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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동무
- 이윤기
절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절이 우리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적당하게 허무하고 알맞게 고즈넉한 자리 때문인가? <입해출송(入海出松)>…… 들어가는 길은 해인사가 아름답고 나오는 길은 송광사가 아름답다고 했던가? 절로 통하는 길은 들어가는 길이 나오는 길보다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한다. 올라가는 길이 내려오는 길보다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날 절로 들어가는 길, 산을 오르는 길은 처연하다.
어찌 이리 처연한가.
그는 물어보기 전에 벌써 답을 알고 있다. 자신의 기분이 처연해서 그 길이 처연하게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처연한 것은 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망초나 달맞이꽃같이 키 큰 잡초가 밭을 이루고 있다. 겨울에 말라죽은 풀은 아직 썩지 못했고 새 잎은 아직 돋아나지 못한 탓이다. 그 잡초밭 여기저기 나뒹구는 부도(浮屠), 좌대(座臺), 부서진 채 모로 누워 있는 탑신(塔身)의 잔해 사이로 기와집이 보인다. 폐사지(廢寺址)와 어깨를 대고 있으니 물어보나 마나 약수암(若水庵)일 터이다. 친구가, 약수암은 폐사지에 지어진 암자라고 했으니……
부도탑 사이를 돌면서 몇 기(基)는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쓰러진 부도탑도 있다. 화강석 부도탑은, 검은 이끼에 싸여 있을 뿐, 모양이 온전한데, 석회석 부도탑은 정수리부터 녹아 내리고 있다. 석회석에다 음각한 글씨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공룡알…… 그는, 부도탑을 둘러보면서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공룡알의 화석을 떠올린다. 하지만 공룡알은 폐사지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면 용의 알인가……
당우(堂宇)라고 할 것도 없다. 기역 자로 앉은 두 칸짜리 맞배지붕 기와집 두 채, 그것이 당우의 전부다. 본채와 요사채인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눈으로 섬돌을 올라가 본다. 본채와 요사채가 여염집처럼 거진 맞붙은 채 죽담을 타고 앉아 있다.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인 죽담의 산석들이 그러내는 무늬가 어지럽지만 곱다. 추녀에는 그 흔한 풍경(風磬) 하나 매달려 있지 않다. 기동에도 주련(柱聯) 하나 붙어 있지 않다. 겉으로 보아서는 산중에 있는 농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병풍처럼, 기와집을 두르고 서 있는 숲이 섬뜩해지도록 푸르다. 그는, 물 오르기 전의 소나무 색깔이 저럴 리 없는데, 이 계절에 무슨 나무가 저렇게 푸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오른다.
요사채가 마주 바라보이는 자리에 5,6년 자란 것으로 보이는 오동나무가 무수히 서 있다. 잎이 달리지 않는 오동나무는 을씨년스럽다. 수피는 매끄럽지만 가지는 매우 퉁명스럽다. 마당의, 오동나무 그림자가 떨어지는 곳에는 연못이 하나 있다. 연과 수련이 아직 푸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연못을 돌어서면서 그가 마른기침으로 기척을 낸다. 그리고는 방문을 차례로 기웃거리면서 귀를 기울여본다. 문이 하나쯤 열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이 열리는 대신 본채와 요사채 사이에서 비구니의 얼굴 하나 나타난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소매와 바짓자락을 둥둥 걷은 것으로 보아 밭일하다 달려온 모양이다. 홍조 위로 땀에 젖은 비구니의 얼굴이 앳되다. 날숨에서 달착지근한 냄새가 풍겨날 것 같다는 생각을 그는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리려고 한다.
그는 합장하면서, 약수암 올라온 까닭을 이른다.
“자연 스님 계시는지요? 제 이름은……”
"잠깐만 기다려주……”
젊은 비구니는 말을 이으려다 말고 요사채 뒤를 돌아다본다. 젊은 비구니 꽁무니에 바싹 달려 있었던 모양인 나이가 좀 든 비구니가 젊은 비구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를 끌고 나선다. 얼굴은 역시 땀에 젖어 있다. 하지만 홍조가 나타나는 나이는 훌쩍 넘긴 듯하다.
전날의 주독(酒毒)이 말끔히 가시지 않은 탓에 가뜩이나 흐린 그의 시야갸 더 흐려진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 직전이면 그의 시야는 곧잘 흐려지고는 한다. 그의 눈은 습기에 민감하다.
그는 자연 스님을 알아본다. 옛 모습 그대로다.
“자연 스님이시다, 그렇죠?”
“그렇습니다마는…… 혹시……”
“호성군의 옛 친구……”
“아, 오빠……”
“기억하시는군요?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기억하고 말고요.”
“옛 모습이 그대로 있군요? 타향 길에서 만나면 얼른 알아보기 어렵겠지만……”
“기억이라는 게…… 이따금 한번씩, 뭐라고 할까요, 중간 소집 과정만 있으면 꽤 오래가는 거죠. 동안거(冬安居) 끝내고 대보름 해제(解制) 나들이길에 대구 나갔다가 호성이 오빠 뵙고 왔어요. 그때 들었어요. 부인 일은 정말 안 됐습니다. 뭐라고 위로를 드러야……”
“인연이 그것밖에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힘들어 하신다고 들었어요.”
“원래 내게 없던 사람인걸요. 있게 되고부터는 분복(分福)을 이렇게 과분하게 누려도 되는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역시 과분했던 모양이네요. 많이 힘들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항아리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를 근기도 못 되지만요.”
“말씀을 낮추시지 않고요. 여고 1학년 때 뵙고는……”
“처(處)하는 데가 우리와는 성속(聖俗)으로 다른 스님이신데…… 이대로가 좋군요.”
“……좋으시다면…… 이쪽으로 오시지요. 일지는 차 좀 내어 오시고…… 아까 캔 쑥으로 좀 끓이려무나.”
자연이, 앞서 나온 젊은 비구니에게 명한다.
<자연>이라는 법명의 한자를 물어도 자연은 대답 대신 웃기만 하면서 요사채 머릿방 툇마루로 그를 안내한다. 장귀틀을 가운데 두고 청판을 <V>꼴로 마주 이어붙인 툇마루이기는 하나 너비는 자 가웃을 넘지 못한다. 암자 조성한 지 오래 된 것 같지 않은데도 툇마루 청판에는 풍우의 자취가 완연하다. 그는 앉으면서 처마를 올려다본다. 처마가 짧다. 채광하기 좋게 하느라고 툇마루를 비바람에 노출시킨 모양이다.
자연 스님이 잠깐 자리를 떠나, 본채 앞에 놓인 고색창연한 석수조 앞에서 손발을 씻고 있을 동안 그는 툇마루에 앉아 산을 내려다본다. 힘들여 가면서 오래 올라온 것 같지 않은데도 아래로 고만고만한 산들이 좍 펼쳐지면서 저만치 내려다보인다. 산 오른 보람이다.
본채와 요사채 방문은 모두 마당으로 나 있지만 요사채 오른쪽 방의 자그마한 분합문만은 산기슭 쪽으로 나 있다. 그 문 앞 마루에 앉아도 그렇지만, 그 방바닥에 앉아도 조망이 확 열릴 듯하다.
<보랏빛 석산(石山)>이라는 시구를 그는 떠올린다. 봄산을 시인은 그렇게 불렀다. 꽤 따뜻해진 대기 속으로, 온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표에서 수증기가 오르고, 여기에 햇빛이 비치면서 생기는 빛의 복잡한 간섭 작용 때문일 터이다. 작은 산들이 지어내는 무수한 골짜기는 과연 보랏빛에 가까운, 그러나 또라지게 꼬집어 보랏빛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색깔을 띠고 있다. 그 시인이 보랏빛 석산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봄산의 빛깔은 보랏빛이 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요사채 뒤에서 여자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석축 끝으로 다가가 본다. 요사채는 높이가 한 길 정도는 되는 석축을 타고 앉아 있는데, 그 석축 아래엔 밭이 있다. 밭의 색깔이 석축의 색깔과 비슷해서, 밭이 석축으로 접혀 올라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두런거리는 소리는 거기에서 들려온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가 김호성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약수암에는 비구니가 셋 밖에 없다. 자연 스님과 일지 스님은 본채로 올라와 있다. 자연 스님은 손발을 씻고 있고, 일지 스님은 차를 준비하고 있다. 밭일하는 비구니는 따라서 하나밖에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석축 가장자리까지 나아가 발밑을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눈을 의심하고 본 것을 의심한다. 석축 바로 밑에, 먹물 옷 차림의 비구니 하나, 그 옆에, 새까만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하나 더 있다. 자세히 내려다본다. 드레스가 아니라 파스텔 톤 풍경에는 너무나 생소하게 까만 수녀복이다. 진흑(眞黑)과 진백(眞白)의 경계가 뚜렷한 수녀복은 잿빛 산밭에서 유난히 튄다. 새 싹이 아직 푸르름을 지어내지 못하는 산밭에는 세 가지 색깔이 혼재한다. 수녀복의 진흙과 진박,그리고 비구니 장삼의 담묵빛 회색이 혼재한다.
약수암에 수녀가 올라와 있는 사태는 그를 경악케 한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에요. 손님을 두 분이나 맞게 되었으니…… 오빠 오시기 전에 또 한 분이……”
“오빠라니 자꾸만……”
“……불편하신 모양이니, 어쩌면 좋아요……”
“나는 스님을 뵈러 왔는데……”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는 스님도 있답니다.”
자연은 석축 가장자리로 다가가 산밭을 향해 손사레를 치면서 부드럽게 소리친다. 목소리가 맑고 기운차다. 밝고 기운찬 주인의 목소리는 불청객을 여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민지 수녀님, 민지 수녀님, 그만 올라오세요…… 그만하면 내일 씨 넣어도 되겠어요. 정우 스님, 수녀님 모시고 올라와, 얼른……”
그리고는 돌아서서 그를 향해 또 말을 잇는다. 절 나이 20년에 가까운데도 여전히 손님이 들면 반가운 모양이다.
"……한민지 수녀님이라고, 대구 남산동 포교원에 있을 때 사귄 동갑내기 친구인데, 서로 오가는 데 스스럼이 없어요.”
“아, 그렇군요, 그러기 쉽지 않은데”
“쉽지 않죠. 그런데 민지 수녀님이 먼저 그리 만드셨어요. 우리네에 견주면 수녀님들이 아무래도 윗길이다 싶어요.”
“……비구니 스님들만 계셔서 짐이 될 것을 짐작하면서도 내가 원체 이 방면으로 정보를 얻을 데가 없어서……”
“호성 오빠가 어련히 아시고 약도 그리셨을까요. 전무후무한 일이 되겠지만 이렇게 올라오셨으니 편한 마음으로 하루를 쉬어 가세요.”
“미안해요. 본적지 면사무소 들른 김에 좌고우면 않고 들렀어요.”
“면사무소는 왜요?”
“……궂은 일도 신고를 해야 한다기에……”
“……미안해요. 묻는 것이 아닌데……”
“형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49일 지나기 전에, 중음(中陰)을 떠도는 내 친구 먼길 배웅해 주실 만한 스님이 생각나시면 좀 일러주셨으면 하고요……”
“……”
“덧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도 이러고 싶군요.”
“또한 좋은 일이에요.”
“전무후무하게 묵게 되어서…… 스님, 미안하군요.”
“비구 스님들께서는 스스로 삼가시니까 드시는 일이 없고, 삼가시지 않는 비구 스님에게는 제가 거절하고……”
“약수암이 유법창의 여의(如意)로군요……”
“……?”
“에이, 내가 허튼 소릴 했어요.”
“궁금하군요. 약수암이 왜 유법창의 여의인지……”
“하기야 불가(佛家)의 이야기는 아니니…… 중국의 유법창이라는 분 얘긴데요……”
“……”
“……유법창이라는 분에게는 아주 보기 좋은 불자(佛子)가 있었더랍니다. 요즘도 스님들은 불자를 먼지 털이로 쓰나요? 유양이라는 선비가 유법창 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그 좋은 불자를 그렇게 오래 간직할 수 있느냐고 묻자 유법창 스님이 대답하지요. 탐심이 없는 사람은 달라 소리 않으니 줄 일이 없고, 탐심이 있는 사람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으니 자기 손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더랍니다.”
“절집 적요가 유법창의 여의라…… 아이, 재미있어.”
젊은 일지 스님이 찻상을 툇마루 한복판에다 놓고는 정관을 들고 잔 가실 채비를 한다. 자연 스님이 가만히 손을 내민다. 젊은 비구니에게 속세 손님 접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암시 같다. 일지 스님은 그 뜻을 읽었는지 정관을 넘기고 소리 없이 부엌문 뒤로 사라진다.
밭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우 스님과 민지 수녀는 분명히 올라와 있을 터이다. 그런데도 정우 스님이라는 비구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는 일지 스님과 정우 스님을 다시 보지 못한다.
사방에서 비오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하늘은 청명한데 왠 봄비소린가 싶어진다. 바다가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물이 가까이서 흐르는 것도 아닌데 웬 소린가 싶어진다.
“자연 스님, 여느 토굴이나 암자와는 달라도 많이 다르네요?”
“다르죠”
“오동나무를 심으셨더군요…… 연지(蓮池)도 파고……”
“예부터 이 자리가 봉황이 날아오는 터로 불렸답니다. 그래서 오동나무를 심었죠.”
“봉황이 있다는 것을 믿는 스님이라……”
“믿으면 있게 되지요.”
그렇다면 용의 알이 아니라 봉황의 알이었던가, 그 많은 부도탑은? 연지 팠으면 용의 몫이겠지만 오동나무 심었다면 봉황의 몫일 터이다. 그의 마음은, 세상에 있지도 않은 두 상서로운 동물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올라오면서 보니까 부도도 있고, 탑기(塔基), 탑신(塔身)도 남아 있더군요. 상선사지(上善寺址)라지요? 사지 위에는 다른 절을 안 짓는다지 않아요? 폐허가 된 남의 집터에 집을 안 짓듯이요. 무슨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풍수(風水)에서는, 파구(破舊)는 이미 쓴 땅이니 새로이는 쓰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라요. 옛사람들 무덤 위에다 지금 사람이 밭을 간다고 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파구에는 새 무덤을 앉히지 않아도 밭에는 앉힙니다. 그게 파구였다는 것을 모르니까요. 알아서 병인 것이고 몰라서 약인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사람 안 죽은 아랫목 없듯이 이 세상에 파구 아닌 땅이 없지 않겠나 싶어요.”
“상선사지(上善寺址)에 약수암(若水庵)이라 이렇게…… 노자(老子)스럽게 이름해도 종단에서는 야단치지 않나요?”
“야단치다뇨?”
“상선(上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것은 물과 같다, 곧 약수(若水)다, 하고 대답한 듯하군요. 종단에서 이런 선풍(仙風)을 꾸짖지 않는지 그것이 궁금해서요.”
“상선사는 천 년 전의 고찰(古刹)이니 저에게는 그 이름에 책임이 없어요. <약수>로 화룡점정의 공로가 있다면 혹 모를까…… 예수님도 옳다 싶으면 좇고 부처님도 아니다 싶으면 안 좇아요…… 민지 수녀님, 민지 수녀님, 뭐 하세요, 차 마시러 나오시지 않고…… 내외(內外)하세요?”
달라진 수녀 모습에 그는 어리둥절해진다. 그는, 비구니들이나 수녀들이 나들이에서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면 무엇을 어떻게 입고 사는지 알지 못한다. 들은 바도 없고 읽은 바도 없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가슴에 노란 <새마을 운동>이란 휘장이 찍힌, 낡디낡은 초록색 운동복을 입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기야 암자에는 수녀가 갈아입을 옷이 그것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민지 수녀는 그런 복장을 하고 나와 찻상 옆자리, 자연 스님 옆에 나란히 앉는다. 툇마루가 비좁아 마주 앉을 수는 없다. 사람 셋과 찻상 하나가 산기슭을 향해 나란히 앉은 셈이다.
자연이, 인사할 것을 권하니, 민지 수녀라는 분이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하는데, 두 손을 운동복 재봉선에다 딱 붙이는 모습이 흡사 초등학생 같다.
“민지 수녀님, 여기 계시는 이분은 우리 오빠 친구분이신데요. 어린 시절에게는 내게, 이 가시네야, 저 가시네야, 막 하시더니 이제는 처(處)하는 데가 달라졌다고, 꼬박꼬박 스님, 스님이라시네요. 온몸이 근질근질해지는데 어쩌면 좋아요?”
민지 수녀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목에다 턱을 붙인 채 스님을 홀겨보면서 웃기만 한다. 수녀복이 지어내던 청결함, 싸늘함, 아름다움이 어울려 지어내던 분위기는 간곳이 없다. 수더분한, 고요함…… 이런 것들만이 잔잔하게 민지 수녀를 감돈다.
“……중이, 오빠, 오빠, 하니까 징그러운가 봐요. 그렇죠?”
자연이, 말 좀 해봐요, 하는 듯이 민지의 어깨를 투욱 건드린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고요, 스님, 수녀님, 어려워서 그래요. 나는 내 아우라도, 성직자가 되면 반말은 못할 것 같아요. 어려워서요.”
“그렇게 안 하셔도 되어요. 민지 수녀님이나 저는 절집이나 수녀원에서만 산 것이 아니에요. 도시의 포교원살이나 공소(公所)살이 경험도 있는데요., 그런 데서는 절집 사투리나 성당 사투리는 잘 쓰지 않아요. 이 약수암도 그렇게 엄숙한 곳은 아니니까, 오빠, 저, 편하게 대하셔도 되어요.”
민지 수녀는, 웃으며 발끝을 내려다볼 뿐 끝내 말이 없다.
“이 방 쓰세요.”
“그래도 되면……”
“해지기 전에 내려가실 생각을 하고 올라오신 것은 아니셨죠?”
“묵어도 되면……”
“그러면 됐어요.”
“……”
“요사 뒤를 돌아가시면 말린 시누대가 쌓여 있어요. 한 아름 안아다 놓으시면 제가 군불 넣어드리겠어요. 구들이 아주 귀가 밝아요.”
“시누대가 뭐지요?”
“올라오시면서 못 보셨군요…… 산대나무인데, 여기 이 상선사지에 지천이에요. 해장죽(海藏竹)이라고도 한답니다. 바다(海)를 품은(藏) 대나무(竹)가 되는 셈이죠.”
“아, 그래서 아까부터 내 귀에 빗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구나……”
“밤에 바람이 불고 시누대가 바람에 솨솨 소리를 내면, 처음으로 이 집에서 밤을 새는 비구니들은 문을 열어보고는 한답니다.”
솨솨 소리를 내면…… 그는 이 대목을 들으면서 한 시인의 산문 몇 구절을 떠올린다. 그 시인은 그랬지. 좋은 글을 읽으면 마음은 원초적인 상태로 빠르게 진입하면서 어떤 근원적인 회한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그럴 때 육체로부터 에로스 ― 프로이트가 <자기 유지 능력>이라고 불렀던 생의 구체적 볼륨에 대한 인식은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다고. 그러면 엷어질 대로 엷어진 존재가 부피감 없이 솨솨 대나무 잎처럼 나부끼고, 마음은 물질성으로 무의 손가락에 편안하게 자신을 맡기게 된다고……
“세죽(細竹)이 시누대였구나…… 그러면 본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게 바로 그 시누대였군요?”
“네, 지천이에요. 가을에 시누대 베어 단으로 묶어 쌓아두면 겨울 군불 때기에는 그만이에요. 연기도 나지 않고, 타는 소리가 일품이고……”
“.……그래서 그랬구나.”
“술 하세요?”
자연이 시계를 보고는 일어서면서 묻는다. 젊은 비구니들이 마련해 놓은 음식을 손수 내어올 모양이다. 민지 수녀도 묻어서 일어선다. 그와 둘만 마주 앉는 면구스러움을 그렇게 피할 모양이다.
“비구니 암자에서 술이라니……”
“하세요, 안하세요?”
“…… 하기는 하지만.”
“그러면 됐어요.”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앉아 있던 자연과 민지가 본채로 올라간 뒤에야 서쪽 하늘을 보니 해가 떨어지고 없다. 요 한 장, 이불 한 장, 목침 하나. 방안에는 이것밖에는 아무것도 더 없다. 그는 방바닥에 앉은 채로 분합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본다. 방안에 있는 것은 그것뿐이지만 밖에는 없는 것이 없다. 하늘이 보이고 산이 보이고 구름이 보인다. 해장죽이 지어내는 소나기 오는 소리도 들리고 소나무가 지어내는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린다. 그 방이 물건 채우는 방이 아닌 까닭을 그는 납득한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그는 요사 뒤로 돌아가 본다. 길이가 두어 발 가량 되는 해장죽이 단으로 묶인 채로 처마 밑에 쌓여 있다. 해장죽 하나하나의 굵기는 엄지손가락 굵기를 넘지 않는다. 높은 산에서 자라고 있어서 그런지 키가 해변의 해장죽만큼은 크지 않다. 바싹 마른 해장죽의 색깔은 어쩌면 승복 색깔과 그리 같은지…… 석 단을 내리니 한 아름이다. 군불 때는 일이라면 배울 것도 없다.
“그냥 계시면 넣어드릴 텐데……”
“타는 소리가 일품이라면서요?”
“밑둥부터 넣는 것도 아시네요?”
“새가 새끼에게 물고기를 먹일 때는 대가리부터 먹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잘 마른 해장죽은 불쏘시개도 필요하지 않다. 잔가지에 당긴 불은 순식간에 아궁이 하나 번진다. 요사채 추녀가 훤해진다.
탁, 탁, 타닥, 탁……
마디와 마디 사이에 들어 있던 공기가 아궁이 열기에 팽창하다가 내압을 못 이기고 마디를 터뜨릴 때 나는 소리인 것 같다. 터지는 방향도 일정하지 않고 주기도 일정하지 않다. 아궁이 속은 숫제 작은 폭죽놀이판이 된다.
탁, 탁, 타닥, 탁……
살아 있을 때는 바다(海)를 감추고(藏) 있다가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를 지어내던 산대나무 해장죽이 죽어서는 폭죽소리를 낸다. 살아 있을 때는 섬뜩하도록 푸르던 시누대가 죽어서는 잿빛 승복 색깔이 되더니, 새빨갛게 타고 하얗게 스러진다. 해장죽 마디 터지는 소리는, 상선사지 약수암에 속하던 해장죽을 우주에 편입시키는 소리인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길을 바라본다. 불길은 불꽃이 사그라진 뒤에도 숙어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마디가 터지면서 결에 따라 갈라진 대나무는 소용돌이 꼴로 몸을 비틀면서 한동안 더 탄다. 그러다 다 타면 그 자리에서 하얗게 까부라지는데, 다만 허연 자국이 남을 뿐 재조차도 남지 않는다. 연기도 내지 않고 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만히 옆으로 다가서는 그림자가 있다. 민지 수녀다. 그는 엉덩이를 들어 수녀가 앉을 자리를 낸다.
“소리가 들렸어요, 부엌까지.”
민지 수녀가 그날 처음으로 그에게 한 말이다. 몇 마디 하기는 했지만 그건 모두 자연 스님에게 한 말이지 그에게 직접 한 말이 아니다.
“수녀님과 스님, 두 분 사이좋게 지내시는 게 보기에 참 좋군요.”
“너무 당연한 걸…… 보기 좋다시네요?”
“민지 수녀님, 나는 잘은 모르지만……”
“잘 모르면서도 잘 모른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저희 둘은 정말 아는 게 없는 걸요.”
“그러니까 아는 것이 없는 상태로 돌아간 건가요?”
“아는 것이 생기면 돌아가기 힘들어요. 저희 둘은 정말 아는 게 없으니까 쉬워요.”
자연 스님이, 얼굴에 불빛을 가득 받으며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지나치면서 한마디 거든다.
“……저러신다니까, 공부 많이 하신 분이.”
“……”
“……”
자연 스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한다. 침묵에 불길이 사그라진다.
그가 다시 대나무 단에서 한 묶음을 갈라쥐고 아궁이에 밀어넣는다. 안쪽에 남아 있던 불씨가 대번에 불길을 다시 일으킨다. 또 한 차례 폭죽놀이가 벌어진다. 민지 수녀와 그는 말 한 마디 없이 대나무 터지는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다.
자연이 그가 묵을 방에다 촛불을 켜고 저녁상을 그리로 들인다. 그, 자연, 민지, 이렇게 세 사람의 겸상이다. 그는, 여느 절 음식과는 달리, 파, 마늘이 들어간 것에 한 번 놀라고 밥상에 술병이 올라와 있어서 두 번 놀란다. 자연은, 오신채가 절집에서 금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민지 수녀를 위해서, 술 역시는, 손님이 오면 그 손님 식성에 맞출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럴 기회가 없다시피 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술이 좋군요.”
“말린 국화 잎을 넣어, 술을 아주 진하게 담글 줄 아는 보살이 있었어요. 작년 가을에 올라와서 담아주고는 땅속에 보관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마실 만한가요?”
“참 좋은걸요. 그런데 작년 술이 아직까지도 용케 남아 있었군요?”
“조금 전에 드신 잔이 항아리의 첫잔인걸요.”
“아…… 작년에 담은 술의 첫잔이라……”
자연과 민지는 그가 권하자 맛만 볼 뿐 마시지는 않는다. 그도 더 이상은 권하지 않는다. 성직자는 술을 삼갈 필요가 없다, 다만 비속해지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가 어느 신부로부터 들은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자연과 민지에게는 하지 않기로 한다. 그는 그 싸아한 황갈색 국화주를 조용히 자작한다. 마실수록 그는 기이한 갈증과 모호한 평화를, 이 두 가지 상호 모순되는 감정 상태를 갈마들이로 경험한다. 해장죽이 지어내는 바람소리, 물소리가 들려온다.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는 채로 시간이 흐른다. 자연은 벽을 지고 앉아 맛만 보았을 뿐, 술이 그대로 든 사기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민지는 그 옆에 다리를 나란히 꼬고 앉아 왼손 검지에 낀 반지를 뱅글뱅글 돌린다. 그는 일정한 주기로 잔을 끌어 마시고, 고개를 모로 꼬고는 따르기를 계속한다.
“자연 스님, 미안하지만 더 가져다줄 수 있어요?”
“독하던데...”
“나는 꽤 많이 마시는걸요.”
“민지 수녀님, 아직 안 주무셔도 되어요?”
“괜찮아요. 스님은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자연이 하얀 술병을 들고 일어선다. 민지도 거기에 묻어 나간다. 자연의 발소리는 본채 쪽으로 멀어져 간다. 해장죽이 아궁이 벽을 긁는 소리에 이어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또 한 차례 들려온다. 민지 수녀가, 자연이 돌아올 때까지 혼자 해장죽으로 군불을 때고 있음에 분명하다.
“오빠는 옛날에 노래 잘 부르셨는데...”
자연이 다시 채워온 술병을 건네면서 한 말이다.
“내가?”
“호성이 오빠는 이태리 가곡, 오빠는 우리 가곡을 잘했어요.”
“……”
“해봐요. 그러면 도움이 될 거예요.”
“도움이 되다니?”
“슬픔을 잊는데...”
“잊다니?”
“잘 아시면서?”
“……에이, 아니에요. 나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이렇게 나돌아 다니는 게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동무해 주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요……”
“노래라…… 내가 하면 자연 스님도 할 수 있어요?”
“……있죠.”
“민지 수녀님도?”
“……네.”
“오빠는 옛날에는 <그 집 앞>을 잘 부르셨는데……”
“이제 그런 노래에는 감정을 다 못 실어요. 실을 것이 많아지니까 품이 넉넉한 노래를 부르게 되더라고요.”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갑니다……>, 오빠가 이 대목 부르던 목소리 아주 오래 생각났어요.”
“저런, 그건 2절의 가사인데?”
“그래요.”
“2절 가사는 마흔을 넘겨야 맛을 아는데, 그때 벌써?”
“반드시 그런 건 아니죠.”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1절에서 2절, 3절로 갈수록 가사가 점점 깊어간다고…… 볼래요?”
비구니 셋이서 지키는 높은 암자에서, 그것도 수녀까지 하나 끼여든 암자 요사채 좁은 방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그가 노래를 부르기로 한 것과 혼자서 마신 국화주 한 병의 취기와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취한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그의 눈에는 자연과 민지가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자연스럽다. 자연과 민지가 만일 부자연스럽게 여겼다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턱이 있겠느냐고 그는 반문한다. 더구나 그 둘은 그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겠노라고 그들이 믿는 신들에게 서원까지 세운 출가인들이 아닌가.
그는 그 자신이 태어나기 오래전에 만들어진 노래를 한 곡 3절까지 부른다. 그러나 그 노래말은 자의식으로 넘치는 그 자신의 가슴을 울렸을 뿐, 자연과 민지의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
자연도 노래 한 곡을 답창한다. 하지만 그 노래 역시 두 사람의 가슴을 치지 못한다. 자연이, 노래에다 자신의 심정을 의탁하는 문화에 버릇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래를 선교 수단으로 활용한 이력이 풍부한 가톨릭 문화의 계승자 민지 수녀의 노래도 공소한 울림을 면하지 못한다. 민지 수녀에게는 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밤의 그 자리는 그가 옛 노래 <세 동무>를 부르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지나간 그 옛날 푸른 잔디에
꿈을 꾸던 그 시절이 언제이던가
서녘 하늘에 해지고 날은 저물어
나그네의 갈 길이 아득하여요.
1절 끝났을 때 민지가 속삭였다.
“<아득하여요……>래요, 참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장미 같은 네 마음에 가시가 돋쳐
이다지도 어린 넋이 시들어졌네
사랑과 굳은 맹세 사라진 자취
두 번 다시 피지 못할 고운 네 모양
그가 부드러운 저음, 표정이 풍부한 음색으로 2절을 노래하고 있을 때 자연과 민지의 눈길이 잠깐 허공에서 만난다. 자연이 일어설 눈치를 보인다. 민지의 손길이 자연의 무릎에 실린다. 노래는 3절로 이어진다.
즐거웁던 그 노래도 설운 눈물도
저 바다의 물결 위에 띄워버리고
옛날의 푸른 잔디 다시 그리워
황혼의 길이나마 찾아가오리.
노래를 끝낸 그는 국화주 한 잔을 빈 잔에다 따른다. 그 잔 들어 마시면서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노래의 노래말이 자연과 민지의 마음 한 구석에 가 닿았으리라고 짐작한다.
민지 수녀가 먼저 묻는다.
“선생님, 처음 듣는 노래인데, 이 노래, 어떤 노래예요?”
“좋아요?”
“기가 막히게요.”
“나도 좋아서 그냥 배웠어요. 언제, 누가 만들었고, 누가 불렀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배웠어요. 나중에 전문가에게 물어 보았어요. 1931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 <세 동무>의 주제가였다고 하더군요. 작곡과 작사는 김서정이라는 사람이 하고, 노래는 그 영화의 주연 배우였던 김연실이 불렀다고 하는데, 제작될 당시에는 제목이 <세 걸인>이었대요. 총독부가 검열에서 부정적인 제목을 문제 삼아서 <세 동무>로 고쳤다는군요. 그러니까 <세 거지 동무>였던 모양 아닌가요?”
“……선생님, 우리 친구해요.”
민지 수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린다.
그는 민지 수녀의 시선 받기가 버거워 고개를 돌리고 딴소리를 한다.
“……고복수가 다시 불렀어요. 나는 고복수 흉내를 내었고요. 시인 이동순은 고복수의 노래를 두고, 고복수의 노래는 깊은 밤 강물이 잔잔이 흘러가듯 길게 뽑아내는 유장함과 거기에서 묻어나는 한과 애수가 참으로 곡진하다고 했어요. 고복수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곡조 속에 들어 있는 슬픔의 정한이 마치 한지(韓紙)에 먹물 배듯, 번지듯 듣는 이의 가슴 밑바닥에 침전된 비애를 포근히 감싸준다고 했어요.”
“오빠, 한번 더 불러주세요.”
자연 스님의 눈언저리도 심상치 않다.
그는 두 번째로 <세 동무>를 부른다.
끝까지 듣고 있던 자연이 벌떡 일어선다.
“왜?”
민지 수녀가 묻는다.
“지필묵.”
“내 몫도 가져다줘요.”
민지 수녀가 한 말이다.
잠시 후 자연은 백지 두 장과 연필 두 자루를 들고 돌아와, 백지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민지에게 주고는 방바닥에 엎드린다. 민지도 방바닥에 엎드리고 받아쓸 차비를 한다. 그에게는 스님과 수녀님이 방바닥에 엎어지는 사태가 믿어지지 않는다.
“선생님, 천천히 부르세요.”
그는 <세 동무>를 세 번째로 부른다.
여러 번 부른 것으로 기억할 뿐, 자연 스님과 민지 수녀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 정확하게 몇 번 더 불러주었는지, 그는 그것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라서, 20년씩 도를 닦은 두 중년의 출가자를 방바닥에 엎드리게 한 것은 자기의 목소리가 아니라 <세 동무>의 노래말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는 다음날 아침, 두 동무와 까치소리의 배웅을 받으며 약수암을 내려온다. 절에서 나오는 길, 산을 내려가는 길은 참 고즈넉하다. 그는 사람 사는 데가 참 슬프게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산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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