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중도(中道)는 유교의 중용(中庸)과 어떻게 다른가?
불교의 중도(中道)와 유교 중용(中庸)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중용과 중도는 전혀 다릅니다.
중용(中庸)은 유교에서 강조하는 덕목으로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 소나에게 가르친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잠을 자지 않고, 눕지 않고, 잠시의 휴식도 없이 수행하는 것이
바른 정진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바른 정진이 아닙니다.
정진은 꾸준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건강이나 몸에 맞게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마치 잘 조율된 거문고의 줄과 같은 상태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중용은 유교에서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강조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서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중용을 강조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친 중도(中道)는 중용(中庸)과는 전혀 다릅니다.
중용(中庸)과 중도(中道)가 상반된 대립의 구도에서
취하는 선택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중도와 중용은 대립의 내용이 다릅니다.
상반된 대립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적인 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모순 대립입니다.
예를 들면 ‘많다’와 ‘적다’, ‘크다’와 ‘작다’, ‘높다’와 ‘낮다’ 등은
상대적인 대립입니다. 상대적인 대립은 그 중간이 있으며,
그 중간에서 가장 적절한 것이 중용입니다.
‘너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알맞은 것,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는 적당한 것,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는
적절한 것’이 중용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순 대립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있다’와 ‘없다’, ‘옳다’와 ‘그르다’, ‘같다’와 ‘다르다’는 모순 대립입니다.
‘있다’와 ‘없다’ 사이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적당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순 대립에는 중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모순 대립의 상황에서
중도(中道)를 선택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이 두 명제는 모순 대립하는 명제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철학에서는 모순 대립하는 명제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순 대립하는 명제 자체가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에게 둘 다 버리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강가를 거니시다가
뗏목이 강 가운데를 흘러가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뗏목이 이쪽 강변에도 걸리지 않고,
저쪽 강변에도 걸리지 않고 흘러가면,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다.
너희들도 저 뗏목처럼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들을 떠나서
수행하면 열반의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도는 강의 중간이 아니라 양쪽 강변을 벗어난 곳입니다.
영원히 만날 수 없이 대립하고 있는 두 강변이 모순 대립이라면,
그 강변 사이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중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강변에 머물지 않고,
두 강변 사이를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것을 중도(中道)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치하지 못하고 모순 대립하고 있는 사견이 두 강변이라면,
강변의 어느 쪽에도 걸리지 않고
그 사이를 흘러가는 강물은 중도이며 정견인 것입니다.
중도는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우리가 뗏목처럼 그 강물을 따라 흘러가면,
열반의 바다에 도달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중도입니다.
출처 : 불광 미디어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