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인자함이라 하고 무엇을 방일(放逸)함이라 하는가.
게으름을 강하게 표현하면 방일함이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육체적인 것을 게으름이라
하고 삼업(三業) 즉 몸과 마음이 함께 게으른 것을 방일함이라 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안주(安住)하고 타성(惰性)에 젖은 사람이다.
그러면 무엇이 인자함이며, 무엇이 방일한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게으르지 않은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자애로움을 지니고 사는 것일까?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 뜻은 바로 개시오입(開示悟入)이다. 불지견(佛知見)의 세계를
열어서 보이고 그 세계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참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세상에 들어가서 자유로움을 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져 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우리들에게 늘 인식기관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알게 해주는 것이
있는데, 이를 우리는 배움이라 한다. 우리가 이익이 안 생기고 나의 일이 아니면 꼼짝도 하기
싫은 것이 방일함이다.
배움을 좋아 한다는 것은 부지런한 것이다. 바로 정정진(正精進)이다.
배움이 없는 이들은 생각이 줄어든다.
우리는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공부를 하여야 한다.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신심이라는
생명력을 가지고 엉클어진 실을 풀 듯, 자신의 소견이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가려졌을 때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한 올씩 풀어가면 온전한 모습을 지니게 된다.
그런 모습이 기도하는 모습이요 정진하는 모습이다.
번뇌라고 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망상이라는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五慾)을
여의는 공부를 닦게 되면 따로이 대자대비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달리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인자함을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마음 없는 마음을 마음이라 하는데, 세속적으로는 이해 할 수 없겠으나, 분별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는 그 마음이 마음 없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참 마음이라 하셨다.
어둠 속에서 등잔불을 밝히면 어둠이 이내 사라지고 방안이 밝게 되듯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지혜광명의 등불이 밝혀지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인자함이란 세상 이치이다. 하지만 보살은 세상법의 인자함은 버린다. 비워야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인연을 쫓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인자함을 버리는 것은 범부의 인자함이요, 인자함을 얻는 것은 보살의 인연이 없는 인자함을
진정한 사무량심이라 한다.
우리는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려우나 그 법을 만났고, 바른 가르침 듣기 어려우나 함께 공부하고
있으며, 큰 나라에 태어나기 어려우나 우리는 큰 나라에 태어났다.
스승이 없었다면 그 가르침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으며, 도반이 없었다면 어찌 게으름을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선가구감(禪家龜鑑)에 ‘공부가 한 고비 한 고비만 넘으면 비록 금생에 깨우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 감을 때에 악업에 끌리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우리는 게으름의 뿌리를 뽑아내어야 한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다 번거롭고,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면 세상도 맑고 깨끗해진다.
모든 것은 다 변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인가에 너무 집요하게 집착되어져 있다.
집착하려는 것은 본래 집착할 수 없는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고,
집착하면 안되는 것에 집착하려 하는 것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빌려온 인자함을 버리고 나의 인자함이 드러내어 지면 우리는 넉넉한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