로 연주하니까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린다. 이에 질세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새끼 기르기를 떠맡긴 두견새 부부가 이 산 저 산을 옮겨다니면서 새끼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소프라노 소리가 너무도 구슬퍼서 산천초목의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다. 아카시아가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보를 터뜨려서 하얀 꽃 보라가 명지바람을 타고 우수수 흩날린다. 하얀 눈물방울을 보고 갓밝이가 찾아와서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시골 양조장의 넓은 마당에 멍석을 여러 자리 깔고 술 빚는 고두밥1)을 식히는 것처럼, 사뿐사뿐 내려앉은 아카시아 꽃잎과 골짜기 둔덕을 가시덤불로 두껍게 덮고 한창 핀 찔레꽃이 산골짜기에 새하얗게 널려 있다.
터널 곳곳에는 나방이나 나비로 탈바꿈하여 세상을 날아다닐 꿈을 안고 먹이가 넉넉한 새 터전으로 옮겨가려고 자신의 점액질로 만든 실에 매달린 채 꿈틀거리는 애벌레가 숱하게 많다. 몸에 달라붙거나 반 쯤 벌린 입으로 들어올까 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달리지만 바투2) 매달린 애벌레를 모두 피할 수는 없다. 한두 마리가 옷에 붙어서 자질3)하듯 기어가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달린다.
중학교 시절에 오뉴월이 되면, 가운뎃손가락보다 더 긴 송충이가 산에 있는 소나무 잎을 깡그리 갉아먹어서 잎이란 잎이 모두 누래질 만큼 오글거렸다. 주말이면 지방행정관청의 대대적인 행사로 남녀 학생 가리지 않고 산으로 가서 집게젓가락으로 잡아 깡통에 담은 뒤 한꺼번에 땅속에 생매장하던 일이 생각난다. 깡통에 송충이를 가득 잡는 대로 집으로 보내주므로 대부분의 남학생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재빠르게 잡지만, 여학생은 징그러워서 호들갑만 떨다가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그것이 안쓰러워서 누구랄 것도 없이 가까이 있는 여학생과 깡통을 바꾼 남학생이 많았다. 내가 송충이가 우글거리는 깡통을 내밀었을 때 마지못해 자신의 빈 깡통을 내놓으면서 얼굴에 꽃물4)이 들던 그 여학생은 그 일을 나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면서 예쁜 모습 그대로 잘 지내고 있을까…….
엊그제 제법 내린 목비5)를 머금고 풀과 나뭇잎이 부쩍 자라서 매우 보드랍다. 온갖 종류의 애벌레가 꼬물꼬물 기어 다니며 푸나무 잎을 우적우적 갉아먹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게검스럽게6) 아침을 먹고 있는 벌레를 사냥하러 나서며 산새들이 수다스럽게 재잘거려서 숲 속이 떠들썩하다. 사냥감이 철철 넘치는 때에 새끼를 기르는 자연의 소리이다. 두견새와 똑같이 남에게 새끼 건사를 맡기고는 새끼와 보모(保姆)를 위해 '아침의 노래'를 연주하는 뻐꾸기 부부의 이중창이 멀리 퍼져간다. 장끼가 이따금 괘다리적게7) "꺽꺽"거리며 알토 소리로 장단을 맞추는 가운데 휘파람 새, 꾀꼬리, 새매 따위가 끼리끼리 노랫말을 주고받으며 오페라를 연주한다. 이따금 사랑을 속삭이는 비둘기의 베이스 소리가 바닥에 깔리면서 아름다운 화음을 연출한다.
새벽달리기를 비롯해서 오늘(05년 5월 19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야 한다. 오전에는 한밭대학교 실용문예창작과정에서 세 시간 동안 '인생길과 마라톤'에 대해서 강의와 토의시간을 갖는다. 30년 이상 교단에 서고 있지만, 문학 분야의 강의는 처음이라서 아무리 준비를 해도 성에 차지8) 않는다. 오후에는 모레(5월 21일) 저녁에 스페인·오스트리아·프랑스·네덜란드 등에서 열린 세계합창대회와 페스티벌을 통해 실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필리핀 라살대학합창단을 초청하여 펼치는 봄 연주회에서 한밭대학교합창단이 부를 테너파트의 곡을 연습한다. 저녁에는 대전평생학습관에서 열리는 충남성악선교대학 제15회 정기연주회에서 바리톤으로 독창을 연주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연주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석 달 동안 토요일 오후마다 연주법을 지도받으며 지낸 일이 하나하나 스쳐간다. 이태리 가곡을 선정한 뒤 노랫말의 뜻을 알고, 곡과 작곡자가 요구하는 연주법을 익히고, 반주에 맞춰서 연습한다. 김종권 목사께서 벨칸토 창법으로 범창(範唱)한 뒤, "유명한 성악가를 본떠서 노래하려고 무대 위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소리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므로 자신만이 연출할 수 있는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청중의 반응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독창연주입니다. 훌륭한 작품이 되도록 열성을 쏟아 연습하세요."하고 이른 말씀이 늘 새롭다.
프로그램 순서에 따라 무대로 나선다. 음색은 바꿀 수 없지만 발성법은 물론, 무대에 나서는 걸음걸이로부터 청중에게 절하는 자세, 연주자세, 뒤돌아가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두루 익혔으므로 자신만만하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잘 부르라고 격려하는 청중들의 박수소리가 매우 크다. 감미로운 전주곡에 맞춰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웃음 띤 얼굴로 청중석에 앉은 사람들을 한사람씩 살펴본다. 아내가 있는 곳에 눈길을 보내면서 토스티(Francesco Paolo Tosti)가 작곡한 아프릴레(Aprile : 4월)를 연주한다. 곡, 노랫말, 작곡자가 주문한 연주기법이 모두 또렷하게 떠오른다. 연주가 뜻대로 이루어지니까 연습한 보람을 느끼면서 행복하다.
어떤 사람은 "전공분야만 연구하기도 빠듯할 텐데 꼭두새벽마다 윗도리가 촉촉이 젖도록 달리고, 글짓기와 노래도 배우러 다니고, 모터사이클도 타면서 무척 힘들게 사는데 생기는 것도 없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하면서 나를 보고 머리를 흔든다9). 교수직 외에 다른 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쓰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런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교수·의사·변호사 등의 전문가는 오로지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매달리면서 살아야 바람직스러운가? 다양하게 활동하면서 지내면 여러 가지 반찬을 먹거나 88개의 피아노 건반을 조화롭게 치는 연주처럼 삶이 맛깔스럽고, 한 가지만 활동하면 한 가지 반찬만 먹거나 피아노 건반을 하나만 두드리는 것처럼 단조롭지는 않겠는가? 그대가 생각하는 웰빙(well-being)은 어떤 삶인가?"
"움직일 때마다 돈이 생겨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돈을 왜 버는가? 많이 쌓아두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려고? 고스란히 저 세상으로 짊어지고 가서 많이 거머쥐고 살았다고 자랑하려고? 돈을 벌어서 자신을 계발하거나 남을 위해 올곧게 쓸 줄도 모르고 거머쥐기만 한다면, 그 돈의 가치는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아는가?"
"가만히 눕거나 앉아 있으면 무엇이 생기는가? 누울수록 몹쓸 성인병이 생기고 달릴수록 혈기방장(血氣方壯)한 튼튼한 몸이 생기는 것을 아는가?"
1) 고두밥 : 몹시 된 밥.
2) 바투 : 두 물체 사이가 썩 가깝게.
3) 자질 : 자로 물건을 재는 일.
4) 꽃물 : (부끄럽거나 흥분하여) 불그레해진 얼굴 빛.
5) 목비 : 모낼 무렵에 한목 오는 비.
6) 게검스럽다 : 욕심껏 마구 먹어대다.
7) 괘다리적다 : 멋없고 거칠다.
8) 성에 차다 : 마음에 흐뭇하다.
9) 머리를 흔들다 : 싫어서 진저리를 치다.
첫댓글 모두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 노래 잘 부르는 재주를 가진분이라 생각하는데..축하합니다.
달릴 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그러더군요. 교수님이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