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이다. 냉이는 벌써 비닐하우스 안에 많이 보였다. 이제 곧 쑥이 올라올 것이다. 겨울을 견디고 돋아날 그들이 벌써부터 고맙고 반갑다.
귀농을 계획하고 구입한 땅은 팔순을 넘긴 노부부의 땅이었다. 20년 동안 가꾸며 살아온 농토를 농사일이 버거워 내놓았다고 했다. 그곳에 집을 짓고 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땅을 샀다고 해서 금방 들락거리는 것이 조심스러워 한동안 들르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곧바로 농사를 지을 형편도 아니었다. 땅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고 있었다.
1년 후, 봄이 되었다. 남편의 정년이 일 년 앞으로 다가왔다. 농장을 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뀔 계획을 세웠다가 눕히기를 반복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땅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온갖 풀들이 무심하게 돋아났다. 멀리서 보면 평화로운 초록의 잔디밭처럼 보였지만, 그곳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 내 마음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씀바귀, 쇠뜨기, 명아주, 광대나물, 봄까치 풀 등 내가 아는 풀과 모르는 풀들이 섞여서 신나게 자라고 있었다. 유기농이나 친환경 농사를 짓기로 해서 제초제는 할 수 없었다. 땅을 거름지게 만들기 위해 우분을 섞어 포클레인으로 갈아엎고 풀까지도 거름으로 만들었다. 농사를 지을 곳이 아닌 통로와 길이 될 자투리땅에 있는 풀들은 볼 때마다 일삼아서 뽑았다. 초록으로 뒤덮인 들판이 꿈속까지 따라와서 그 많은 풀을 어쩌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게 했다.
다음 해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어 놓은 밭에 풀들이 좋은 세상을 만난 듯 자라났다. 수확은 멀었는데 풀은 정신없이 솟아올랐다. 복숭아를 길러서 팔기는 요원하고, 차라리 풀을 캐서 팔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뿌리가 깊어서 땅을 거름지게 만든다는 호밀을 심었더니 잡풀이 덜 자랐다.
그런 와중에 반가운 것은 냉이와 쑥이었다. 그들은 무시하기엔 너무 귀한 존재들이다. 냉이는 된장국과 나물이 되었다. 향긋한 냉이는 입맛을 돋워주기에 충분했다. 봄철에 먹는 냉이는 인삼보다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양이 풍부하다고 한다.
쑥은 된장국과 쑥 부침, 떡을 해 먹기도 해서 활용도가 매우 높은 나물이다. 그 봄엔 쑥국이랑 쑥 부침을 많이 만들어 먹었다. 다음 해에는 쑥을 데쳐서 절편을 만들어 엄마와 형제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시간만 있으면 쑥을 캐서 깨끗하게 씻고 데쳐서 말렸다. 말려서 모아 놓은 쑥으로 미숫가루를 만들 계획이었다.
일이 점점 커져서 검정콩, 현미 찹쌀, 귀리, 율무, 수수, 조 등을 국산 재료로 구해서 모두 씻어서 말렸다. 거실의 햇볕이 잘 드는 쪽에 선풍기까지 틀어 놓고 여러 날 동안 말렸다. 종류별로 포장해서 방앗간에 가져갔다. 보리를 넣어야 맛있는 미숫가루가 되기 때문에 방앗간에서 보리를 추가해 만든 미숫가루는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았다. 엄마와 형제들에게, 친구들에게 나눠 주었다. 정성이 많이 들어간 미숫가루를 모두 반가워했다.
음력 2월 쑥은 보약이라고 해서 2월에 캤는데, 3월에도 4월에도 쑥은 계속 나왔다. 볼 때마다 쑥을 캐 쪄서 말려 보관했다가 가을에 또 한차례 미숫가루를 만들었다. 그렇게 먹기는 간편하지만 만들기는 바쁘고 번거롭기 그지없는 미숫가루를 만드는 일이 계속되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소읍에서 살았던 터라 이유식으로 미숫가루를 만들어서 먹였다. 쑥을 캐고, 검정콩을 볶고, 밤을 쪄서 말리고, 호두와 현미밥을 말리고, 시금치를 데쳐서 말리는 등 지금 생각해 보면 번거로운 일들을 참 많이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은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제는 그런 일들이 힘들 때가 된 것 같다. 남편과 두 아들의 삼시 세끼를 책임져야 하는 나로서는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아침은 간편식으로!’라고 선언했다. 우유에 꿀 한 숟가락 넣은 미숫가루 한 잔, 계란 프라이, 사과 한쪽이 아침 식사가 되었다.
미숫가루는 계속 먹어 온 음식이다. 엄마가 늘 해주셨던 것을 2년 전부터는 내가 하게 된 것이다. 바쁜 농사일에도 미숫가루와 미음 가루를 빼먹지 않고 해마다 해주셨다. 미음 가루는 각종 곡식을 날가루로 만든 것이다. 남편이 술 먹은 다음 날 끓여 주었고, 뱃속이 불편할 때 먹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엄마는 올해 팔순이 되셨다. 며칠 전, 정월 대보름에 찰밥과 나물들을 만들어 오 남매에게 보내시던 행사를 이젠 기운이 없어서 못 하겠다고 하셨다. 엄마가 해주시는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못 먹는 서운함도 있지만, 엄마의 기력이 그만큼 쇠약해지신 것이 큰 걱정이다.
먼 곳에 사는 형제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 엄마 건강을 걱정한다. 매일 전화 통화는 하지만, 나도 농장 일이 바빠서 들러보지 못했다. 이제는 집안의 가장 큰 행사인 김장도 끝이라고 하신다. 재작년부터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김치를 담가 동생네와 나눠 먹었던 것처럼 이제는 차츰 그런 일들이 우리 세대로 넘어오고 있는 것 같다. 쑥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번거롭고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쑥을 보면 참을 수 없어 부지런히 쑥을 캐 미숫가루를 만들어야겠다. 미숫가루로 가족의 건강을 챙기고 엄마와 형제들에게도 건강을 배달해야겠다.
첫댓글 그 바쁜 시간에 이렇게 긴 글을 써서 올린 민금순님,
정말로 놀랄만큼 대단한 열정이네요.
연일 계속되는 농사일에 지칠법도 하건만 굳은 의지가 글 속에서 감탄을 일으키고 있어요.
부지런한 성품은 누구도 못 따라갈 것 같은데 쑥을 볼 때마다 참을 수가 없다니 맛있는 미숫가루로 다시 태어나겠지요.
바빠서 글 쓸 시간도 책읽을 시간도 많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주1회 서평하나, 수필하나라도 쓰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급한 일 마치면 조금 나아지려나 계속 바빠지려나 생활패턴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걱정입니다. 그 와중에 몸은 계속 지쳐갑니다. 파릇한 풀들을 보면 기운을 받곤 합니다.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참 바지런한 분이셔요
쑥색이 어찌 저리도 해맑음일까요
작가님이 저 쑥을 닮은 듯
글도 저 쑥처럼 건강함이 느껴집니다
고향가고 싶어집니다
쑥도 햇빛에 따라 밝기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생명력이 정말 강해서 사람한테도 좋은 것이 쑥인 것 같습니다.
저는 쑥향이 그렇게 좋더라구요. 왠지 몸에 막 좋을 것 같은 한약 냄새 같기도 하고요.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건강한 나날 보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