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영국(英國) 사람들과 교제(交際)하는 것을 보고 관리(官吏)들은
조선인인 저 사람이 어떻게 영국인들과 친하며, 어떻게 영어를 알아들을까
라고 말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저희들은 오송(吳淞)에서 출범(出帆)하여 상하 이(上海) 항구에 들어갔습니다. 영국인(英國人) 두 사람이 와서 저더러 같이 가자고 하기에, 배를 중국인 물길 안내인(案內人)에게 맡기고, 그들의 보트에 타고서 그들과 함께 상해(上海)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영국인(英國人)들에게 저를 영사(領事)에게 데려다 줄 안내자(案內者) 를 청했더니, 불어(佛語)를 할 줄 아는 영국인 장교(將校) 엠슨(Arther John Empson)씨가 저를 위해, 영사(領事)에게 편지(便紙)를 한 장 써주어서, 영사 (領事)가 극진히 우리를 대우(待遇)해 주었습니다. 페레올(Ferreol) 주교(主敎) 님께서 이미 제가 온다는 것을 영사(領事)에게 알리고, 우리를 보호(保護)해 주라고 요청(要請)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교우(敎友)의 집에 갔고, 2일을 더 기다린 후에는, 제가 마 카오와 강남(江南)에서 안 적이 있는 예수회의 곳들랑(Gotteland)신부(예수회가 부활 된 후(1814년) 중국에 파견된 최초의 예수회원들의 장상(長上)이었다. 또한 그 는 강남교구장(江南敎區長) 베시(Besi) 주교로부터 강남교구(江南敎區)의 총대리(總代 理)로 임명되었다. 곳들랑(Gotteland)신부는 김대건(金大建)을 마카오에서부터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대건(金大建)이 조선을 향해 북상(北上)하던 중 강남(江南)에 들 렸을 때도 만난 일이 있었다)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에게서 5백 80원을 받아서, 4백 원은 중국인 물길안내인(案內人)에게 주고, 30원을 교우(敎友)들을 위해 썼습니다.
㉦ 그러는 동안 상하이(上海)의 관리(官吏)들은 조선사람들에게 부하를 보내어, 많은 질문(質問)을 하게하고, 이들 곁에 밤낮으로 보초(步哨)를 세워놓았습니 다. 도대(道臺, To-tai ; 시장(市長)이나 읍장(邑長)에 해당하는 관직(官職)) 자신도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와서 배를 보고 돌아가서는 쌀 20두(斗)와 고가 20근 (斤)을 보내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교우(敎友)들은, 관리(官吏)들이 많은 질문(質問)을 한 것과, 중국인(中國人) 수천 명이 달려와 구경한 것 때문에, 몹시 어리둥절해 있었습 니다. 제가 배에 돌아온 것을 알고 관리(官吏)들은 직원들을 보내어, 저희들이 온 이유(理由)와 이름, 연령, 저희들 각자의 본적(本籍) 따위를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質問)에 충분히 대답해주면서, 한편 이제는 우리를 괴롭힐 사 람을 아무도 보내지 말라고 관리(官吏)들에게 이른 다음, 쌀과 고기를 도로 가져가라고 명하였습니다. 저는 관리(官吏)들에게 두 번이나 가서, 여러 가지 일을 처리(處理)하고, 몇 가지 괴롭힘을 중지(中止)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송강부(松江府) 장관(長官)에게 자세한 보고(報告)를 했는데, 이 장관 (長官)이 나를 알고 있으며(이 장관은 아마도 세실(Cecile)제독(提督)과 함께 있을 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마음대로 얼마든지 상하이(上 海)에 체류(滯留)하는 것을 허락(許諾)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저는 호기심(好奇心)이 지나친 중국인들을 몽둥이로 몰아내고, 제게 대해서 무례(無禮)하게 구는 몇몇 하급관리(下級官吏)를 호되게 꾸짖었습 니다. 그들은 결국 관리(官吏)들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 상하이(上海) 주민들은 저를 큰 인물(人物)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리(官吏)들 은 제가 영국 사람들과 친하게 대화(對話)하는 것을 보고, 도무지 영문을 몰 라, 저의 비밀(秘密)을 알아내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습니다.
하루는 저희들이 언제 떠나느냐고 물으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저는
배를 수리하기 위해 아직 더 머물러 있어야 하오. 더구나 프랑스의 대관(大 官) 세실(Cecile)씨가 오래지 않아 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기 위해 남아있기를 원하오.
하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관리(官吏)들은 이 일에 말려들어 관직(官職)을 잃을 까봐 겁이 나서, 제가 떠나는 날만을 초조(焦燥)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이상 말씀드리는 것은 무익(無益)하고, 또 그럴만한 시간여유도 없다고 생각되 므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미 배는 수리(修理)가 끝났고, 지금은 종선(從船)을 만들게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건강히 지내며, 매일같이 조선(朝鮮)의 주교(主敎)
님이 도착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국영사(英國領事)도 안녕하시고, 저 희들을 극진히 보살펴 주십니다.
㉨ 베지(de Bezi) 주교(主敎)(Bezi 보다는 보통 Besi로 통한다. 이태리에서 출생. 중국에 와서 강남교구장(江南敎區長)이 되었다. 그는 1842년 메스트르(Maistre) 신부 와 김대건(金大建)이 조선을 향해 북상하던 중 이곳에 들렸을 때에도 그들을 친절히 대해주었다. 강남지방(江南地方)은 조선과의 연락(連絡)을 위해 매우 중요한 거점(據 點)이었으므로, 파리 와방전교회(外邦傳敎會)는 누가 강남교구(江南敎區)를 관리(官吏) 하는가에 대해 대단한 관심(關心)을 갖고 있었다)님은 아직 안돌아오셨는데, 도중 에 병으로 누워계신답니다.
남경(南京)에는 조그만 박해(迫害)가 일어났습니다. 신부님, 선원(船員)들과 조선교회(朝鮮敎會)를 위해 많은 일을 한 모든 분들에게 줄 수 있도록, 상본 (像本)과 성패(聖牌)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교회박사(敎會博士) 성 토마 스, 성 가롤로, 오주(吾主)의 양부(養父) 성 요셉, 그리고 사도(使徒) 성 요한의 상본도 보내주십시오.
신부님에게 드릴 물건(物件)을 조선(朝鮮)에서 조금 가져왔습니다만, 지금 보내드릴 수가 없고, 주교님이 오신 다음에 보내드릴 방법(方法)이 있을 것으 로 생각합니다.
언제나 신부님의 무익하고 부당한 종
김해(金海) 김(金) 안드레아 올림.』
⑦ 오송만(吳淞灣)에 김대건(金大建)의 배가 나타난 것은 그 지방 사람들에게는 큰 구경거리가 되었었다. 그 배의 이상한 생김새와,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낯 선 의복(衣服)은 대중의 호기심(好奇心)을 극도로 자극(刺戟)하여, 김대건(金大 建) 안드레아가 거기에 정박(碇泊)해 있던 영국 배들 가운데 닻을 내리는 기지 (機智)가 없었더라면, 크나큰 위험(危險)을 당했을 것이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가
나는 조선 사람인데 당신들의 보호를 청합니다.
하고 불어(佛語)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장교(將校)들은 몹시 놀랐다. 이 보호(保 護)가 관대(寬大)하게 베풀어졌다. 영사(領事)는 그를 가마에 태워 어떤 신자(信 者)의 집으로 보냈는데, 여기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는 급히 고뜰랑(Gotte -land)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선교사(宣敎師)는 동료 중의 한 사람에게 이 런 편지(便紙)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