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떻게 살 것인가? p.367
중음신(中陰身)은 우리 삶에서 발생한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무수히 발생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몹시 중요한 새로운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을 전후로 우리 삶이 완전히 바뀌기에, 이런 순간은 '죽음과 재생(再生)'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가 결정하기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또는 나쁜 방향으로 가게 된다. 과거와 결별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악한 일을 하던 이들은 그 관성(慣性)으로 더 악한 길로 가기도 하고, 선한 일을 하던 이들도 한순간 유혹을 못 이기고 내린 잘못된 결정과 어리석은 선택으로 처참하게 추락하기도 한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앞길에 빛을 던져 밝힌다. 평소 열심히 공부하고 사유(思惟)하고 수행(修行)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혼미하고 괴로운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그리고 되돌아올 수 없는 갈림길에서, 더없이 귀중한 지혜를 선사받는다. 갑자기, 평소 듣고 공부한 말씀이 한 구절 떠오르면, 그 즉시 우리의 결정은 옳은 길로 직진한다. 이처럼 이런 지혜의 빛을 따라가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여로에서 맑고 화창한 천국과 같은 날들을 맞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양심(良心)이 있기에 악한 일을 하는 이들도 무의식적으로 두려움과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이 양심(良心)의 감정들을 방치(放置)하고, 관성적(慣性的)으로, 몸과 마음에 익어 익숙한 옛길을 따라가면 지옥과 같은 사악한 곳으로 추락한다. 하지만 고개를 상(上) 방향으로 틀어 다른 세상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리 인생에는 꼭 큰 갈림길이 아니더라도 작은 갈림길도 무수히 많다. 그때마다 우리는 작으나마 죽고, 작으나마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좋은 업을 쌓은 사람은 마음의 빛이 넓고 창이 맑아 다가오는 밝은 빛을 많이 받아들일 것이고, 나쁜 업을 쌓은 이는 마음에 빛이 좁고 창이 흐려 다가오는 밝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해 어두울 것이다.
그때마다 좋은 지기, 친구, 친지, 가족, 선배, 후배, 상사, 부하, 동료, 스승은 그대를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대를 둘러싸고 귀중한 조언을 할 것이다. 좋지 않은 사람들은 당신을 자기들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사악한 말로 홀릴 것이다. 그때 어느 길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당사자 몫이다. 하지만 큰일이 터진 그때 가서야 제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평소에 공부, 사유,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오로지 지혜만이, 온갖 장애물이 넘치는 이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우리를 번뇌가 없는 평안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를 얻는 길은 평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사유(思惟)하며, 신구의(身口意) 3行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다른 중음신들을 제도하는 지혜의 빛이 될 수 있다!
업과 섭리 p.369
하늘은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겨울을 멈추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들이 먼 길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넓음을 멈추는 법이 없다. <순자>
모든 것이 업(業), karma라 하는 말이나, 모든 것이 섭리(攝理-신의 뜻)라 하는 말이나, 비슷한 말이다. 업이 훨씬 과학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만약 모든 것을 업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는 신의 섭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게 없게 된다. 특히 현재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과거 생에, 즉 전생에 저지른 일에 대한 상벌(賞罰)이라는 관점이 더욱 그렇다.
유일신교 신자들은,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설명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 인간적인 일이든 자연적인 일이든, 형이하학적인 일이든 형이상학적인 일이든, 물질적인 일이든 비물질적인 일이든 모두 신의 뜻이라고 한다. (물론, 불교도는 '업(業)'이라고 한다.)
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설명한다. (그리고 설명을 잘하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된다. 그럴듯할수록 좋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것이 종교 경전이다) 예를 들어 무지개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무지개는 하나님이 악한 인간들을 홍수로 다 죽인 후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한 인간들인 노아 가족에게 다시는 인간을 홍수로 죽이지 않겠노라는 약속으로 하늘에 걸어놓은 표시라고 설명했다. [창세기]에 그리 쓰여 있다. 만약 그렇다면 대홍수 이전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강(江)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당시의 강은 모두 청계천이 되고 만다. 설마 하나님이 이명박 시장처럼 양수기를 동원했을까?)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금지된 과일을 따 먹은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하는 벌을 받았으며, 카인이 제물로 곡물을 하나님께 바친 것을 보면, 노아 이전에도 농사를 지은 것이 분명한데, 비가 오지 않는 땅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었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지난 200년 동안에, 수십만 년 인류 역사에 비추어볼 때 극히 미미한 이 기간에,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왜 무지개가 생기는지 알아냈다. 무지개는 빛이 공기 가운데 작은 물방울을 프리즘으로 삼아,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여러 파장으로 분해되면서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무지개에 대한 6,000년짜리 종교적인 거짓을 파헤친 것이다.
신은 끝없이 변경으로 밀려난다. 신의 뜻, 즉 신의 섭리와 더불어 밀려난다. '신의 뜻'이라는 말은'(나로서는 아직)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라는 말과 정확히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미 설명된 일들을 보면 전혀 신의 뜻과는 무관해 보인다. 최소한, 신의 뜻이 이러이러해서 그러그러한 일이 생겼다는 과거의 설명은 다 거짓으로 밝혀졌다. 과거 기독교인들은 번개에 맞아 죽거나 질병에 걸려 죽는 걸 하나님에게 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과거 목사들은 피뢰침과 백신의 발명에 크게 반발했다. 감히 하나님의 벌을 피하려 한다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하나님이 작정하고 내리는 벌을, 어떻게 인간이 물질을 조작해 피할 수 있을까? 만약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목사들의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그 누구도 번개로 인한 죽음과 질병으로 인한 죽음을 신의 벌이나 신의 뜻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전염병의 경우에는 환경을 깨끗이 하면 예방할 수 있으며, 항생제를 쓰면 대부분 치료가 가능하다. 이런 과학, 의학 발전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종교인들은 새로운 질병이라도 나타나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그 옛날 헛소리를 리바이벌한다. 신의 뜻이라고! 에이즈는 동성애에 대한 벌이라고. 그런데 동성애가 만연했던 소크라테스 시대의 고대 그리스에는 왜 에이즈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수천 년 전에, 하나님이 보낸 남자 천사를 강간하려 했던 소돔과 고모라에는, 왜 에이즈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미국인들 중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동성 간의 결혼을 승인하는 선봉장인 캘리포니아주를 '소돔과 고모라'라고 부른다. 로스앤젤레스는 소돔, 샌프란시스코는 고모라라는 거다) 불로 태워 처벌하는 것보다는 에이즈가 나을 텐데. 나쁜 놈만 선별적으로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수간(獸姦)이 만연했으며, 에이즈는 원숭이와 벌인 수간이 원인이라는 통설이 있는데, 소돔과 고모라에는 원숭이가 없었던 것일까?
광신적인 기독교 목사들은 하나님이 내리는 벌로서, 더 이상, 번개는 들먹이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벌이라고 주장한다. 동남아시아인들이 하나님을 안 믿고 우상을 섬기다가 벌을 받아 쓰나미를 당해 수만 명이 살해를, 즉 사형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참극인, 수천만 명이 학살당한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인 유럽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는 말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죄 없는 어린아이나, 갓난아이나, 아직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인 자연을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 태아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도 같은 항의를 할 수 있다.
게다가 2,005년에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인 미국 뉴올리언스에 들이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어떻게 설명하나? (2,005년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 인구의 79%가 기독교인이다) 비명횡사한 기독교인 1,400여 명의 목숨은 어떻게 설명하나? 참으로 인간의 망상(妄想)은 끝이 없다.
업(業)이 있고 인과(因果)가 있지만, 모든 것을 업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신의 섭리로 설명하듯이, 불교인들은 업으로 설명한다. 과거에는 폐결핵에 걸려 '죽는 것'을 업으로 여겼지만, 항생제의 발명으로 치료가 되면서 폐결핵 死는 더 이상 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업은 에이즈 등으로 옮겨갔지만, 이제 에이즈는 칵테일 요법으로 관리 가능하게 되었으니, 에이즈로 인한 사망 역시 업의 목록에서 사라졌다.
이처럼 과학은, 인(因)이 만들어내는 과(果)를 길들여, 자칫 험악해질 수 있는 결과를 부드럽게 만든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불결한 생활이라는 인(因)으로 인하여 병이라는 과(果)에 걸리더라도,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예전에는 죽도록 고생하다가 결국 죽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한 지금은 고생은 좀 할지 몰라도 죽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업(業)은 존재하나 우연(偶然)도 존재하며, 자유의지(自由意志)도 존재한다. 자유의지(自由意志)와 지능(知能)을 이용해 인간은 과거에는 업(業)이라고 여겨지던 걸 극복한다. 이 점에서 업(業)이란 반드시 특정한 방식과 특정한 강도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가 나오겠지만, 그 결과가 고정불변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실로 무상(無常)이다!
예를 들어 작두를 부주의하게 사용하면, 그 부주의함을 因으로 하여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果가 생길 수 있지만, 반드시, 영원히 손가락을 잃는 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부처님 당시에는, 원효 스님 당시에는, 그리고 사명대사 당시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현미경 미세 접합수술로 손가락을 다시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빠진 이빨도 다시 심을 수 있다. 과거에는, 이빨을 상실하는 것은 대단한 재앙이었다.
단것을 많이 먹고 양치질을 안 해서 이빨을 다 잃으면, 전에는 그 결과로 영양 섭취에 지장이 올 수 있지만, 이제 임플란트가 발명되어 영양 섭취에는 문제가 없다. 치아를 부실하게 관리한 것은 因이겠지만, 영양 섭취에는 문제가 없다. 치아를 부실하게 관리한 것은 因이겠지만, 영양 섭취 지장은 더 이상 果가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因은 반드시 작동하지만, 果는 반드시 고정된 모습과 강도(强度)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어떤 因들은 아예 작동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해진다. 이로부터 우리는 알 수 있다. 업(業)은, 因이 자유의지(自由意志)와 지능(知能)과 환경(環境)과 어울린 연기관계(緣起關係)라는 것을 말이다.
업(業)은 개별적(個別的)이고 국소적(局所的)인 관점(觀點)에서가 아니라 집단적(集團的)이고 전체적(全體的)인 관점(觀點)에서 보아야 한다. 업은, 개별적으로는 빗나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큰 집단을 살펴보면 대체로 맞다. 개인적으로는 이빨을 닦지 않고도 충치에 안 걸릴 수 있지만, 이빨을 닦지 않는 나라가 닦는 나라보다 충치에 걸린 사람이 더 많을 것은 확실하다. 양 집단이 더 클수록 더 확실하다. 작게 볼수록 업은 맞지 않고, 크게 볼수록 업은 들어맞는다. 통계역학에 대응하는 일종의 통계학 이론이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초월적이건 비초월적이건, 오로지 인격(識)만이 개입하는 업과 섭리는, 무한히 먼 변경으로 밀려난다.
통속적인 윤회론이 진짜 단멸론이다. p.403
단멸론(斷滅論)은 가장 넓은 의미로는 연기(緣起)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중간으로는 인과(因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좁게는 개인의 정체성 (통속적) 연속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선형(線形) 시간적인, 여러 몸을 통한, 개인 정체성의 연속을 통속적인 윤회라고 부른다. 그래서 통속적인 윤회론자들은 비-통속적인 윤회론자들을 단멸론자라 부른다. (이하, 윤회는 통속적인 윤회를 뜻한다. 대표적인 통속적인 윤회론으로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인들로 윤회한다는 6도 윤회론이 있다) (그런데 진짜 단멸론은 "윤회가 없으면 인과법이 무너진다"라는 생각이다. 윤회 이외의 인과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윤회가 꼭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윤리, 도덕의 유지를 든다. 하지만 이는 작게는 지구를, 크게는 우주를 자기 맘대로 죄와 벌,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는 행위이다. '단멸론이 부정하는 것'을, 글머리에 언급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의미인 '연기(緣起)와 인과(因果)'로 크게 보지 못하고, 세 번째의 좁은 의미인 '윤회(輪廻)'로 해석한 결과이다. 단멸론은 개체적 수준과 관점보다는, 전체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현생의 인과는 상당 부분 개체적 관점이 옳을 수 있으나, 다생(多生)에 걸치는 통시적(通時的) 인과'는 전체적 관점이 옳다. 뒤에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옛날에는 인과론 대신 귀신이나 신이 모든 일, 즉 생사, 질병, 승패, 성패, 구애, 자연재해 등의 원인이라는 엉터리 인과론을 발명했다. 즉 망상을 했다. 홍수, 가뭄 등은 자연법칙의 인과에 따라 발생하지, 신이나 귀신의 개입은 없다. 유신론을 회개(悔改)하고, 이런 관점으로 거듭나면 이신론[理神論(deism)]이라 불린다. (자연계의 법칙일 뿐이지, " 감을 내놓아라, 대추를 내놓아라!"라고 하면서 인간사에 시시콜콜 개입하지 않는 신을 이신(理神)이라 한다. 달리 얘기하자면 이신(理神)은 헌법 또는 입헌군주다. 군림은 하나 통치는 하지 않는 군주 말이다.)
자연적인 현상은 윤회와 아무 관계가 없다. 동남아시아에 들이닥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쓰나미가 '목사들이 주장하듯이 그 사람들이 기독교 하나님을 안 믿어서 받은 벌'이 아니라면, 지진, 해일, 화산 폭발, 대형 유성 충돌 등은 누구의 업도 아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피해자의 업과는 무관하다. 그냥 자연현상일 뿐이다. 자연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비가 오면 아이스크림 장사에게는 나쁠지 모르나, 개구리에게는 좋은 일이다. 好惡(호오)는 우리 의식(意識)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개념이다.
우리 의식(意識)은 자기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만들어, 이런 옳고 그름이 유지되려면, 개체(個體)가 정체성(正體性)을 유지하며 윤회(輪廻)해야 한다고 망상(妄想)을 피운다.
불법(佛法)의 정수 408
불법(佛法)의 정수(精髓)는 이렇다 : 다른 동물(축생과 인간)을 자기 뜻대로 부리려는 '탐욕'과,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증오'를 (일체(一切)의 선입관(先入觀)이 없이) 觀(관)하라. 그 결과로, 탐욕(貪欲)과 증오(憎惡)의 주체(主體)라 생각한 내가 비어있고 없음을 즉 '무아(無我)'와 '공(空)'이라는 것을 볼 수 있으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고통(苦痛)을 벗어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또는 마음을 정화(淨化)하기 위한 좋은 업(業)을 쌓기 위해 수없이 윤회(輪廻)할 필요가 없다. 이런 관점(觀點)과 인식(認識)의 전환(認識轉換)이 바로 불교(佛敎)의 진수(眞髓)이다. 단 한 번뿐인 희귀(稀貴)한 사건(事件)이다.
작은 자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윤회는 필요 없다.
윤회하는 것은 개체가 아니라 집단이다. p.414
자기라는 걸 자기 육신에 한정시킬 때 개인의 환생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자기를 가문(家門), 문중(門中), 국가, 인류, 동물계, 생물계, 우주 생물계, 우주 의식계로 크게 확장하면 환생이 필요 없다. (유학자들은 윤회를 믿지 않았으나, 자신을 가문과 동일시함으로써 존재를 이어갔다. 그래서 [좁은 의미로서의 자기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말하자면, 후손이 살아남으면 자기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윤회 환생이란 개념은, 감기의 일종에 불과한 메르스 균에게도 속절없이 당하고 공황에 빠지는 인간이라는 하찮은 생명체가, 자신을 좁은 몸(육체) 속으로 반복해서 밀어 넣음으로써, 그 좁은 정체성을 영원히 유지하겠다는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낸 사상이다. (윤회는, 욕계 신이건 색계 신이건 무색계 신이든지 몸을 가지고 환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몸에 대한 집착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윤회를 통해서 유지하고자 하는 정체성은 대체 무엇일까? 욕망, 증오, 무지 이런 것일까? 아니면 기억일까? 불완전한 수천 가지 육체적, 정신적 특성을, 윤회를 통해서, 유지하고 싶은 것일까? 과거에 경험한 모든 일을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이런 특성은, 개인이 유지해 주지 않더라도 사회를 통해서 유지된다. 역사를 통해 잊히지 않고 보존된다.
정자, 백혈구, 뇌세포 등이 생명체이긴 하나, 우리는 이들이 식(識)(의식)을 가졌다고 인정하지 않으며, 윤회한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우리 몸의 100조 개 세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모임인 우리 인간은 윤회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세포와 몸과의 관계를 '개인과 사회'로 확장하면, 동일한 논리로, '개인은 의식도 없고 윤회도 안 하지만, 사회는 의식도 있고 윤회도 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든, 임진왜란 당시의 한국과 일본이 좋은 예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이라는 생명체는 여러 차례 환생했다. 그 과정에서 갈라지고 합치고 작아지고 커졌다. 단군조선이 죽고 위만조선으로 환생하고, 위만조선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분열, 환생하고, 다 죽은 다음 통일신라로 환생했고, 그 후에 신라는 죽고 고려로, 고려는 조선으로, 조선은 남북한으로 분할, 환생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400년 전에 수백 개 영주들로 나뉘어 싸우다가 막부시대 한 몸으로 통일, 환생했으며, 150년 전에는 메이지유신으로 막부 시대가 죽고 근대국가로 환생했다가, 다시 태평양 대전의 패배로 사망했다가, 마침내 민주주의 국가로 환생했다. 더 좋은 예로는 무수한 왕조가 생로병사를 거듭한 중국을 들 수 있다. 유럽, 아프리카, 중동도 마찬가지이다.
과대망상과 존재에 대한 집착이 윤회를 통한 환생을 꿈꾼다.
윤회론은 생명과 우주의 실상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킨다 p.416
불교에서는 윤회를 '촛불의 이어 붙음'으로, 열반을 '촛불의 꺼짐'으로 아름답게 묘사한다. 이 촛불에서 저 양초로 불이 옮아 붙었지만, 두 촛불이 같은 촛불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촛불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불이 이어 붙을 양초가 없어서 촛불이 다하는 걸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여기서 촛불은 당연히 의식을 말한다. 의식이 옮아 불붙다가 마침내 의식이 다하는 걸 열반이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을,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이나 집단의식이 아닌, [초롱초롱한 현재 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좁은 의미의 해석일 것이다. 그런데 이 좁은 의미의 초롱초롱한 의식을 꺼뜨리지 말고 영원히 이어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힌두교, 자이나교, 한국불교에 있다. 아주 많이 있다. 잠을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절대로 잠을 자지 않겠다고 자꾸 감기는 무거운 눈꺼풀을 버티며, 한사코 잠을 자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이다. 존재(有)와 의식(識)에 대한 욕망과 집착은 이처럼 집요하다. 그리고 무서운 광기를 생산한다.
인간이 자기가 '우주의 주인인 참나'이거나 또는 '우주와 하나'라는 과대망상을 하는 한, 그래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과 집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즉 '자신의 의식을 영원히 꺼뜨리고 싶지 않다'라는 욕망이 있는 한, 통속적인 윤회론은 영원히 인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런, 존재와 의식에 대한 탐욕은 생명의 실상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므로, '초롱초롱한 의식을 지닌 채로 영원히 살겠다'는 집착에 기반한 윤회론은 진정한 의미의 단멸론이다. 이런 윤회론은, 진제 종정 스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진화론과 우주론 부정 등 과학과의 단절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단멸론이기도 하다.
출처 : 강병균 교수 역저.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첫댓글
오늘도 많이 웃으시며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날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