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 두 범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언어의 사용 고차원적인 이성 이런 것은 진부한 것이니 때려치우고, 나는 나약함의 표현의 차이라고 생각 한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그것을 숨기려고 가면을 쓰고 속이면서 살아가는데 반해 동물은 나약함 그 자체를 숨기지 않는다. 어차피 약육강식의 본능의 세계이니까.
그런 면에서 소설가나 시인은 대단하다. 자신의 아픔을, 가면 속 보이고 싶지 않는 본래의 모습을 투영해야지만 돈을 벌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소설가나 시인 그 아무개도 될 수 없을 것 같다. 나에겐 내 맨얼굴을 보여 줄 용기가 없다.
<적두병>
작가는 적두병 파는 청년을 화상의 후예, 미혼의 남자로 즉 자신 속 허구의 인물로 치장하여 자신의 아픔을 어릴 때의 기억을 회상하고 또 수복 하고자 한다.
“어머니의 아들” 이였던 형과 “그저 그런 아들” 이였던 자신, 아버지의 분위기를 이어받은 형과 외모를 이어받은 자신 그리고 어머니.
아비는 바람이고 어미는 땅이기에 자식들은(특히 아들) 아비의 모습을 빼닮은 자신의 거울 속 그리고 타인의 목소리에서 그것을 찾지만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 싶기에 오이디푸스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관심이 컸던 형과 아무런 기대를 받지 못했던 자신, 어릴 때 “넌 외탁이야, 형하고는 달라.”는 어머니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 채 어머니의 모습을 자신과 연관 시키고 싶던 그래서 사랑받고 싶었던 작은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주인공에게 투영되고 있는 것인 줄도 모른다.
“콩쥐 팥쥐” 형과 아비는 콩쥐, 어미와 나는 팥쥐. 콩쥐는 현실에서 슬픈 존재이기에 이상이라는 탈출구를 만들고 그 속에 숨어 살고 싶어 한다. 팥쥐는 현실을 직시하고 융통성 있게 살아간다. 주인공은 이런 메타포를 사용해 어머니를 자신과 더욱 연관 지으려는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주인공의 적두병에 담긴 추억이 소개된다.
혼자 몰래 아비와 어미가 일하는 공원에 나와 어미가 떠먹여준 적두병의 팥소(평소에는 아예 근처에도 못 가게 하던)의 달콤함에 그리고 어릴 때 먹지 못했던 아비의 겉과 속이 완벽한 적두병 그것을 회상하며, 그들을 기리며, 자신을 찾아가며, 인생이라는 외길에서 뒤돌아서 赤豆餠 인지 赤頭病 인지 모르는 필시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적두병을 인용하고 있을 터이다.
기억은 그림이다. 그림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랜다. 후대의 화가들은 그 위에 자기 색깔을 덧씌우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과 배경은 지워버릴 수도 있다. 특히 자화상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내 그림에 어떤 불멸의 진실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적두병 10에서 인용)
어떤 사건에 있어서 해석은 필요일 뿐 필수가 될 수 없다는 것 그 사건자체로서 눈 여겨 봐야 한다는 것.
하지만 처음에 밝혔던 것처럼 사람은 나약하기에 해석하고 그것을 진실인 양 믿어버리고 진실보단 허구에 더 열성인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첫사랑의 기억이 아름다운 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실을 자신만의 추억으로 그림으로서 간직한 채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추억을 회상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과거에 붙잡힌 인간이여,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나약하게 오늘도 하루하루를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