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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패해 독립국 지위를 잃고 속국이 된 나라의 4가지 유형!
몇달전에 “전쟁에 패해 망한 나라의 3가지 유형” 을 올렸으니 이 글은 그 2편인데, 인류 5천년사
는 침략전쟁의 역사이고.... 승자는 대왕을 넘어 황제를 칭하며 세계 역사를 써 온 반면에 전쟁
에 패한 나라는 망하거나 속국이 되어 노예 같은 삶을 살았으니 이것이 실제 인류의 역사 입니다.
동서고금 수천년동안 이웃나라는 예외없이 철천지 원수지간이니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
와 아카드, 그리스와 페르시아, 로마와 게르만족의 나라, 오스만투르크와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영국,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러시아, 중국과 고구려, 신라와
왜국, 중국과 북방민족, 베트남과 중국, 태국과 버마, 인도와 파키스탄, 한국과 일본 입니다.
이웃나라간에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은 서로 국력이 비슷하다는 것이니 만약 한나라가
쇠퇴하고 이웃나라는 강성해지면 물이 수평이 기울어지면 흐르듯, 반드시 이웃나라
를 겁박해 조공을 요구하고 불응하면 침략해 속국으로 만들거나 멸망시키니 약소국
은 강대국 너머 제3국과 동맹해서 대항하는데.... 국력이 강해졌는데도 힘 자랑을 하지
않고 우린 평화를 선호하는지라 이웃나라와 선린우호 한다는 예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도 5번이나 망했으니 완전히 망한건 몽골족 원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 2번
이지만, 중화민족의 발상지 낙양과 장안등 중원을 잃어도 사실상 망한 것이니 5호16국시대 동진과
여진족의 금나라에 수도 카이펑이 함락당해 황제가 포로가 되고 도주한 남송이 그러하며 아편전쟁
에 패해 반식미지로 전락했으며...... 또 한나라는 흉노에게 금은과 비단에 공주를 바치며 조공했고
진(陳)은 북위에, 서위와 동위는 돌궐에, 송나라는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에 조공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 에서 한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고, 열사람을 죽이면 살인마이며 백사람을
죽이면 희대의 흉악한 살인마 짐승이며, 천사람을 죽이면 장군이라 부르고 만사람을 죽이면 영웅으로
높이며 십만명을 죽이면 세기적 대영웅이자 위인전에 실릴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광개토대왕, 징기스칸과 나폴레옹등 영웅이라는 인물들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살인자들 입니다.
침략을 당해 전쟁에서 패하거나 혹은 전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강대국 강요나 회유, 또는
자발적으로라도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져 나라와 왕조는 유지하지만..... 사실상
강대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경우에도 그 자유의 정도에 따라 비교적 독립적인 나라
와 명목상의 속국 및 실제적인 속국 그리고 괴뢰국 4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진다고 봅니다.
비교적 독립적인 나라는 로마와 동맹한 페르가몬과 고구려의 보호국인 신라이고 명목상의
속국은 앗시리아 지배기의 이집트와 명나라 및 청나라의 제후국인 조선이며
실질적인 속국은 몽골 지배하의 고려와 맥아더 아래의 일본 그리고 4대국 신탁통치기
의 독일이고 괴뢰국은 후량, 보덕국, 로마공화국, 만주국 그리고 버마국 등이 있는가 합니다.
1. 비교적 독립적인 나라
(1) 로마의 동맹국인 페르가몬
페르가몬은 소아시아의 고대 그리스계 도시였는데,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281년– 기원전 133년
동안에 아탈로스 왕조가 다스린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그리스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중
한곳으로 탈바꿈 시켰으니 페르가몬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중 하나로 요한 묵시록에 인용되었습니다.
아탈로스 1세는 침공해온 켈트족을 물리쳤을뿐만 아니라 셀레우코스 왕조 및 마케도니아
에 맞서 전쟁을 치뤄 국체를 보존하는데 성공했으며.......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는
그리스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는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팽창욕을
보이자 위협을 느낀 아탈로스 1세는 로마와 동맹 관계를 맺으니 탁월한 선택 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로마에 침략당해 멸망햇지만 페르가몬은 로마의 동맹국
으로 이득을 얻으며 독립을 유지하는데, 아들 에우메네스 2세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의 승리에 일조하니 페르가몬은 인구가 20만을 넘는 도시로 성장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으니.....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업적은 페르가몬 도서관을 지은 것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페르가몬 도서관의 장서 수는 20만을 넘었다고 하며 이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 가는 규모였으며, 동생 아탈로스 2세는 에우메네스 대신 나라를 지킨 적도 있고
형이 죽자 형사취수로 그의 왕비와 결혼했으며 로마와의 동맹을 잘 유지하였고 필라델피아
라는 도시를 건설했는데..... 로마 제정시대까지 남아서 신약 성경에 페르가몬과 함께 등장합니다.
아탈로스 2세가 죽자 에우메네스 2세의 아들이 아탈로스 3세로 즉위했는데 취미생활에
몰두하다가 아들 없이 죽으면서 내란을 우려한 끝에 아예 로마에 나라를 넘기기로
결정하였으니..... 불만을 가진 참칭자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바로 로마에 진압당하고
페르가몬 왕국은 로마, 폰토스와 카파도키아 등에 의해 분할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2) 고구려의 보호국인 신라
광개토대왕비문에 보면 1면 8행에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잔, 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 “백잔(= 백제), 신라는 옛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물론 광개토대왕의 공덕비 인지라 실제 보다는 엄청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1면 9행에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벌*잔국. “그러나 신묘년(391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
2면 7행 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통, 왕순하평양. 이신라견사
백왕운, 왜*인만기*국경, 궤파성지, 이노객위민*, 귀왕청명. 태왕은자*, 칭기충성,
왕은 남으로 평양을 순유했다. 그리고 신라가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이 나라 안에 가득 차 성과 못이 파괴되니 노객(신라왕)은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한다고 했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들의 충성을 칭찬했다.
백제 아신왕은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패하자 보물과 세포에 왕제와 대신 10명
그리고 남녀 1천인을 바치고 항복해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한후, 설욕을 위해
397년에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면서 태자 영(전지왕)을 볼모(인질)로 보내게 됩니다.
왜가 침공하기 시작한 392년에 내물 마립간(왕)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393년 왜군의 수도 포위는 어찌 물리쳤지만, 399년 왜군이 가야군과 함께 서라벌
을 재차 포위해 함락당할 지경에 이르자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5만 고구려군이
신라를 구하고 김해 종발성까지 진격해 함락하니 왜군과 김해 금관가야는 일본으로 달아납니다.
이때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할 좋은 기회를 맞았는데 후연의 모용보가 모용희를 선봉
으로 고구려 요동을 공격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7백리 땅을 뺏으며 고구려인
5천명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지만.... 광개토대왕은 출동시킬 군대가 없으니 구원병을
보내지도 못하고 그냥 무력하게 보고만 있었으며 김해로 내려간 군대를 급히 소환합니다.
5만대군은 사망자에 부상자도 있고 성한자도 기진맥진해 탈진상태인지라 두 성을 수복하지 못하고
2년을 휴식한후 후연군의 방비가 엄중한 신성과 남소성은 공격하지도 못하고 멀리 북쪽으로
크게 우회해 대비가 전혀 없는 숙군성을 공격해 보복한후 바로 귀환하는데, 신라왕을 인질로
잡아둔 실성으로 교체하고..... 병사 1백명을 서라벌에 주둔시켜 수십년동안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실성왕은 402년에 내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냈
으며 417년에는 내물마립간(왕)의 태자 눌지까지 죽이려다가 오히려 눌지에게 살해
되었으니... 실성을 제거하고 즉위한 눌지 마립간은 왕제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하여
박제상(朴堤上)을 왜에 파견하니 희생적 기지로 탈출하여 418년 귀국하는 데 성공합니다.
2. 명목상의 속국
(1) 앗시리아 지배기의 이집트
이집트는 기원전 13세기에 최초의 세계대전에서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여서 팔레
스타인 지역을 확실하게 지배하였는데.... 그후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왕은 기원전
664년 에티오피아계 흑인 25왕조를 공격해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이집트 정복을 달성합니다.
교통이 불편하니 아시리아는 먼 원거리인 이집트를 직할령으로 통치하지 않고 조공을 제공하는
봉신국으로 두었으니..... 아시리아 제국이 이미 알고 있던 프삼티크 1세를 이집트 제26왕조
의 파라오로 즉위시키는데 거리가 워낙 멀다보니 이집트는 내정간섭 까지는 받지 않은 듯 합니다.
아슈르바니팔은 무예 외에 지식욕이 왕성하여 학문에도 식견이 높았으니 본인이 수집한
점토판 문서들을 모아 수도인 니네베에 세계 최초로 체계적인 도서관을 세웠는데,
아시리아가 망하니 이집트도 신바빌로니아에 이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의 침공을 받아 파라오 프삼티크 3세가 죽고 페르시아의 제1차 점령기가 시작됩니다.
제27왕조 파라오는 페르시아 황제들이 겸임했는데 다리우스 1세등 페르시아 군주들은 이집트
의 종교를 존중하며 관대한 지배를 했으나, 페르시아가 그리스와 전쟁에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며 재원이 부족해지자 부유한 이집트에 과중한 세금을 거두었고 크게 반발한
이집트는 페르시아가 왕위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제28 왕조를 세워 독립합니다.
제30 왕조 시대에 페르시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35만명 대군을 몰고 침략하며 무너지니 페르시아
의 2차 통치기를 제31왕조라고도 하지만, 정복 11년만인 다리우스 3세 시대에 페르시아가 무너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으나 그가 요절하자, 이집트는 부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차지했으니 후손이 클레오파트라여왕으로 훗날 악티움해전에 패배해 로마에 정복되어 속주로 떨어집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후 이집트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데 총독인 알리는 독립해 이집트 왕국을
건국했으니, 그럼에도 명목상으로는 오스만투르크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본국 군대의 진공을 염려
한지라 만약을 위해 동맹을 맺고자 오벨리스크를 프랑스에 선물하니 현재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습니다.
저 오벨리스크는 3300년 전 이집트 람세스 2세 때 만들어진 것으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인데
1836년, 이집트 정부가 룩소르 신전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프랑스에 증정하니 당시 230톤 무게에
20m 높이가 넘는 이 거대한 돌 기둥을 이집트에서 프랑스까지 옮기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습니다.
프랑스는 2년간 거중기와 배를 특별 제작했으며 니데를랑데르를 책임자로 임명하니 오벨리스크
를 수평으로 눕혀 배 안으로 싣기까지 겨우 400m를 움직이는데 몇 주가 걸렸으며 룩소르
를 떠나 배로 파리에 도착하기 까지 무려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는데....... 저 기념물은
파리에 도착해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가 설치된 장소였던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진 것입니다!
(2) 명나라와 청나라의 제후국인 조선
이성계는 1392년 11월 한상질을 명나라에 보내 우리나라 이름을 지어 주십사며... 조선
(朝鮮) 과 화령(和寧) 2개 후보 이름을 바치는데.... 화령(和寧)은 1258년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곳으로, 1356년 공민왕이 북진해 수복후 화주목으로 부르다가
1369년 화령으로 개칭한 곳인데, 이성계의 출생지니 1393년에 영흥으로 바뀌게 됩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동이(東夷) 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이 명칭을 근본으로 삼아 후세에 이를 본받도록 하라.” 라고 하명하니 화령은 국호에서
폐기되고 1393년 2월 15일에 국호를 조선이라고 칭하는데, 우리나라 이름이 “화령” 이 될뻔 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정적 “이인임의 아들” 로 잘못 기록된걸 고쳐
달라고 수없이 사신을 보내 애걸복걸하니 종계변무 宗系辨誣 라 하는데.... 1394년에
발생해 수정되는 1584년까지 190년이나 걸렸으며, 수정본을 받은건 1598년으로
황정욱과 역관 홍순언등 19명의 사신 일행 모두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봉해 큰 상을 내립니다.
명나라에 비치는 공물은 금은과 조선의 토산물에다가 사냥용 매, 소년을 거세해서 보내는
환관에다가 처녀를 공녀로 보내는 것이니, 황제국이 제후국에 공녀를 요구한 목적은
궁녀를 확보하기 위해서인데 공녀가 고관의 첩이 되거나 유곽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였으며 대부분 공녀는 황제국에 가서 궁녀가 되었습니다.
황제국이 궁녀를 요구하는 것은 궁녀를 모으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니 동서고금 어느나라든
궁녀를 구하는 것은 힘들었는데... 사극이나 동화에서 궁녀가 꽤 괜찮은 자리였던 것처럼 묘사
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평민 여성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궁녀 자리를 기피했는데, 의식주는
보장되지만 결혼할수 없으며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에다가 독신으로 살면서 중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여자들은 궁녀가 되지 않으려고 안달이었으니 노예 신분이거나 노예가 아니라도 집에서 입 하나라도
줄이지 않으면 굶어죽는 판이라 딸을 궁녀로 취직시킴이 대부분이니 개중에는 왕비가 되는 경우
도 있었지만, 이런 일은 몇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했으며 궁녀중 대다수는 평생토록 임금의 근처에
가지도 못했고, 어쩌다 왕의 관심을 끈다 해도 왕비나 후궁에게 폭행당하거나 목숨을 잃기 쉬웠습니다.
가장 많은 궁녀를 중국에 바친 임금은 세종대왕인데 대왕은 조선 처녀를 잡아다가 명나라
에 바치는 일은 조금도 소홀히 할수 없었으니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잡아들이는데....
차출된 여성이 신세를 비관하다가 자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며 또 명나라에서 대왕
에게 좋은 집안 출신의 여성을 포함해 보내도록 요구하니 상류층 여성들도 잡아서 보냅니다.
다음으로 사냥용 매를 잡아 보내는 일도 큰 일이었으니 세종대왕은 이징옥을 귀양보내게 되는
데.... 이징옥은 힘으로 보면 고려의 척준경과 함께 한국 역사상 최강으로 불려지는 인물
로 병든 어머니가 "살아있는 멧돼지가 보고 싶다." 고 말하자 큰 멧돼지를 몇날 며칠을
쫓아 다니며 집 앞마당까지 몰아와서 기진맥진해 뻗어있는 걸 어머니께 보여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김종서 밑에서 종군하며 강경 토벌을 주장했으니 함경도에서 수백년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여진족들을 죽이고 쫓아내어 6진을 개척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니..... 세종 시대에는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는데 사신이란게 옛날에 조선에서 소년을 잡아 거세를
시켜 보낸 자들 중에 출세한 자들이니..... 자신을 불구로 만든 조선에 대해 악감정이 있었습니다.
사신으로 온 윤봉이라는 환관은 ‘조선 매’ 인 “해동청” 을 제멋대로 잡고 남의 집 사냥개를 빼앗자
이징옥은 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잡은 해동청을 풀어줘 버리자 윤봉이 난리치니 "저거 그냥
잡종이에요" 라고 둘러댔으니 세종대왕은 이 일로 이징옥을 유배 보내는데.... 그는 훗날 함경도
도절제사가 되었는데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측근 이징옥을 파면하고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합니다.
이징옥은 한양으로 오던중 수양대군 정변 소식과 김종서 죽음을 듣자 돌아가 박호문을 살해한후 군사를
일으켜 북방으로 가서 여진족을 끌어들여 황제를 칭하며 옛 금나라 수도 오국성에다가 대금(大金)을
세우려고 했으니 이징옥의 난으로 부하 정종과 이행검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살해되는데, 정조때 재상
채제공은 번암집에서 이징옥의 난은 단종 복위운동으로 이징옥이 칭제건원한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태종이 발탁한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동래현의
기생이었는데 장영실은 기술력이 뛰어났으나 어머니가 천민(기생)인지라 동래현의 관노였는
데, 실용주의자인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 윤사웅, 최천구등과 중국에 보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고 장영실 나이 34세 때인 1423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합니다.
이후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종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고 1424년 물시계를 만들었으며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하에 천문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니, 1434년
수력으로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와 1438년 옥루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습니다.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수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을 새로 지어 안에 설치했는데 이때 천문 관측을 위한 대간의(大簡儀)를 비롯해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와 종묘(宗廟) 앞에
설치한 공중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제작합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에 정4품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1434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으니..... 갑인자는 약 20여만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장을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이 깨끗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2장만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져서 자본을 교정한 후에 다시 찍어야 했다고 합니다.
장영실은 세종이 온천갈때 쓰는 가마를 만들었는데 세자가 가마에 금이 간 것을 발견했고 부숴지는
사건이 일어나니, 조정에서는 장영실 무리에게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는데 매를 맞고 쫃겨난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런데 장영실쯤 되는 위대한 기술자가 가마 하나 만들지 못해 부숴졌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천문지리를 관측하고 달력을 만드는 일은 천자인 중국만 할수 있는데 제후국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황제에 대한 역모라, 명나라에 잡혀가야할 중대한 죄이니 세종이 일부러 가마를
부숴지게 해서 곤장 80대를 쳐서 내쫓음으로서 목숨을 구했다는? 명나라 사신은 뇌물로 입을 막아야....
또 명나라에 광해군 세자 책봉을 윤허해 달라는데 대해 "명나라 예부는 조선의 세자를 세우는
의논을 단연코 따를수 없으므로, 장자(長子) 를 세우는 상경(常經) 을 주장하여 이번(夷藩)
을 안정시키고 뒤폐단 막기를 성명(聖明) 께 간청한 일 때문에 자문을 보내니 확실히
허락한 적이 없다” 라 하고는 칙사를 보내 직접 임해군을 만나서 조사를 하기 까지 합니다.
태조 이래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며 사대(事大)를 국책으로 삼았으니 중국 사신이 오면 국왕이
영은문에서 영접했는데, 1890년 자의대비가 별세하자 청나라에서 조문사절이 오니 고종은 서양 외교관
들이 보는 근정전 마당에서 청나라 사절 앞에 2번 무릎을 꿇고 8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이궤팔고
두례 二跪八叩頭禮 후에...... 황제의 칙서를 받이 근정전 안으로 모셨으니 서양 공사들은 혀를 찼습니다?
명나라에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를 했었는데 병자호란때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인조가 삼궤구고두례
(三跪九叩頭禮)를 한 전례에 따라 황제가 아닌 사신이니 1회씩 줄인 것인데,“궤”(跪) 하면 무릎을 꿇고는“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 호령에 따라 일어서며 “궤” 하면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하기사 누구는 세종대왕께서 중국 사신에게 20번 절했다면서 울분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1419년 환관
황엄이 사신으로 오니 세종은 신하들과 모화루로 나가 맞이한 다음 경복궁에 돌아와 4번 절하고
고명을 받은 후 뜰에 내려와 다시 4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갖추어 입은후 사은하고 4번
절하고 향을 피운후 다시 4번 절하고 만세를 부른후 발을 구르면서 춤을 춘 후에 다시 4번 절했다는.....
그런 탓인지 일본은 운양호 사건 후 강화도 조약 제1관에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
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또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 1조에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조선은 이제 더 이상 청국의
속국이 아니니 일본이 조선을 취하더라도 청국은 더는 개입할 권리가 없다는 뜻인가 합니다?
(3) 그 외에도 오스만 투르크의 종속국 불가리아 공국(1878년 독립)과 영국의 보호국인 이집트
(1888~ 1922년 독립)를 들수 있으며 현대에도 군대가 없는 리히텐슈타인은 스위스의 보호국
이고 모나코도 프랑스의 보호국이며, 산마리노와 안도라도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보호국 입니다.
3. 실질적인 속국
(1) 몰골 치하의 고려
1231년 몽골군 중앙군 20만이 금나라로 진격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위해 잘라이르부 장수
살리타가 이끄는 3만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오니.... 9월 황해도 황주와 봉산이 함락
되자 고려 조정은 채송년이 이끄는 중앙군 3군을 출격시키니, 동선역에서 몽골 선봉대
를 물리친 후 안주의 안북성에 이르는데, 총사령관 대장군 채송년은 공성전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군진주(右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이 "뭐가 무섭냐? 웅크리지말고 싸우자!" 라고
주장하니 목소리 큰 그의 말에 따라 고려군은 성 밖에 나가 진을 치게 되는데, 다른
진주(陣主) 들과 지병마사(知兵馬事) 는 성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고... 병사들을
뒤따라 나오던 대집성은 낌새가 이상하니 발길을 되돌려서 성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1만 5천 몽골군은 고려군 2만이 성 밖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처음에 의아해 했지만 넓은 곳에서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감행하자...... 지도부가 없는 고려 3군은 우왕좌왕 하며
몽골군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며 성안으로 도주하니, 이건 전투라 부를수도 없는 대학살 입니다.
고려 중앙군은 궤멸되니 살리타이는 극소수만 안북성에 주둔시켜 동태를 살피게 하고 개경으로 진격하자
고려 고종은 스님 3만명을 모아 밥을 먹이며 기도를 시켰으나, 간절한 기도에도 부처님은 응답이 없고
개경에 도착한 몽골군은 흥왕사에 방화하며 약탈을 일삼자.... 고려는 회안공 왕정을 보내 살리타이에게
보물을 바치고 강화조약을 맺으니 몽골군은 개경과 평안도에 감독관 다루가치 72명 배치하고 철수합니다.
하지만 무사정권의 최우는 1232년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로 옮기니 살리타이는 다시 침입해 개경
을 함락하고 한양을 공격한 다음 처인성 외곽 순찰중 화살에 맞아 전사하니 철수했지만, 1235년
몽골 중앙군은 남송을 공격하면서 따로 당올태에게 약간의 병사를 주어 침략하는 등 9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고려 중앙군과 삼별초는 강화도에 숨어 나오지 않고 항복하겠다는 사신만 내보냅니다.
몽골 중앙군 20만은 금나라와 송나라를 공격하면서 배후 안전을 위해 1만~ 3만으로 9차례 고려를 침공
했지만..... 베트남은 1차는 1257년 쿠빌라이의 장수 우량하타이가 5만으로 침공했고, 2차로 1284년
왕자 토곤이 대장이 되어 몽골군에 항복한 송나라군 합쳐 20만으로 침공했으며, 3차로 1287년 왕자
토곤이 몽골군 10만에 송나라 20만으로 침공한걸 물리쳤는데.... 고려는 10분지 1에도 무느진 것입니다?
1258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니 1259년
3월 박희실을 사신으로 보내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등
40여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화도의 성을 헐고 항복했으며.... 그해 고종이 죽고 태자가
몽골에서 귀국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어 90년 가까이 내정간섭을 받는 지배를 당합니다.
1259년에 원종이 몽골에 입조할때 몽케칸이 죽고 왕위계승을 놓고 아리크부카가 이끄는 유목계 본지파와
쿠빌라이가 이끄는 농경계 한지파(漢地派)가 대립하였는데, 원종은 쿠빌라이를 찾아가 항복하니 칸이
되는데 도움이 된지라, 쿠빌라이칸은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不改土風)" 는 명을 내리니
이후 몽골이 고려를 원나라 지방으로 편입시키려고 할 때마다 고려는 이 “세조구제” 를 방패로 내세웁니다.
고려는 금은에다가 토산물이며 말을 길러 바치고 고려 처녀를 공물로 바쳤으니 충렬왕 부터 공민왕까지
80년간 정사에 기록된 것만도 50여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를 보면 그 수효가 많을 때는 40-
50명에 이르니 끌려간 공녀들의 수는 2천명을 넘었을 것으로 보지만 이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외 원의 사신이나 귀족·관리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으니 한번에 공녀 500명(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자 기사)을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차출된 여성이 신세를 비관하다가 자살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으니 1336년 (충숙왕 복위 5년) 이곡(李穀)이 원나라에서 인종에게 올린 상소문 입니다.
“한번 사신이 오면 나라 안이 소란하여 닭이나 개까지도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처녀를
모아놓고 선별하는데 사신에게 바쳐서 욕심을 채워주면 그 여자가 미인이더라도
놓아주고 다른 여자를 찾습니다. 한 여자를 데려갈 때마다 수백 집을 뒤지는
데....... 오직 사신이 하자는 대로 할 뿐이요, 황제의 명이라 아무도 거역하지 못합니다.”
“ 이런 일이 1~2년에 한두번 있는데 수효가 많을 때 4, 50명에 이르렀습니다. 선발 안에 들게되면 부모
나 일가친척은 모여 통곡하여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으며 국문에서 송별하는데...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자도 있으며 근심걱정에 기절하는 자도 있으며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습니다.”
원종의 아들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해 부마가 되니 고려왕들은 묘호를 받지 못하고 “충(忠)” 자를
붙인 왕으로 불리며 제후국으로 격하당하니 다루가치들이 감독하며 온갖 공물에다가 여자까지 바치는
등 고통이 심했으나..... 그 중에 으뜸은 남의나라 전쟁에 앞잡이로 동원되어 말을 길러 바치고 배를
만들며 공을 제공해 일본까지 바닷길을 안내하고 또 병사로 차출되어 화살받이로 죽어나간 것입니다.
원나라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고려인들을 가혹하게 채찍질
해서 불과 5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900척의 배를 건조해서는 홀돈의 원나라군
25,000명에다가 김방경의 고려군 8,000명, 사공 7,000명 등 도합 4만 대군 을 출진 시킵니다.
제1차 원정군은 출열왕이 즉위한 1274년 음력 10월 3일에 마산을 출항해 쓰시마와 이키도를
점령한후, 북규슈 다자이부(太宰府) 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의 마쓰우라를 짓밟고 하카타만
에 상륙하는데... 함선 건조와 바닷길 안내등 고려의 협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습당한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전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에 능숙하고 화기(철포)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데도 일본군은 강력히 저항하는데.... 마침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30~ 40% 에 달하는 많은 함선과 1만 3천의 병사를 잃고 철수하니, 여몽 연합군을 위협한
태풍을 일본인들은 바다의 신이 외적을 막아주는 바람이라 하여“카미카제(神風 신풍)" 라 불렀습니다.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왔는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절반인 1만 3500명이나 되는 피해를 입었는데도, 원나라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탐라
(제주도)에 목마장을 두고 일본정벌을 위해 정동행중서성 이라는 관부를 고려에 설치
하며 사신을 보내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막부의 도키무네 에게 사신들이 살해 됩니다.
마침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는 1281년(충렬왕) 제2차 일본 정벌을 하니 고려도 적극적
으로 원정에 참여하여 충렬왕이 마산을 방문해 전선 건조를 독려했으니... 충렬왕은
일본원정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홍다구 등 부원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신장시키려고 한
것이며 또 몽골 공주의 아들인 충선왕과의 권력다툼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 것으로 봅니다.
동로군은 마산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중국의 명주등 강남에서 출발했는데 1281년
동로군은 여· 원 연합군으로 편성되어 4만명에 함선 9백척이니 그 중에 원나라가
3만명, 고려가 1만명이었으며 함선 900척은 역시 고려의 부담 이었고 중국
강남 지역에서 차출된 강남군은 총병력이 10만명에 함선은 3,500척 이었습니다.
동로군은 홀돈과 김방경의 지휘하에 규슈 하카타만 을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수비태세가 너무나도 완벽하여 육지에는 상륙조차 못하고 인근 섬만 유린하는데,
강남군은 범문호의 지휘하에 강남을 출발했으나 늦게 도착해 오도(應島)에서
뒤늦게 동로군과 합세 했지만 또 다시 태풍을 만나 막대한 손실을 입고 실패로 끝납니다.
그후 충열왕은 애쓴 보람도 없이 몽골 공주와의 아들인 원과 대립하다가 쫃겨나고 왕위에 오른 원 즉
충선왕은 개혁 작업을 펼치니, 원나라의 의심과 아내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인해 왕위에 오른지
8개월만에 쫓겨나고 쫃겨났던 아버지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니... 인류 역사에 이런 일이 또 있었는지?
충렬왕은 며느리 계국대장공주를 다른 고려왕족과 혼인시켜서 아들인 충선왕의 즉위를 막고자
했지만 원나라의 황위계승과도 맞물리니, 충렬왕은 안서왕 아난다를 밀었고 쫃겨난 아들
충선왕은 카이산 형제를 밀었는데, 카이산이 새로운 황제로 오르자 충렬왕은 쓸쓸
하게 고려로 돌아와서 죽게 되었고..... 충선왕이 다시금 고려 군주로 오르게 되니 리턴매치 라?
하지만 충선왕은 이미 원나라의 생활에 익숙해진 상황이라 불편한 고려에는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
대도에 머무르면서 원거리에 서신을 보내 정치하니.... 귀국하지 않는 왕에 실망한 신하들이
세자 감을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를 하자 충선왕은 친아들인 세자를 죽였지만, 왕위를 강릉대군
왕만에게 물려주니 충숙왕인데 그후 충선왕은 원나라에서 권력다툼에 티베트로 유배당해 죽습니다.
충숙왕은 아버지 충선왕이 심왕의 자리를 자신의 이복조카 왕고에게 내주는 바람에 왕고에게 끊임없이
왕위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자주 원나라로 송환되는 상황이 되면서 지쳐버려서 왕이란 자리가
귀찮다며 아들 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가버리니... 왕위에 오른 정, 즉 충혜왕은 잔인무도한
폭군이라 2년만에 폐위당하고 다시금 충숙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는 버렸던 왕위에 다시 오릅니다.
하지만 복위한 충숙왕은 정사에 손을 놓은 상황이었고 얼마못가 죽으니 쫃겨났던 충혜왕이 복귀
했으나 폭군의 행태를 보이다가 폐위당하니, 어린 아들인 흔이 충목왕으로 왕위에 오르나
어머니인 덕녕공주의 섭정을 받다가 어린 나이에 자식 없이 죽으니 충목왕의 동생인 저가
충정왕으로 왕위에 오르나 어린 나이라 어머니인 희비 윤씨 세력의 발호가 심해진 상황 입니다.
충혜왕의 동생인 공민왕은 폭군인 형 이후 자신을 제치고 두명의 어린 조카들이 연이어 왕위
에 오르자 노국대장공주(황제의 딸은 아님) 와 결혼해 원의 부마가 되어 왕에 오를
자격을 갖추니, 어린 군주들로는 고려가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한 고려 조정에서는
원에 요청했고 이를 원이 받아들이면서 결국 충정왕도 폐위되고 공민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 이미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으로 강남에서 몽골군이 패퇴하고 한족들의 손에 들어간후라 한족
의공격으로 원나라가 쇠퇴해 기울고 있었으니... 이 기회를 잡아 공민왕은 부원세력을 척결하고,
쌍성총관부를 되찾는등 개혁정책을 통해 고려의 국운을 다시금 일으키려 하였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져 자신이 길렀던 자제위 청소년들에게 시해당합니다.
(2) GHQ 치하의 일 본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중인 미국 전함 미조리함에서 맥아더 원수에게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와 육군참모총장 우메스 미치로가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 원래 일본은 4차례에 걸쳐 영국 미국과 동맹국이었습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만주 요동반도를 차지했으나 러시아가 주동이 되어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압박하니 일본은 피눈물을 삼키면서 요동반도를 토해
냈는데..... 새삼 동맹에 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
으로 피신하니 친일파 내각이 무느지고 친러파 내각이 서니 조선도 러시아에 뺏깁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으로 베이징에 있는 서양공사관들이 포위되니 8개국 열강
은 군대를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격하는데 일본군은 서양 일곱나라의 군대 보다
더 많았으니, 청일전쟁 승리와 더불어 유럽에 강한 인상을 남겼으니 이때 영국은
이집트와 인도가 러시아의 남하로 위험한 상황이라 일본과 영일동맹을 체결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에 겐타로를 보내 겐타로의 하버드대 동문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나조의
무사도 책을 선물하니 대통령은 감동해서 많은 책을 자비로 구입해 미국 저명인사들에게
돌리며 “나는 친일파다” 공언할 정도니 두 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러일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이후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영국, 미국과 동맹국으로 독일령 산동반도
와 남태평양의 독일령 섬들을 공격해 손에 넣었으며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해
볼세비키정권이 수립되자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이 결성되니 서구 유럽은 도우기 위해
군대를 소련으로 진입시키는 한편 극동에서도 연합군을 구려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합니다.
공산 적군으로 부터 이르쿠츠크의 백군을 지원하기 위함인데 이 시베리아 출병에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 군대와 함께 출진한 일본군은 병력이 전체의 80%를 차지했는데....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 모두 공산군인 적군의 편에 서서 싸우게 되었고 철수하던
일본과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전투가 벌어지니 조선인들은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군과 싸운 것입니다.
일본이 영국, 프랑스 미국의 시장인 중국을 침략하고 베트남까지 진출하자 미국은 오랜
동맹국이었던 일본에 경제봉쇄를 단행하니 특히 석유금수가 문제라? 2년치 재고
밖에 없는 일본은 2년 후면 어차피 항복해야 하는지라 1941년 12월 8일 북태평양을
횡단한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로 하와이를 기습 폭격해 태평양전쟁이 벌어집니다.
한국인들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의 주장으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고
알지만 우리에게 불리한 문구는 의도적으로 빼 버리니... “ 적절한 절차를 거쳐 in due
course” 독립시킨다는 문구인데 여기서 "적절한 절차" 는 루즈벨트의 말을 빌리면
한국은 독립할 자격도 능력도 없으니 "25년간 4대국 신탁통치" 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첫번째 한국이 독립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말은 1941년 12월 발생한 태평양전쟁에서 한국이 미국편
에서 싸운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인 10만명 정도가 미군과 함께 출진해 일본군을 향해 돌격해
총알받이로 죽음으로써 미군의 생명을 구한게 있어야 하는데 10만은 커녕 단 몇명도 미군편에 서서
싸운자가 없고 광복군도 500명 소수인데다가 일본군과 단 한차례의 전투도 벌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10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입대해 전투에서 미군을 살상했으며 한국인들은
쌀과 콩에 면화를 공출하고 정신대로 가서 공장에서 일본군 군복을 만들며 징용으로 가서
탄광에서 철과 석탄을 캐고 군수공장에서 총과 탄약을 만들었으며 한국인 포로감시원
들은 동남아에서 악명을 떨쳤고 한국인 노무자들이 건설한 활주로에서 이륙한 일본기
가 미군 함정을 격침시켰으니..... 그럼 한국인들은 일본편에 서서 싸운건데 무슨 독립이냐는?
일본군에 입대한 10만 중에 다문 몇백명이라도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진지를 교란하며, 쌀 공출을 중지
하고 징용과 징병을 거부하며 거국적으로 궐기했으면, 태평양전선으로 갈 일본군 50만이 2~3년간
한반도에 투입되니 한국인들은 수십만명이 죽고 집들이 불타며 수백만 이재민이 발생했겠지만.....
그 덕분에 "미군의 생명 1만명" 을 구할수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을 주장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일본을 패전시킨 공의 70% 는 미국이라면, 중국(장개석과 모택동)은 20% 정도이고
나머지 10%는 영국, 호주, 캐나다, 필리핀 및 소련에 돌아간다고 여겨지는데....
전후 일본에는 미군정청(GHQ) 이 설치되어 일본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권한은
맥아더 원수에게 잇었으니 일본은 실질적으로 미국의 통제하에 있던 속국이었습니다.
강경 우익이 주도한 군국주의 일본이 패했으니 일본에서는 공산주의 계열이 득세하는데
1945년에 설립된 사회당은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북한을 지지한 공산주의자
들이니... GHQ 체제 아래서 1947년에 실시한 중의원 총선거에서 143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했으며 민주당 및 국민협동당과 연립하여 가타야마 내각이 출범했습니다.
하지만 사회당은 당내 좌파와 우파간의 싸움으로 분열되어 1948년에 사회당정권은 붕괴했으며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로 일본이 미군정청(GHQ)으로 부터 독립을 하자 좌파가
뭉치려하니, 우파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자민당이 탄생했고 사회당도 합쳐 좌파가 주도권
을 쥐고는, 1956년 선거에서 자민당의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정권을 잡을때 사회당도 참의원
선거에서 49석을 확보해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고 전국구 의석수에서는 자민당을 앞질렀습니다.
(3) 4국 신탁통치하의 독 일
2차대전후 4대국 신탁통치가 결정된 나라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한국 세나라인데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는 서독이 되고 소련 점령지는 동독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전에 내란을 일으켜 서로 죽였으니 철천지 원수지간인 공산주의자
와 민족주의자가 손을 잡고 공동정부를 수립해 영세중립국을 선언함으로써
소련에 적대국이 되지 않겠다고 약속해서 4대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통일을 유지했습니다.
한반도에서 오스트리아 방식을 적용하자면 이승만과 김구, 김일성 세사람이 손을 잡고 공동정부를
수립해 영세중립국을 선언한 다음 미군과 소련군을 철수시키는 것인데 김구가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지만 무산되었고 미국이 주장한 25년 신탁통치는 소련의 역제안으로 5년이 되었습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으면 중국(장개석)령 평안도와 영국령 경상도에 미국령 경기(충청, 전라)는
한국이 되고 소련령 함경도는 북한이 되었을 것이니 김일성이 함경도 하나 가지고는
6.25를 일으키기 어려웠을 것으로 봅니다? 훗날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독립할 때 한국이
러시아와 중국(대륙)의 신뢰를 얻을수만 있다면 흡수통일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데
그 외에도 청나라 치하의 외몽고와 티베트, 나치 독일의 슬로바키아 제1 공화국등이 있습니다.
4. 괴뢰국
이승만은 북한 인민군을 괴뢰군(傀儡軍) 으로 불렀지만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말을
듣지않고 오히려 숙청했으며, 북한도 남한을 괴뢰로 불렀으나 이승만은 임의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등 미국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니 둘 모두 틀린 말입니다.
몇년전 베트남 후에 왕궁내 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더니 한국군을 puppet army (괴뢰군)로 표기한지라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아마도 미군의 용병으로 참전했고 베트남까지 오는 배편과 비용이며 한국군
의 무기와 차량에 소총과 탄약이며 식량까지 미군이 제공하고, 또 한국군이 "매일 전투수당" 을
"미군에게서 달러로 받았으며" 작전지시도 받은지라 이런 의미에서 괴뢰군으로 표기한 듯 합니다.
(1) 후량 (後梁, 554년~587년)
중국 남북조시대 때 북조의 북위가 분열되어 장안의 서위와 낙양의 동위로 나뉘었는데, 남조의 양나라
(梁, 황제 소연)가 후경의 반란에 쿠데타를 일으킨 진패선이 건강(남경)에 진(陳)나라를 세우자 서위가
망한 양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군대를 보내 양나라땅이었던 강 중류지방인 양양에 세운 괴뢰국가입니다.
훗날 5대 10국 시대인 907년에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반군 출신의 주전충이 봉지였던
개봉(開封)에 도읍하여 개창한 나라인 후량(後梁)은 대량으로도 불리는데 이 나라와는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나라인데, 양양이 워낙 비옥한 땅이고 또 훗날 몽골에 수십년간 저항하는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2) 보덕국 (報德國, 674년~683년)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후 당나라에 망한 고구려 유민을 달래고, 고구려 유민의 손을 빌려 당나라
가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멸하고 백제 유민들을 억제하기 위해 백제땅이었던 금마저(익산)
에 보장왕의 서자(혹은 연정토의 아들 또는 외손자?) 안승을 국왕으로 내세운 괴뢰국가 입니다.
익산에는 과거 백제 무왕의 별궁이 있었으니 거길 왕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검모잠이 주도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앉힌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신라 문무왕
이 당나라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 손을 잡은 것에서 시작했으니 처음에는 평양성
을 칠 때 북진한 신라가 차지한 황해도 한성(漢城 재령) 에 그 근거지가 있었습니다.
평양성이 함락되고 당군 주력이 고구려인 20만을 포로로 잡아 철수한 2년 후인 670년 6월 수림성
(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 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를 죽이고 신라로 향하던중 서해 사야도(史冶島, 인천 소야도)에
이르러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漢城 재령)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
(大國)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
당하였으니, 지금 저희들은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에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일본에서 왜군 5천을 이끌고 나와 백제왕에 오른
풍왕자가 복신을 죽였듯, 고구려부흥운동에서 분열이 생기니 당군이 토벌차 남진하자 안승
은 겁에 질려 황해도에서 저항하자는 검모잠을 죽이고는 무리를 이끌고 신라땅으로 도주
하니... 문무왕이 아직 당나라 웅진도독부가 건재한지라 견제를 위해 익산에 자리잡게한 것입니다.
보덕국은 일본에 고려(고구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 받기도 하고 옛 고구려와 동일한
5부와 관등 체계를 갖추었으며, 신라와 외국의 예로 국서를 주고받는 형식을 취하는
등 국가의 형태를 이룬 모양이지만 그후 당나라 웅진도독부를 신라가 차지한
후에 신문왕이 토사구팽이라고 없애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멸망합니다.
보덕국인 대부분은 고구려계였지만 고구려는 단일민족이 아니니 고구려에 속한 말갈족(일부
말갈족은 고구려 멸망 전에 당나라에 투항)도 일부 귀순했는데 일본서기 677년 11월
신라 사신 김청평이 숙신 사람 7명을 데리고 일본에 갔다온 기록이 나오니 시기와 정세상
고구려 치하에 있다가 멸망후 고구려인들을 따라서 신라로 귀순한 보덕국 소속인 듯합니다.
삼국사기 무관지에 따르면 683년에는 말갈인으로만 구성된 부대인 흑금서당(黑衿誓幢)을 만들기도
하는데 신라 안에 말갈인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부대로 편성할 정도로 상당수 있고 등장 시기도
683년이라면 고구려 영토의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고구려 멸망 때 함께 남하한 말갈인들로 봅니다.
(3) 로마 공화국(프랑스 제1공화국 1798년~1800년)
프랑스 혁명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로마를 점령하고 수립한 괴뢰국으로 고대의 로마와는 수도가
로마라는 점 이외에 연관성 없는 나라이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레짐 하에서 고위 성직자들
은 제1신분으로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는데, 이는 혁명 세력이 가톨릭 교회를 청산 대상으로
간주하는 원인이 되어 파리 노트르담대성당은 가톨릭 주교와 신부를 쫓아내고 마굿간으로 바뀝니다.
혁명 이후 수립된 프랑스 제1공화국이 급진적인 정교분리 정책을 시행하자 교황 비오 6세가 반발
하여 혁명 정부에 협조하는 성직자들을 파문하는 강경책을 취하니 자코뱅 정권의 로베스
피에르는 교황청 입장을 따르는 성직자들과 신도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 정치를 폈습니다.
프랑스와 교황청 관계가 악화되자 프랑스 정부는 1798년 2월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장군을
파병해 로마를 점령하고 비오 6세 교황을 프랑스로 압송하며 교황령의 폐지를 선언한 뒤
수립한 괴뢰국으로 같은 해 11월 혁명에 반대하는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4세가 로마에서
프랑스군을 축출했으나 바로 다음달에 프랑스군이 탈환하여 교황령 부활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후 비오 6세의 후임인 교황 비오 7세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합스무르크제국의 지원을
받아 1800년에 로마를 탈환하고 교황령을 부활시키면서 멸망하였는데 이듬해 1801년
에는 당시 프랑스의 통령이었던 나폴레옹과 정교 협약을 맺음으로써 교황령은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인정받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탄압 또한 중지됩니다.
베르티에는 1796년 이탈리아 방면군 사단장에 부임했는데 1799년 11월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도왔으며 나폴레옹 찬동자가 되는데 국방장관인 1800년 나폴레옹이 마렝고
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하자 나폴레옹의 참모장으로 동행했으며 베르티에는 나폴레옹 지시
로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파는 대가로 1500만 달러를 받았는데 미국은 영토가 2배로 늘어납니다.
1804년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은 베르티에를 18명의 장군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시켰는데.....
베르티에의 조언은 대부분 옳았고, 나폴레옹은 그를 매우 신뢰했으니 1806년, 베르티에는
바그람 공작에 임명되었으며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을 때, 또 참모장으로
종군했고, 1809년 나폴레옹이 스패인으로 진군했을 때도 역시 참모장으로 황제를 보좌했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으니 이때 베르티에 역시 참모장으로 나폴레옹과 함께했지만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고 나폴레옹은 몰락해 갔는데 나폴레옹이 폐위되어 엘바로 유배당했을 때
베르티에는 직위에서 은퇴해 영지에 돌아가 취미생활을 즐겼다는데 나폴레옹이 엘바를 탈출해
100명 병력으로 귀환했을 때 그는 중립을 취했는데 워털루 전투 2주 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그의 부고를 듣자 나폴레옹은 "이젠 누가 내 명령을 이해하고 작전을 세우냐" 라며 통곡했다고 하는데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한 군단을 맡아 지휘하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전체적인 대국을 읽고
총사령관을 보조하는 참모로써의 재능은 당대의 유럽 제일로 알려져 있으며 사석에서
나폴레옹은 그를 "내가 한 마디만 해도 작전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재능이 있다." 라며 극찬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참모장 술트에게 프로이센군을 추격한 그루시 장군 부대를 찾으라
명령했을때 단 한명의 장교만 보내자 "베르티에라면 20명은 보냈을 거라고!" 질책했다는데
그 장교가 영국군의 포탄에 죽었기 때문에 그루시에게는 귀환 명령이 전해지지 않았으니....
만약 그루시군이 프로이센군 보다 빨리 돌아왔으면 나폴레옹은 워털루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입니다.
(4) 만주국
만주국(滿洲國)은 일본 제국이 만주사변 직후 동삼성(東三省)을 점령하여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이자 식민지로, 1931년 일본 육군의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해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를 황제로 내세웠습니다.
만주국은 천황(일왕) 지배하에 강덕제를 왕 명칭인 대동왕으로 격하시키고 명목상 원수로 하는 국가
로서, 만주족과 한(漢)족, 몽골족, 한(韓)족, 일본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 에 의한
민족자결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으나 실제 통치는 일본 제국의 관동군이 주도했습니다.
1932년 국제연맹의 리튼 조사단은“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며, 만주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의 입장을 지지해 일본정부를 비난하자 이로 인해 일본제국은
1933년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소련의 공격에 일본제국의 패전으로
1945년 8월 18일 소련이 점령했다가 1946년 5월 3일 중화민국(모택동이 아닌 장개석) 에 반환 됩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만주국이 일본제국의 괴뢰정부였다는 뜻에서 위만주국
(僞滿洲國), 약칭 위만(僞滿)이라고 낮추어 부르니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1월에 장쉐량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저우를 점령하니 국제 연맹에서는 중화민국에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인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선포합니다.
만주국의 수도는 신징(장춘)을, 연호는 대동이라 했으며, 황제는 이전 청나라의 황제였던
푸이를 옹립했고 일본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등 8개국이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는데 1934년 9월 제정 수립
을 했으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이고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습니다.
이때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하는등 만주국 경제를 책임진 인물이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인데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부장관을 지냈으며 전후 1급 전범으로 기소됐으나
맥아더가 풀어주었으며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로 일본이 미군정청(GHQ) 으로
부터 독립하자 정계에 복귀해 자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일본총리가 되어 공산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통일교와 인연을 맺었다가 금년에 외손주 아베의 암살에 까지 이릅니다.
만주국에는 군대도 있었으나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패하는등 무능력했으니 사실상 식민지
인 만주국은 황제가 꼭두각시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공격함으로써 8월 18일 망하였습니다.
20세기초 일본은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려는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일본의 국가 안전보장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니 1900년 러시아는 요시카즈단 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권익을 독점
하자 일본은 미국 등과 함께 만주를 각국에 개방할 것을 주장하며 영국과 동맹을 맺고 미국의
지원하에 1904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싸워 승리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요동 반도와 동청철도 남부의 조차권을 확보한 이후에 일본은 러시아와 공동으로
만주에 대한 이익 확보에 나서 미국이나 프랑스의 반발을 불렀는데 결국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는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념이라 선전했지만 일본인과
이주한 조선인들의 지배아래 만주족과 몽골족에 다수 한족(漢族)이 피지배층을 이루는 국가였습니다.
(5) 버마국
아시아의 40개 국가 중에 완전한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 단 한나라뿐이었으며
중국과 태국은 반식민지 였고 나머지는 오스만 투르크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델란드 및 포르투칼의 식민지 였으니.... 게다가 일본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니 동남아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한국의 김옥균과 중국의 손문에... 인도 찬드라 보스, 버마 아웅산과 우누에 네윈과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등의 독립운동가들은 서양 식민지 당국에 쫃기면 의례히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특이하게도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인들도 개인적으로 망명해온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는데 열심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영국은 미얀마를 빼앗겼고 진주한 일본군은 1943년 버마국을
세우니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자 대동아공영권을 이루는 국가중 하나였는데, 태평양 전쟁 개전 후인
1942년 아웅 산은 자신이 양성한 버마 독립군이 일본군과 함께 영국군을 공격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일본 제국은 종전후 버마 독립을 약속하여 전쟁 초반에는 버마 지역에 군정을 실시했지만 버마인들
의 전쟁 협력을 필요로 한 일본 제국은 버마를 보다 일찍 독립시키기로 결정했고, 1943년
군정을 폐지하고 반영 독립운동으록 감옥에 수감중이던 바모를 국가원수로 하는 버마국이 수립됩니다.
독립 후 일본과 협약을 맺은 버마국은 바로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일본군은 협약을을 통해 버마에
군대를 계속 주둔할 수 있었으며 또한 버마국은 태국에 버마의 일부(예전에 태국을 침공해 빼았았던)
인 동부 영토를 할양해야 했으며, 점령 초기 버마인들은 일본군들을 '아시아의 해방자' 라며 환영
했으나, 그들은 영국보다 더 가혹한 통치를 펼쳐 수많은 버마인들을 학살해 추악한 민낯을 드러냅니다.
1944년 인도 진격 임팔작전이 일본군의 패배로 끝나고 영국군의 반격에 밀려나자 1945년 3월 27일,
버마 국방상(후임은 네윈) 아웅산이 이끄는 30인 동지들은 1944년에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
을 조직했고 아웅산의 버마국민군(옛 독립군)은 편을 바꾸어 영국편에 붙어 1945년 3월 27일
일본군을 공격해 일본군과 버마국 정부를 몰아내고 종전 전 까지 버마 대부분을 탈환하게 됩니다.
더이상 버마를 통치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일본군은 1945년 4월 버마 동부로 후퇴하고, 5월 2일 영국군은
수도 랑군을 탈환했으며 일본군이 버마에서 축출되면서 버마국 정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버마국은
사실상 멸망하는데, 일본은 불교를 이용해 버마인들의 민심을 끌어모으려 했으나 동남아인들이 주로
믿는 상좌부 불교와 일본인이 믿는 대승불교의 교리상 차이 등으로 불교를 이용한 회유는 실패했습니다.
그 외에 영국령 인도 제국이 있는데 1840년 아편전쟁시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는 영국이 아니라
보호국인“인도 제국” 이었습니다? 또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요르단 : 제2차 세계대전후 독립)
에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 태평양 여러 섬나라들이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