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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도심, 번화가에서 살짝 비켜난 허름한 중층주택 밀집 지역에 아가페 센터가 있다. 형형색색 그라피티들과 시커멓게 불타 버린 채 방치된 자동차에서 어렴풋이 저항의 기운마저 감도는 그런 골목들을 비집고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 블록 정도만 벗어나도 세계 최고의 관광 자원을 보유한 나라다운 관록과 맵시가 풍기는 그리스지만, 이곳은 적어도 겉모습으로만 봐서는 2010년 이후 이 나라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그림자를 아직 못 지우고 있다. 덕분에 집세가 싸다. 아가페 센터와 이곳의 가난한 이들로서는 우호적인 입지 조건이 아닐 수 없다.
9월 11일, 한여름 열기가 남아있는 아가페 센터 안으로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가 들어섰다. CTK 취재팀도 그를 따랐다.
안에 있던 “난민들”이 우리를 눈빛과 낯빛으로 환대한다. “파히마” “마수드” “하디” “마시”…. 아가페 센터의 유바울 선교사가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우리에게 소개한다.
아가페 센터는 예배 공동체이자 식탁과 교제의 공동체이다. |
파히마, 아프간에서 온 그녀는 베를린에 먼저 가 있는 두 아들을 만난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어린 딸과 함께 난민 캠프에서 지낸다.
마수드, 서글서글한 눈매와 다부진 어깨의 그는 열세 살, 열두 살, 세 살 반, 그렇게 세 아이를 둔 가장이다. 그의 부친은 군인이었다. 군벌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카불을 떠나 이란과 터키를 거쳐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왔다. “보트 피플” 출신이다. 지난 6월 스웨덴 교회에 깃든 난민 공동체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던 그는 그 뒤로 그 교회로부터 설교 영상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유 선교사는 그를 “말씀에 은사가 있다”고 소개한다. “복음을 가지고 아프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의 꿈이다.
하디. 그는 하자르 족 출신이다. ‘하자르’는 수니파가 다수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소수파인 시아파를 신봉하고, 인종적으로도 소수에 속하는 몽골계 종족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대적으로 하자르 출신의 난민이 많은 데는 이런 이유가 더해진다. 그는 19살 때 고향을 떠났고, 그리스에 체류한 지 11년 됐다. 그리스 난민 지위 인정을 받은 그는 현재 미국 남침례교 엔지오의 난민사역을 돕고 있다.
마시. 그의 이름에는 “메시아”나 “천사”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아프가니스탄을 한국처럼 변화시켜 주시기를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이름답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형제들의 쉼터에서 만난 무스타파. 이란 출신인 그는 작년 봄, 북유럽으로 가는 국경이 막힌 직후에 그리스에 도착했다. 몇 차례 국경을 넘으려다 실패하고 불법입국자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유치장에서 누군가 건네준 성경을 보다가 주님을 만났다.
크르셰히르 이란-아프간 공동체: 박은조 목사와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 이 식당도 가끔 이들의 예배처가 된다. |
이제 익명의 “난민들”이 “파히마” “마수드” “하디” “마시” “무스타파”…, “형제”로 다가온다.
아가페 센터가 이곳으로 옮기고 박 목사도 첫 방문이다. “집세는 한 달에 얼마나 합니까?” 지하부터 1층, 2층, 3층까지 꼼꼼하게 방방이 살피고 챙긴다. 그도 그럴 것이, 박 목사는 유바울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회 KCA의 이사장이다.
KCA는 아프간 피랍 사건 후에 아프간 선교에 뜻을 같이 한 몇몇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 KCA는 그렇게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한국인 교회”(Korean Churches for Afghanistan)로 출범했다. (나중에 사역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A’는 “ACTION”의 약자가 됐다.)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그 여름이었다. 유바울, 그는 아프간에 사로잡혔던 그 샘물교회 단기봉사팀의 일원이었다.
2011년 여름, “그리스에 아프간 난민들이 정말 많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샘물교회는 단기 봉사팀을 그리스로 보냈다. 박은조 목사와 의사와 간호사, 약사로 이뤄진 의료봉사팀, 그리고 아프간 피랍을 함께 겪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도 그때 그리스에 왔다. “그리스에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프간 난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지….” 유 선교사는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유럽과 국제사회에서 “난민 위기”가 본격 거론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지금은 유엔과 EU가 나서 난민에 대한 국제 여론을 주도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런 도움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때 벌써 그곳에서 난민들에게 무료급식을 하고 있는 선교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많은 아프간 난민들”은 2001년 9.11 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떠밀려온 이들이었고, 양용태 선교사가 그들을 먹이고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진료를 받고 식사를 했습니다. 저는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나 약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약봉지를 나누어 주면서 진료를 받고 돌아가는 그들을 안아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과 표정과 행동을 통해서 그들이 의지할 곳 없는 이국땅에서 얼마나 절박한 환경에 처해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유바울, 그는 그렇게 다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사로잡혔다.
아가페 센터는 “분립개척”을 준비 중이다. 박은조 목사를 “따라서 하는 것”이라고 가볍게 말했지만, 분립개척이란 규모와 내실을 전제한 이야기다. 유 선교사는 아가페 센터의 식구들이 포화상태라 느낀다. 난민이다 보니 한 건물에 들고나는 사람들이 많으면,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유 선교사는 페르시아어를 쓰는 이란인들과 페르시아어 방언의 하나인 ‘다리’어(또는 ‘파르시’어)를 쓰는 아프간 난민들이 그들의 언어로 스스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을 돕는 조력자로 남고 싶어 한다. 그는 “주도권”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차피 그들은 떠날 사람들이다. 현실의 신분이 난민인 이상, 그들의 최종 도착지는 (북)유럽이나, 적어도 그리스보다는 더 나은 다른 제3국들이다. 더 나아가 그들의 궁극의 종착지는 고향, 고국이다.
때로 약간의 허무주의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움켜쥐려는 우리의 아귀힘을 풀어놓는다.
그래서 또한 더 절박하다. 그들이 곧 떠날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 하나라도 더 주어야 한다. 복음 말이다.
눈물과 감격의 간증. |
완고하기가 이슬람보다 더한 종교가 또 있을까? “오일 머니”로 행세하고, 자기네끼리 똘똘 뭉쳐 “서방 기독교” 세계에 대항할 때는 철옹성 갔던 그들의 마음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어느 인간이나 절박할 때 신을 찾는다. 절실할 때 들어주지 않는 신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렇게 그들은 대답하지 않는 ‘알라’를 버렸다.
그러나 그 빈자라는 아직 옹골차지 않다. 지금 이대로 그들이 “잘 사는” 유럽으로 가버린다면,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여유’는 간절했던 기억을 덮어버린다.
아가페 센터 앞에 선 유바울 선교사와 박은조 목사. 센터 외벽 그라피티가 사진의 색감을 살려준다. |
이 점에서는 사마리아 센터의 양용태 선교사도 마찬가지다. 사마리아 센터는 지난 4월부터 난민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양용태, 김미영 선교사는 “심사”에 가슴이 벌렁벌렁할 그들을 선발하여 제자훈련을 할 계획이다.
두 선교사는 그들을 “복음의 문을 열기 위한 선발대”라 부른다. “선발대에게 양식을 풍성하게 나누어 주면 그들이 앞으로 더 풍성하게 나누어 주지 않을까요?” 양용태 선교사는 이제 영의 양식도 나눠줄 때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복음의 핵을 사람들에게 심어 놓으면 그들이 어디를 가든 거기서 교회를 세우는 일군이 될 것입니다. 제자훈련을 할 때가 이제 된 것 같아요.” 김미영 선교사도 같은 마음이다.
물론 그래도 ‘난민’의 처지에 있는 그들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마리아 센터는 그들의 생계 지원을 위한 “장학금”을 월 300유로씩 줄 계획이다. 무슨 돈으로? “하나님이 결제 안 해 주시면 문 닫으면 됩니다. 원하시는 일이면,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지난 13년 간 생긴 똥배짱입니다.”
난민 선교의 긴급성은 미국의 새누리교회 단기선교팀과 함께 사마리아 센터를 방문한 손경일 목사도 동의한다. 그는 “앞으로 길어야 5~7년”이라고 했다. 일본 선교에 뜻이 있었던 그가 난민 사역으로 선회한 까닭이다. “지금은 시급한 전략, 비상 전략과 비상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언제 아랍어, 페르시아어 배워서 선교사 파송하겠습니까? 이미 준비되어 있는 그들, 제 발로 복음을 찾아 들어오고 있는 그들을 보내야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은 바다 건너에도 있다. 그들은 그리스와 더불어 “난민 고속도로”의 핵심 경유지인 터키에 있다.
앙카라에서 탁요셉 선교사와 그의 RZM 동역자들을 만났다. 역시 박은조 목사와 동행했다. 2007년부터 타지키스탄에서 아프간 난민 사역을 한 탁 선교사는 “아랍과 페르시아 권에 ‘준비된’ 사역자들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1960년 이후 아랍권의 격동—이란혁명, 알카에다의 선전포고, 9.11과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그리고 최근의 시리아 내전 등—과 함께 MBB 즉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Muslim Background Believers)이 급증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그들을 MBM, 무슬림 배경의 선교사들(Muslim Background Missionaries)로 양성하여 파송하는 선교의 “새로운 파도”를 일으키자는 것이다. “우리는 무슬림이었던 적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슬림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말씀으로 변화되고 준비된 그들 스스로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재 아랍 및 페르시아계 난민들이 있는 터키 곳곳에 MBB/MBM 공동체를 세우고 있다.
박은조 목사가 통닭을 사들고 무스타파 형제(맨 앞 오른쪽)의 쉼터를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
탁 선교사의 RZM(Raising Zinzendorf-Moravian Up Mission) 동역자들은 이름 그대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공동체에서 사명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신앙 때문에 박해 받은 모라비안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보호한 진젠도르프, 그리고 그 공동체의 초기 역사가 난민 선교의 역사였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강렬한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3시간을 넘게 자동자로 달려 아나톨리아 중심부에 위치한 소도시 ‘크르셰히르’에서 이란-아프간 가정교회를 찾았다. 이란 출신 난민 부부 MBM 오미드와 마리암이 이끄는 공동체이다. 그날은 아프간과 이란에서 온 난민 형제자매 15명이 탁 선교사와 박은조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는 날이었다.
주민들의 눈을 피해 간격을 두고 성도들이 주택 지하 층 예배당 안으로 삼삼오오 들어왔다. 이날 세례식에는 특별히 한국에서 온 귀한 손님이 말씀을 전했다. “‘에클레시아’ 곧 교회는 어딘가로부터 불러내심을 받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탁 선교사의 페르시아어 통역의 시간차만큼만 두고, 즉각적인 반응이 느껴졌다.” 그들 모두 그 어딘가로부터 나온 이들 아닌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불러냄 받은 사람들이 곧 교회입니다. 우리의 육은 혼돈 속에서 살지만, 우리의 영은 질서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이 어둠 속에서 산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주님은 교회에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주셨습니다(마16:18). 가난도 질병도 두려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습니다. 이 도시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천국의 열쇠를 나그네인 여러분의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에 천국 열쇠를 주신 의미를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미르, 모힘, 쇼리…, 이날 세례를 받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낯선 땅으로 와 난민으로 살아가는 그들 15명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을 세례의 날이 되었을 것이다.
‘눈물과 감격’의 간증이 끝나고, 따로 빌린 인근 호텔에서 세례식이 이어졌다. 간증 때와는 사뭇 다르게, 세례식은 ‘웃음과 감격’의 시간이 되었다, 호텔 수영장이라니! 이런 호사를 누린 것이 언제였을까? 오늘은 그럴 자격이 있다.
오미드와 마리암 “목자”를 그들의 집에서 따로 만났다. 집안이 온통 보기 드문 노란색이다. 한국의 단기봉사팀이 그렇게 산뜻하게 꾸며놓고 갔단다.
“2014년에 1년 동안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아프간 난민 1명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가만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나를 만나 달라’ 전화도 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란, 아프간 사람들이 예배하러 오는 꿈을 꿉니다. 이를 위한 제자들이, 일꾼들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오미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난민들을 섬길 수 있는 사랑과 긍휼의 은사를 주신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가정교회 형제자매들이 간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던 마리암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앞서 거의 모든 간증자들이 이 부부와의 만남과 이들의 기도를 간증했었다. 거기에 답이 있었다. 그들과의 지난날에 만감이 교차했던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전에는 같은 이란 사람 중심으로 생각했는데, 최근 1년 사이에 아프간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여기 사로잡힌 이가 또 하나 있다.
2007년, 아프간에 사로잡혔던 유바울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에게 사로잡혀 있다. 10년 전, 하루가 10년 같던 숨 막히는 순간에는 “그쪽으로는 오줌도 안 눌 것”이라던 박은조 목사도 여전히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더 깊이 빠져들었다. 한국과 세계의 한인 교회들에게까지 자신을 사로잡은 그들을 알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유바울 선교사, 탁요셉 선교사, 오미드와 마리암 선교사, 손경일 목사, 박은조 목사…, 이들은 간절하고 긴박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슬람 세계를 위해 열어 두신 너무나 짧은 기회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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