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묵
노경애
노점상 할머니가 내 옷자락을 잡으며 사정을 하신다.
"보소? 메밀묵 사이소. 내가 직접 끓인 건데 얼매나 야문지 한번 만져보소.”
묵을 파는 할머니의 구릿빛얼굴과 묵을 채쳐 놓은 듯한 이마의 주름이 돌아가신 할머니와 너무도 흡사하다.
가을걷이가 한창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 메고 맷돌에다 메밀을 갈기에 분주하였다. 메밀묵을 만들 때마다 할머니의 눈대중은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곱게 간 메밀을 자루에 넣고, 물을 부어 짜내면 우윳빛 물이 흘러 나왔다. 뽀얗게 짜낸 메밀을 사랑채 부엌에 있는 큰 가마솥에다 부어 은근하게 장작불을 지펴놓고 주걱으로 계속 저으면 묵이 익었다. 메밀묵을 젓는 손놀림은 사공이 노를 젓는 것처럼 밀고 당기는 모습이 재미가 있어 보였다. 내가 주걱을 한번 저어보겠다고 나섰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주걱은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젓는 속도가 자꾸만 늦어지니 군데군데 멍울이 생겼다. 잠시 주걱을 저었는데 오지랖이 그을음에 시커멓게 되었고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도대체 할머니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이놈아, 묵이 타겠다. 요령이 있어야지 세상에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멍울이 진 묵은 할머니의 힘찬 손놀림에 서서히 풀어졌다. 아궁이의 나무가 거의 타들어 갈 때쯤 복작복작 소리와 함께 묵이 끓어올랐다. 할머니는 주걱을 세워서 넘어지지 않아야 묵이 완성된 것이라며 솥 한가운데에 주걱을 세웠다. 잠시 똑 바로 서 있던 주걱이 옆으로 서서히 넘어졌다. 다시 묵을 젖다가 주걱을 세웠다. 드디어 만선의 깃발을 단 장대처럼 한가운데 꼿꼿하게 주걱이 섰다. 그제야 할머니는 허리를 쭉 펴시고 땀을 훔치셨다.
할머니는 골패 모양으로 묵을 썰어서 논일을 하러 가신 할아버지에게 새참을 내가셨다. 골짜기를 지나고 재를 넘자 논에서 일을 하시는 할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는 나무 그늘에 자리를 펴고 다소곳이 앉아 술을 따라 주셨다. 할아버지는 사기그릇에 담긴 뽀얀 막걸리를 쭉 들이키시며 메밀묵을 드셨다. 할아버지는 묵을 드실 때마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야들야들하고 찰진 묵이 제일 맛있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눈길은 연신 아무도 없는 윗논을 바라보셨다. 할아버지는 새참을 드실 때마다 윗논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석우아버지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곤 했었다. 그런데 지난여름에 물꼬싸움으로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할머니는 혼자서 술을 드시는 할아버지가 안 돼 보였는지 말을 거들었다.
"오늘 석우아버지는 읍내 장에 가시던데요."
“와, 누가 묻디나?” 할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 논으로 들어가셨다.
할머니는 저녁을 지으려고 할아버지보다 조금 일찍 내려오셨다. 마을 앞 실개천에 들려 흙 묻은 호미자루를 씻고, 머리에 동여맸던 수건으로 몸뻬바지를 터셨다. 그리고 주름진 얼굴을 씻고 개운해 하시는 모습이 하루의 지친 피로가 강물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것 같아 보였다.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골목 어귀에서 개 짖는 소리가 왕왕 들려왔다. 읍내에 가셨던 석우아버지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소반에다 곱게 채를 친 묵과 술상을 보아놓고 옆집 석우네 집으로 가셨다. 서로 화해를 시키실 요량이었다. 석우아버지는 채근을 하시는 할머니를 못이긴 척 하더니 연신 헛기침을 하며 뒤따라오셨다. 뜰에 올라서자마자 큰소리로 형님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셨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침묵이 흘렀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방문을 주시하던 할머니가 앉았다 섰다 하시는걸 보니 애간장이 다 타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의 기침소리와 함께 곰방대 두드리는 소리가 탕탕 들려왔다. 뒤이어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후루룩거리며 묵 말아먹는 소리가 났다.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의 눈과 내 눈이 서로 마주쳤다.
메밀묵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겉돌던 녹말이 응어리진 마음처럼 멍울이 되고, 그 멍울들이 쉼 없이 휘휘 젓는 주걱의 원심력으로 화합이 되어 풀어졌다. 그리고 희로애락을 함께 한 사람들의 끈끈한 정처럼 걸쭉하게 메밀묵이 어우러져 주걱을 세운 것이다.
장을 보러온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질박한 삶의 숨결이 느껴지는 시장은 또 다른 내일을 위해 길게 어둠을 드리운다. 묵을 파는 할머니도 치마를 툴툴 털며 하루를 정리한다. 나는 비닐에 담은 묵이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2004. 7. 28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