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며칠 전, 제가 일하는 단체의 임원진들과 시흥시의 한 교육장소를 빌려 사용하다가 그곳 건물 앞에 몰려있는 수십 명의 외국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한국에 갓 입국하고 해당 기업체에 인수되기를 기다리는 외국인 산업연수생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직접 마주칠 기회가 있었던 임원 한 분이 나중에 신기한 듯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외국인 연수생들이 그 분과 눈만 마주쳐도 90도 각도로 꾸벅 인사를 하더라는 겁니다.
아마도 한국인 사장님과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인사를 해야된다고 교육을 받았나보다 생각을 하니 곧 연상되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한국에 송출 될 산업연수생들에게 사전에 군대식 교육을 하고 심지어는 따귀를 맞는 훈련까지 시켰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에서 일하려면 그런 단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베트남에서는 한국에 입국할 산업연수생을 위해 한국어 실용회화로 "우리도 사람이에요," "왜 나를 때려요," "왜 지금까지 월급 안 주세요" 등의 말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한국의 인력난이 심화된 80년 후반부터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지의 외국인들이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국에 꿈을 안고 찾아오고 있지만, 어느덧 35만 명에 이르게 된 이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감내해야 할 일들은 이렇듯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에 턱없이 못 미치는 저임금, 잦은 임금체불, 보상받기 힘든 산업재해, 열악한 주거환경, 작업장 내에서의 욕설과 폭행 그리고 강제감금 등의 인권침해, 그리고 인종적·문화적 편견과 차별 등의 어려움을 겪으며 한국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열악한 계층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이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보상을 받지 못하던 이주노동자들의 94년도 경실련 농성, 이어 95년에 명동성당 앞에서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외치던 이주노동자들의 농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외국인노동자상담소들이 전국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러한 단체들의 협력을 위해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이하 외노협)"라는 연대체가 조직될 수 있었습니다.
외노협이 조직된 이유는 일선에서 일하는 상담단체들이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잘못된 사회제도에서 찾고 그 해결을 제도개혁을 통해 이루어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갖가지 어려움이 대부분 우리나라의 편법적인 외국인력정책 때문에 비롯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이주노동자들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가 문제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이유는 비단 이주노동자 출신국가의 가난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의 3D 생산현장의 이주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조사한 결과를 보더라도 중소기업체의 90.7%가 "국내 인력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의 인력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정부가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 일본의 기능실습제도를 본 딴 "산업연수생제도"라는 것입니다. 최초에는 이 제도가 저개발국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기 위한 것임을 표방했으나 곧 이것이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한 노동력 도입 수단임을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실질적인 기술연수 없이 단순노동력만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들에게 붙여진 "연수생"이라는 이름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로 대우할 때 임금을 올려야 하고 퇴직금이나 각종 상여금도 지급해야 하고 노동조합 조직도 허가해야 해서 경영난과 사회불안이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를 하지만, 이는 결국 연수생들이 그들이 누려야할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권리를 박탈당한 채 억압받고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는 국가적인 필요에 의해 도입되는 연수생들의 관리가 "중소기업협동중앙회(이하 중기협)"라는 경영자 단체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보호가 미흡함은 물론, 외국인력의 도입이 무분별한 인력장사가 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연수생 선발이나 연수업체 선정·배치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중기협은 해외 인력 송출기관으로부터 막대한 로비를 받으며 이익을 챙기고 있고, 심지어는 중기협 회장이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벌금형에 처해지고 임원들이 여러 차례 송출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던 것이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담보로 한 인력장사의 현 상황입니다.
특히 이러한 구조 속에서 연수생들은 빚을 지고서라도 거액의 자금을 투자해야 연수생 자격을 얻을 수 있는데다가 중기협과 연수생 사후관리업체들에게 계약이행보증금, 연수관리비라는 이름으로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결국 "노예연수"라는 악명을 갖고 있는 이러한 제도 하에서 연수생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해당 사업장을 이탈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국내법 상 연수생이 아니고서는 생산현장에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있는 이들은 미등록노동자(불법체류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무부 통계상 전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중 미등록노동자(불법체류자)가 78%에 달하게 되는 한국의 왜곡된 현실입니다. 나머지 이주노동자들 중 연수생을 제외하고 나면 국내에서 "합법적인 노동자"로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학교수나 언론사 통신원 등 8%밖에 되지 않는 소수 전문직종 종사자들입니다. 결국 절대 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적법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나은 삶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때문에 그동안 외국인노동자상담소들을 비롯한 인권, 노동, 사회단체들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국적 때문에 차별 받지 않고 떳떳이 일할 수 있도록 산업연수생 제도를 폐지하고 미등록노동자를 양성화하여 노동허가제 혹은 고용허가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7월 국무조정실에서 발표한 외국인력제도개선방안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그들 곁에서 일해온 이주노동자 운동가들에게 실망의 차원을 넘어 분노를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개선방안은 사회단체들의 지속적인 요구에 반하여 26만 명에 이르는 미등록노동자들을 내년 3월까지 모조리 강제 추방하고 대신 문제 많은 산업연수제도를 오히려 더 확대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노동자상담소들과 사회단체들뿐만이 아니라 영세중소기업 사장들조차도 이러한 방안에 의아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체류기한을 넘겨 일해온 미등록노동자들이라고 해도 사회에 해를 끼친 것도 없고, 그동안 한국말도 익히고 작업도 손에 익혀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그들을 모조리 내쫓고 새로운 연수생들을 또 데려오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부에서 지난 5월까지는 고용허가제를 도입하겠다고 이야기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새 방안이 채택된 이유를 산업연수생제도라는 인력장사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겨온 중기협 등의 압력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개악방안"에 대응하기 위해 외노협은 기존 회원단체 외의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과 이주노동자 공동체들을 끌어모아 "산업연수제도철폐투쟁본부(이후에 연수제도철폐/강제추방반대 투쟁본부로 개칭)"를 구성하여 명동성당에서의 노숙농성을 비롯한 활발한 제도개선운동을 펼쳐왔습니다. 서울뿐만이 아니라 인천, 부천, 안산 등지의 이주노동자 밀집지역에서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참가한 집회가 진행되었고 부산·경남 등의 지방에서도 다양한 분야의 사회단체들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공동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파를 초월한 종교인들이 공동 단식농성을 했는가하면, 대학교수와 법조인들 등 전문가들이 새 방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선언을 발표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연수제의 단계적 폐지와 미등록노동자의 양성화를 골자로 하는 권고안을 채택했습니다. 최근에는 외노협과 기존에 연대관계를 맺어온 민주노총, 한국노총, 참여연대, 경실련 등의 단체들도 연수제도철폐/강제추방반대 투쟁본부와 함께 "외국인 이주노동자 강제추방반대·연수제도철폐 및 인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확대된 연대체를 구성하여 전국의 231개 사회단체가 서명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국의 사회단체들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이러한 운동에 한국사회복지사협회를 비롯한 사회복지단체들의 참여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건강사회 구현을 위한 약사회,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등의 집단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 명백한 의사 표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는 사회복지인들의 집단은 오히려 침묵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비단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체로 사회복지사들이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일에는 헌신적이면서도 막상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제도적·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거나 혹은 그 해결방안을 위한 사회운동에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현재 고용허가제에 대한 노동부의 약속도, 국회의원의 입법안도, 국내 인권·노동 전문가와 학자들의 정책적 대안 제시도, 모두 중기협이나 산업자원부 등의 힘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미등록노동자에 대한 무차별한 단속만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지난 5월까지의 자진신고제를 통해 대부분의 미등록노동자들이 신고를 했지만 조건이 까다로워 신고한 이들 중 80% 가량은 다시 단속의 대상이 되어버린 데다가, 이주노동자 운동에 참여했던 이주노동자에 대한 표적단속이 실시되고 심지어는 단속의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일단 연행부터 하려하는 가운데 출입국관리소 직원에 의한 폭행이 이루어지는 등의 인권침해도 발생하여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의 해결방안은 이주노동자들의 힘, 시민들의 힘, 사회단체들의 힘, 우리 사회복지사들의 힘, 그리고 이들 모두가 함께 하는 조직된 운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임상사회사업이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데 한계를 지녀 사회정책을 필요로 한다면, 사회정책의 개발만으로는 그것이 실행되도록 하는데 한계를 지녀 결국 공동사회조직화(Community Organization)를 필요로 한다고 봅니다. 사회사업백과사전에서 칸(Khan)박사가 공동사회조직화를 "힘있는자(권력자)와 힘없는자간의 전형적인 불균형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듯이, 저는 "지역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CO를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의 힘을 이용하여 사회를 보다 바람직하게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워온 서구식 사회사업의 양대 기둥 중 하나로 불려지는 제인 아담스(Jane Addams)가 일을 시작했던 시카고의 "헐하우스(Hull House)"도 열악한 처지에 처해있는 이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센터였습니다. 이곳에서 제인 아담스는 이주민들을 비롯한 도시빈민들에게 개별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이들의 사회개혁 집단을 조직하여 이들이 사회에 참여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을 형성하도록 하는 활동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한국의 사회사업과 사회복지학이 미국식 사회사업 내용을 주로 수입해 왔으면서 왜 이주민을 위한 지역운동·여성운동·평화운동에 앞장서온 아담스의 조직화 전통은 빼 놓았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절박한 외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복지사들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조직화, 즉 조직된 힘을 모으는 방법에 대해 조금더 관심을 갖고 변화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