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
박완서/산문 (1931~2011)
시장가는 길에 이웃에 사는 젊은 엄마를 만났다. 평소 새침하던 여자가 웬일인지 먼저 인사를 하고 말을 시켰다.
"자녀 분들을 다 길러놓으셔서 이젠 아무 걱정 없으시겠어요 부러워요."
시장 길에서 만난 이웃끼리 건네는 인사치곤 좀 엉뚱한 이야기다 싶었지만 여자가 하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도 덩달아 심각하게 나왔다.
"웬걸요, 걱정은 지금부턴걸요. 출가시켜야죠. 장가들여야죠."
" 그래도 나가서 번데기 사먹을까봐 걱정은 안 하실 것 아녜요"
"웬걸요, 우리 셋째가 번데기당이랍니다."
"네? 셋째라면 그 곱게 생긴 여대생 아녜요. 아무리요?"
"정말이라니까요."
그 여자와 나는 잠시 깔깔댔다. 그리고 곧 다시 심각한 열굴이 되어 이번 번데기 사건은 정말 너무했다고 분개했다.
번데기는 누구나 더 좋아하는 식품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사먹을 수 있을 만큼 값싸다. 또 한번 맛들인 사람의 변치않는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맛이 특이하고 영양가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천연식품이다.
나는 내 딸 중의 하나가 그것을 좋아하는 걸 신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구태여 말리거나 나무라진 않았다. 언젠간 칭찬까지 해주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애는 여지껏 김치를 입에 넣은 적이 없을 만큼 편식이 심해서 내가 많이 걱정했었고, 그런 애의특징으로 비위가 약해 어떤 음식은 맛도 보기전에 외양만 보고 질색하기가 일쑤였으니 과히 곱게 생기지않은 번데기를 먹었다는 건 칭찬해줄 만한 사건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두메에서 보냈기 때문에 산이나 밭에서 나는 과일이나 곡식 푸성귀 말고도 들이나 산을 온종일 싸다니며 별의별 먹을 것을 다 구해 주전부리 거리를 삼았었다. 그때 맛본 수많은 풀이나 꽃, 열매, 곤충의 이름조차 지금은 아리송하다. 진달래꽃. 아카시꽃. 싱아, 송기, 칡뿌리, 메뿌리, 무릇, 까마중, 괭이밥.....겨우 이런 것들이 생각날 뿐이다.
입이 몹시 궁금할 때면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왕개미의 똥구멍을 핥은 적도 있다. 그러나 자연은 시골 아이들이 먹을 거라고 알고 있는 것에 몰래 독을 숨겨놓은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홍역을 앓다가 마마를 앓다가 죽는 아이는 있어도, 산이나 들에서 독사에게 불려죽는 아이까지 있어도, 먹을 것이라고 믿는 먹은 것에 독이 있어서 죽은 아이는 없었다.
이렇게 자란 촌 계집애가 서울 와서 어른 되고 부정식품이 범람하는 시대에 아이들을 기르다보니 믿을 건 오로지 천연식품밖에 없다 싶어, 아이스크림이나 청량음료 대신 과일을, 비스킷이나 과자 대신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등으로 간식을 해주면서 어느 만큼은 안심을 하려들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천연식품마저 비료니 농약이니 하는 것으로 오염을 시키더니, 번데기는 또 어떻게 취급을 했기에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죽였단 말인가.
"해외토픽 같은 데서 보면 외국에선 흉악범에게 백 년 형이니, 2백년형이니, 사람의 수명보다 훨씬 긴 징역을 선고하는 일이 있는 것같던데, 우리나라에서도 부정식품을 만든 사람에겐 그런 지독한 형벌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젊은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속으로 그 젊은 엄마를 참 마음씨 고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화나는 김에 극형까지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목숨과 직결된 먹을 것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당하는 공포만은 없어야겠다. 이제 우리도 이만큼 살게 됐던 긍지를 위해서라도.
먹을 것은 사람의 목숨과 직결돼 있으니 먹을 것을 겁 없이 함부로 만들거나 취급한다는 건 인명을 경시하는 것과 같은 짓이 된다. 인명을 귀하게 알지 않는 사회가 아무리 풍요하고 편리해도 어찌 잘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언덕에서 바라본 선바위와 국사당을 품은 인왕산 풍경.
작가 박완서(1931~2011)가 50세에 쓴 ‘엄마의 말뚝 1·2’에 이어 62세에 출간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65세에 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 자전적 연작소설 3부작이 잉태된 그의 문학의 고향이다.
첫댓글 반갑고,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精誠이 깃든 作品 拜覽하고 갑니다.
恒常 즐거운 生活 속에 健康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