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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소설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강신해
그리운 거짓말 황원준
모깃불 놓은 마당에 누워 하늘을 보면 별이 소금을 뿌린 듯 박혀 있었다. 여름 밤 북쪽 하늘에는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서쪽 하늘에는 목동자리, 처녀자리, 바로 머리 위쪽 중앙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독수리자리의 견우별과 거문고자리의 직녀별…… 수업이 명멸하는 빛들의 향연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고 있으면 별들이 하나 둘씩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별들이 구름처럼 뭉쳐서 금방이라도 쏟아 내릴 듯 삐죽삐죽 거리더니 이윽고 별들은 사선을 그으며 쏟아져 내리고, 내 몸은 작은 물고기처럼 하늘로 떠올랐다. 메케한 모깃불의 연기를 따라 모기들은 미친 듯이 춤을 추어 대었다. 모기들에게는 매운 연기가 아니라 더할 수 없는 향훈인가 보다. 어느 무명의 옛 시인은 도무지 불붙을 기미가 없는 안타까운 사랑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청솔가지야, 청솔가지야, 매운 연기만 나고 매운 연기만 나고…’
그러나 쉽게 불붙지만 금방 꺼져 버리고 마는 볏짚과는 달리, 청솔가지는 일단 불이 붙기만 하면 화끈하게 오래 탄다. 미물도 깊이가 있는 사랑은 맵디매운 인내와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쯤은 안다는 말일까? 하늘을 오르는 연기를 따라 지치지도 않는지 열정적인 몸짓을 그치지 않는다. 진종일 뛰어 놀았던 끝에 쌓인 피로와 저녁 식사 후의 포만감을 생각하면 지금쯤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야 할 시간. 그러나 처마 끝에 매달린 전등불 밑에서 잠시도 일손을 멈추지 않으시는 할머니 곁에, 무슨 빚이라도 받아 내려는 듯 더러는 눕고 더러는 턱밑까지 바싹 다가앉아서 옛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좀처럼 풀어 낼 기미가 없던 할머니의 이야기 보따리도 계속되는 아이들의 지청구를 이기지 못하고 ‘옛날 옛적에…’하고 실마리를 풀어낸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철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제격이다. 아주 먼 옛날에 어느 선비가 과거 길에 올랐단다. 어느 새 해는 지고 곧 이어 내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산길을 헤매게 되었다는구나. 저 멀리 산짐승들이 울어 대고 바로 발밑에선 ‘푸드득’하고 인기척에 놀란 산새들이 날아오르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쭈볏 올라 붙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무서운 산길이었단다. 그런데 저 멀리 산기슭에 불빛이 보이더라는 거야. 선비는 거기서 하룻밤 쉬어 가고자 발걸음을 재촉하여 당도해 보니, 한 여인이 살고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있었대요. 선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하룻밤을 쉬어 가기를 청했다는구나. 그러자 그 여인은 친절하게 맞아들이면서 저녁은 먹었느냐고 묻더란다. 이왕 신세를 지는 것 염치불구하고 요기할 음식을 청했다는구나. 여인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노란 조밥을 따뜻하게 지어내더라는 거지. 산촌이라 쌀이 귀해 좁쌀로 밥을 했다며 많이 자시라는 거야. 하지만 이미 때를 놓치고 너무나 배가 고프던 선비는 조밥도 고마울 따름이지, 허겁지겁 맛있게 밥을 먹었다는구나. 하루 종일 산길을 걷고 난 뒤끝인데다가 배가 불러지니 졸음이 물밀 듯 밀려왔다는구먼. 스러져 얼마를 잤을까.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 보니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뽑아 선비의 온 몸을 칭칭 묶고 있더라는 게지. 그날 아침에 선비가 자기 앞을 지나가던, 알을 잔뜩 밴 어미거미를 밟아 죽인 일이 있는데, 지금 이 거미가 아침에 죽인 그 거미의 동생이라는 게지. 제 언니를 죽인 복수를 한다고 그러더래. 그날 밤 선비가 먹은 밥도 조밥이 아니고 거미 알이라는 거지. 거미 알이 영판 좁쌀을 닮았거든. 선비를 거미줄로 꼼짝달싹 못하게 온 몸을 감고 거미 독을 쐬면 곧 죽게 될 것인데 조밥이 아닌 거미알들이 죽은 선비의 몸을 먹이로 자라게 된다는구먼. 그러니까 너거들은 아무리 거미 같은 미물이래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지 않아도 싸늘해진 밤공기가 오슬오슬 소름을 돋우던 차에 숨이 막히도록 무서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온 몸이 오그라들며 소변이 마려웠다. 친구들과 놉을 해서야 텃밭에 다다를 수 있었고, 행여나 거미를 밟을 새라 까치발로 서서 오줌 줄기를 냅다 내지르고 지레 놀란 눈으로 부리나케 제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이제 자야 된다는 채근을 네댓 번은 더 듣고서야 잠자리로 옮겨 눕지만, 잠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말똥말똥 해진 눈으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면 벽에 걸린 민화 속의 닭이 무섭게 쏘아 보고 있다. 붉디붉은 벼슬, 푸른 발톱, 노란 눈자위에 검은 동공이 매섭게 빛나는 눈. 에고고. 무섬증이 일어 돌아눕지만 매서운 자태 눈에 선하다. 할머니의 어젯밤 이야기가 떠오른다. 닭은 말이다. 모이를 절대로 혼자 먹는 법이 없단다. 구구대며 동료들을 불러서 같이 먹지. 그래서 닭은 인을 상징한단다. 어질다는 뜻이지. 또 닭은 세상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서 매일 변함없이 새벽을 깨운단다. 그래서 닭에게는 신이 있단다. 믿음이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또 닭은 말이다. 일단 적이다 싶으면 맞붙고 본단다. 물론 힘이 달려 죽겠다 싶으면 꽁지를 빼고 다리야 날 살려라 도망을 치지만 지레 겁을 먹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부터 치지는 않는단다. 그래서 닭에게는 용이 있다고 한다. 용감하다는 이야기지, 저 닭대가리에 있는 벼슬을 보렴. 벼슬아치들이 쓰는 관모를 닮았잖니? 그래서 닭에게는 문이 있단다. 저 억센 발톱을 보렴, 마치 위풍당당한 장창을 닮았지? 그런 점에서 닭은 무를 상징하기도 한단다. 이렇듯 닭에게도 다섯 가지의 장점이 있는데, 너희도 그것을 잘 보고 배워야 할 것이야. 괜히 닭 꽁무니를 쫓아가며 돌을 던지거나 괴롭히지 말고… 할머니는 닭이 천년을 살면 용이 된다고 했다. 의심에 찬 아이들이 못 믿겠다는 듯 눈을 똥그랗게 뜨면 닭의 다리 껍질은 용의 몸에 있는 비늘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것이 오래 산 닭이 용으로 변할 수 있는 증거라고 못을 박았다. 그 용의 이름을 계룡이라고 하는데 충청도에는 계룡을 닮은 산이 있어 계룡산이라고 해. 닭을 자꾸만 괴롭히면 계룡이 나타나 너뿐 아니라 온 마을에 혼을 내키니 조심해야 돼.
세월이 흘러 이제는 거미가 여인으로 현신하여 밥을 짓지도 못하고, 닭이 오래 살면 용이 된다는 것도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리들이 항상 어질고 착하게 살기를 바라셨다. 험하고 어려운 세상을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그런 가없는 사랑의 속내이지만 결코 소리 높여 나무라시거나 매정하게 잘라 말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진 않으셨다. 차라리 거짓말을 섞은 옛 이야기를 통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에둘러 말하시며 우리들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셨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내게 함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못 미더워 대들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면, 거미 알이 정말 좁쌀을 닮았지 않았더냐. 닭다리의 비늘이 정말로 뱀이나 용의 비늘을 닮지 않았냐며 알량한 나의 의심을 여지없이 제압하던 그 박학다식의 카리스마를 이제는 만날 길이 없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내게 거짓말을 못 한다. 사회에서 공인하는 만우절에도 엄두를 못 낸다. 그 누구도 나를 쉽게 속여 먹지 못하게끔 내가 닳아버린 탓이다. 마음속에는 상상의 날개가 접혀진지 오래고 정서의 샘이 메말라 버린 지 오래된 탓이다. 그 누군가 그 옛날 할머니처럼 웅숭 깊은 사랑으로 다가오려 해도, 내 자신이 말 같지도 않은 말은 들으려고도 않으며 털을 곧추 세운 고슴도치로 변신한 탓이다. 또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영악해져 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내가 왜 쓸데없이 비싼 밥을 먹고 실없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단 말인가 하는 속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젠가 한번 크게 먹기 위해 잔잔한 거짓말은 억지로 참고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사는 것이 죄다 심드렁해져서 얼큰하게 한잔 취하게 되면 여름 밤 평상 위가 아니라도, 그저 길섶에라도 좋으니 아무런 걱정 없이 누웠다가 별비를 내리는 밤하늘을 헤엄쳐 다니고 싶다. 오늘도 또 뜬금없이 “옛날 옛적에~” 로 시작하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듣고 싶다.
달빛 축제 황원준
친구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의 집은 부산에서 울산 쪽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동백리라는 한적한 어촌에 자리하고 있다. 작년 가을에 우연히 사귀게 된 그 친구는 귀가 방향이 같은데다가 동네 선술집에서 한 잔 하는 것을 좋아하는 점이 서로 닮아 더욱 가까워졌다. 며칠 전에도 목이 컬컬하다는 안부를 핑계 삼아 다시 만났다. 봄 조개, 가을 낙지라고 한다. 봄철이라 조개구이 한 판을 안주 삼아 목을 축이면서 달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달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집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정남향이어서 달이 뜨고 지는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다고 했다. 바람이 거세든, 추운 날이든 거실에 편안히 앉아 달을 구경할 수 있으니 최고라는 것이다. 특히 보름달이 떠오르는 저녁이면 선경이 따로 없다고 덧붙였다. 듣기만 하여도 환상적이었다.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수 일 내 집으로 청하겠단다. 바라던 바였으나 감히 청하지 못했다는 내 말을 듣고 그는 크게 웃었다. 마을 이정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던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이웃 칠암 마을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는 토정선생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과연 자랑하던 대로 주변 풍경은 절경이었다. 탁 트인 수평선을 대하자마자 눈망울 속까지 시원해졌다. 바다는 그날따라 물빛이 달랐다. 수평선 쪽 깊은 곳은 짙푸른 사파이어빛이더니 육지에 가까워질수록 녹색으로 바뀌면서 에머랄드빛과 옥빛으로 이어졌다. 일렁거리는 보석 밭을 하루종일 일구어 대던 괭이갈매기는 지쳤는지 갯바위에 홰를 치고 포말을 즐기고 있었다. 누추한 자리를 찾아 주어 고맙다는 주인의 인사가 풍경에 멋을 더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달이 떠올랐다. 기다리던 둥근 보름달이었다. 주위는 잠시 숨이 멎는 듯 고요해졌다. 거실의 유리창을 통해 달이 둥그렇게 비쳤다. 푸른빛이 방안으로 ‘쏴’ 밀려 들어왔다. 그 빛을 방안에서만 맞을 수 없어 마당으로 나섰다. 달아 오른 얼굴에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넘실대는 파도 위에는 금빛 월광이 깔려 있었다. 마당까지 길게 펼쳐진 달빛 주단을 밟고 오라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갯바위 쪽으로 다가갔다. 흠칫 누군가의 눈빛을 느꼈다. 갯바위 구멍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부딪히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허리를 굽혀 빈틈을 들여다보았다. 게의 무리였다. 갯바위 틈새마다 작은 게들이 올망졸망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게들이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 했다. 집시들의 춤이 연상되었다. 집시들의 플라멩고는 육감적인 춤이다. 가슴 선이 뚜렷이 드러나는 셔츠와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치마를 입고 춤을 춘다. 미끈한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치마를 살짝 들어올린 채, 발바닥으로 땅을 내리 굴린다. 때로는 요염한 눈빛으로 미소를 쏘아 날리기도 한다. 신명나는 현악기와 탬버린의 박자 속에 빙글빙글 맴을 도는 플라멩고. 밤 안개의 푸른 기운을 배경으로 철썩이는 해조음 속에서 게는 집시여인처럼 집게발을 높이 들었다. 어떤 녀석들은 혼자서 또 어떤 녀석들은 두 손을 마주 잡은 듯 어우러져 달빛 조명을 받으며 빙글빙글 몸을 돌렸다. 틀림없는 집시의 몸놀림이다. 게들이 춤을 추는 것은 생태적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게는 일년에 두 세 차례 껍질을 벗는다. 이제껏 제 몸을 보호하던 껍질은 속살이 꽉 차 오르게 되면 성장을 방해하는 껍데기가 되어 버린다. 더 자라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옛 껍질을 벗어야 한다. 또한 껍질이 단단해져버리면 수컷과 암컷이 쉽게 교미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컷은 암컷이 껍질을 벗는 틈을 이용하여 교미를 하는 것이다. 그 연유로 보름날 바닷가에서는 성장과 번식을 위한 축제가 베풀어지게 된다. 갑자기 취기가 가셨다. 내가 보름달의 정취에 취해 있는 동안에 게들은 달빛을 받으며 생육을 위해 껍질을 벗고 있다. 헌 껍데기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껍질을 얻기 위해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게조차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게들이 수런대는 소리가 이어진다. 마치 너는 어떤 껍질을 지니며 사느냐고 묻는 듯하다. 체면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지나 않는지, 고집의 껍데기에 연연하지는 않는지, 편견의 잣대를 지니고 있지는 않는지 따지는 듯하다. 곧추 세운 집게발이 나의 양심을 찌른다. 계륵이라는 말이 있다. 닭의 갈비는 먹을 게 없다는 뜻으로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기는 아깝다는 비유로 쓰여지고 있다. 무엇이든 가진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것이든 다시 이루어 내려면 더더욱 힘이 든다. 버리든, 얻든 고통과 노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버릴 때 버릴 수 있다면 또한 아름다울 것이다.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거실에 들었다. 얼큰한 매운탕을 곁들인 술자리가 다시 이어졌지만 더 이상 취기는 오르지 않는다. 미물이 춤판을 벌이는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지만 인간의 춤판은 무엇을 얻기 위함인지 궁금하다, 그들의 춤판은 거듭나는 삶의 형태이기에 진정한 축제의 한마당이라 하겠다. 달빛아래 벌어지는 그 엄숙한 바닷가 풍경이 자꾸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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