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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노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유명자 사모(서창원 목사)
1980년대 영국 유학시절 때 느낀 것은 사회가 약자들 편에서 늘 배려하고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만들어졌고 노인들과 아이들을 위한 배려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세 명의 자녀와 함께 버스를 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운전기사가 직접 내려와서 유모차와 두 아이를 데리고 버스에 올라타고 나는 막내만 안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기사는 큰 유모차를 짐칸에 실어주었다. 승객들은 짜증을 내는 일이 없이 기다려 주었고, 도리어 우리 아이들에게 따뜻한 눈빛과 함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할 정도였다. 그래서 영국과 잘사는 유럽 국가들을 한국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인 천국, 아이들 천국, 장애인 천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3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나라가 장애인과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한 정책들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점점 고령화 되어가고 있고 노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다. 노인 인구는 급격한 추세로 증가하고 있고 이들의 노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숙제로 남아 있다. 더 이상 자녀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 가는 분들도 있는가 하면 자녀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는 노인들도 적지 않은 형편이다.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고통가운데 보내는 분들도 많이 있는 현실이다. 선진국들은 젊었을 때부터 월급의 많은 부분들을 연금과 사회보장비용으로 납부하기 때문에 은퇴 후에도 물질의 염려가 별로 없다. 정부가 연금을 지급하며 노인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인들이 은퇴 후 더 나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녀들 교육비를 비롯해서 부모 봉양하는 일들에 많은 물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노후대책은 엄두도 못내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가 노인들을 돌보는 것보다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의존되어지기 때문에 가족 간의 불화와 고통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부모가 치매환자로 심한 노인성 질병에 걸려서 도저히 자녀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 요양원이라는 시설을 보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도 따가운 눈총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불효자라는 생각을 지워내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옛날에는 지게를 지고 산에다 버리는 고려장을 했지만 지금은 차를 태워서 요양원에다 버리는 고려장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러한 사회적 현상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노후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믿음의 생활의 본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래된 교회마다 노인들의 숫자가 젊은이들보다 더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은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형편이지만 노인들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회에 남아서 주님과 함께 믿음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노년이 되었어도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힘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젊은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2-8).
옛날에는 부모님들의 가르침도 있었지만 집안의 어른들이나 동네 어른들도 자기 자녀뿐 아니라 다른 집의 자녀들까지도 늘 훈계하며 사랑의 관심을 가지셨다. 아이들이 싸우면 말리고 더러운 말들을 함부로 하면 역정을 내시고 하지 말라고 하신 기억들이 난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른들이 잘못하는 청소년들에게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도 어느 누가 다가가서 말리지 못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곧 이 나라의 일꾼이요 보배이다. 부모의 책임도 있지만 우리 모든 어른들의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사랑의 관심과 훈계를 하지 못하는 사회가 된다면 불을 보듯이 뻔하지 않겠는가?
교회의 공동체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성경에는 노인들에게 젊은이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라고 하였다. 먼저 노인들이 그들의 본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사단이 훼방하지 못하도록 젊은이들에게 교훈하라는 명령을 하셨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온 노인들이 젊은이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말씀 선포를 하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시지만 그 외에 노인들에게 주신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교회의 젊은이들은 교회를 이끌어 가는 기둥과 같은 존재이고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가야 할 역군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막중한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다. 교회를 사랑하기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젊은이들이 단지 주일날 예배하는 일로 만족하며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들을 자행하면서도 하나도 불편함 없이 잘 살고 있는 자들이 교회 안에 무지기수이다.
젊은 여자들에게는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개발을 위한 일에 헌신하도록 모든 환경을 조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여성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며 집안일을 하게하며 선한 일을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곧 사단의 훼방을 받아서 가정의 파괴가 순식간에 몰려오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순종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젊은 남자들도 경건의 훈련을 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에 유혹되어서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예를 들면 목사님께서 가정에 심방하는 날은 신앙의 어른들은 하나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집안을 정리하며 예쁜 화분을 장만하며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 가정에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축복의 기도를 받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심방의 개념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 예배당 안에서의 목사님으로 만족하며 우리 가정의 일들은 비밀로 알리고 싶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애매모호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말을 해야 알 수 있고 예방을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말하지 않고 단지 예배당만 다니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때로는 목사가 직접 말하기가 민망할 때도 없지 않아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드신 권사님들께서 젊은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의 언어로 잘 훈계하며 교육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신앙의 어른들이 이때 진가를 발휘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르치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노인들은 몸은 쇠약해지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살아온 경험들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주셨다. 또한 젊은이들은 몸은 건강하지만 지혜가 많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살아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먼저는 신앙의 어른들이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에게 복종하는 성실한 아내로서 젊은이들에 본을 보여 주셔야 하며 가르치고 훈계하는 일을 지혜롭게 하셔서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 바란다.
2.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속사람의 강건함을 키워가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나이가 들면 아픈데는 점점 많아지지 줄어들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무리 건강에 신경을 쓰고 좋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매일 먹어도 육신은 약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이치요 섭리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건강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은 약해지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강건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 몸을 위해서 모든 정력을 기울이는 것보다 점점 좋아지는 속사람을 키워가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그러나 노인들이 모여서 주로 하는 말은 이곳저곳 아픈데만 말하고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에 대한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아픈 자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병원과 의사와 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적절하게 잘 사용하여 더 나빠지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일 것이다. 자녀들에게도 아프다고 늘 똑같은 말을 하므로 부담을 주어서 힘들게 만들기보다는 노년기의 성도들은 은혜로운 말들로 감동을 줘야 한다. 늙을수록 고집이 세지고 불평이 많아지고 감사가 없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이라면 모든 면에서 수준급 이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라면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들을 가져야 한다. 감사를 했어도 젊은이보다 더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을 입에 달고 산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며 자녀들에게는 무슨 본이 되겠는가? 도리어 큰 고통의 마음을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늙음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 살고 싶어도 질병으로 불의의 사고로 살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늙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요 맡겨진 일들을 다하고 오라고 하신 깊은 뜻이 있음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값지고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고 하신 말씀 때문이다. 그 말씀을 따라 모든 일에 감사하는 믿음의 표현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비록 나이가 들어서 육체적인 힘으로 하는 것은 어렵지만 정신적인 것은 얼마든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영적인 능력을 키우시며 날마다 새로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노인이 되었으니 가족들도 많아졌을 것이고 아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며느리와 사위들에게 한량없는 사랑의 말을 해주는 것이 내 자식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자녀들에게도 늘 감사의 표현과 함께 인정하는 말들이 오고갈 때 세상에서의 지친 그들의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될 것이다. 손주들에게도 하나님을 알게 하는 모든 것이 되어주어야 한다. 귀엽다고 사랑스럽다고 무례하게 굴어도 그냥 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훈계하시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속사람의 경건함을 나타내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삶을 통해서 보여줘야 한다. 말과 행동을 더 겸손하게 친절하게 따뜻하게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교회에 새 신자들이 오면 따뜻한 위로의 말과 반가운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한다면 새 신자들이 고향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라고 했다. 신앙의 어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교회를 섬긴다면 이 얼마나 귀한 일이겠는가? 인생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분별력이 생겨서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떤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영적인 것도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 성도들의 신앙상태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연약한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세워주는 일들을 한다면 교회 공동체가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사람들을 주님께 다가가도록 영적인 힘을 발휘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가지고 늘 새롭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늙었다고 뒷짐 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강건함으로 교회를 세워가고 젊은 성도들을 돌아봐야 한다.
3. 깨끗하고 청결한 삶을 유지해서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후의 생활도 준비하지 않으면 노후에 저절로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없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늙어서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일들이 수도 없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늙음의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계획해야 하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청결한 삶을 유지해야 하는데 몸이 아프면 모든 것이 귀찮아 지기 때문에 주위가 깨끗하지 못하다. 나이가 들수록 위생관념이나 체면을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더 자주 씻고 청결하고 깨끗한 노인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좋다. 늙을수록 욕심이 많아지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집에 쌓아 두려고 하는 심리가 있다. 그러나 결코 다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인생임을 늙어서 배우는 것이다. 옷도 더 자주 갈아입는 것이 좋다. 옷장에 좋은 옷들이 있으면 과감하게 꺼내서 아끼지 말고 입자. 나중에 입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날그날 깨끗하고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노인들에게는 나중이라는 것이 없다. 선진국에 노인들을 보면 화장을 하고 다니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옷도 깨끗하고 화려하게 남에게 인상을 찌푸리지 않게 처신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늙었다고 젊은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들은 신선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노인들은 특유의 냄새가 있다. 그래서 더 깨끗이 씻어야 하고 집안도 환기를 자주 시켜야 한다. 냄새는 더 많은 냄새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어서는 안된다. 노인들은 내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특히 손주들에게는 더욱 더 깨끗한 모습을 보여야 하며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입에 있는 것을 꺼내서 주는 일은 삼가야 한다. 노인이 되면 화장실문을 꼭 잠그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혐오감을 주는 행동이므로 반드시 화장실 문을 꼭 닫는 습관이 필요하다. 식탁에서도 흘리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항상 휴지를 준비하고 흘린 것을 손수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젊은이들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은 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예의바른 식사법을 배워가야 한다.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수시대의 살고 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하고 깨끗한 주위환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늙음을 탄식하기 보다는 늙어가는 것에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더 잘 늙을 수 있을까를 공부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어린아이도 늙어가는 것이고 꽃같은 청춘인 젊은이들도 늙어가는 것이다. 노인들은 지금 늙은 것을 먼저 체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노인들에게는 큰 해가 될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즐겁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다. 노인들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없을 수도 있다. 하늘의 소망뿐이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들을 잘 활용하는 것은 지혜있는 자만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4. 주는 훈련을 통해서 기쁨을 누려라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 20:35). 우리는 물질 만능시대에 살고 있다. 늙어도 물질의 욕심은 끝도 한도 없는 것 같다. 요즈음은 늙어도 돈이 있어야 된다고 저마다 보험을 들고 노후대책을 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늙어서 쓰는 것은 젊었을 때보다 그리 많치 않을 텐데 자식들에게 대우를 받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일상적인 대화가 된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가끔 신문지상에서 보면 평생 힘들게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한다든지 어느 대학에 기부하는 노인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전 재산을 바치는 일은 찾아보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한평생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세어보면 말로다 다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빈 몸으로 이 땅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것을 누렸는지 세어보라. 그리고 나그네 인생길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늙어서는 하나씩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죽은 자의 것을 유품이라고 하지만 자식들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 살아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보람된 일일 것이다.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살아서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씩 주는 습관이 몸에 베었으면 한다.
노인들에게는 사회에서 주는 혜택이 많이 있다. 교통비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할인의 혜택이 있다. 누구에게나 주는 것이지만 꼭 필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여유있는 분들은 양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물질의 욕심은 나이가 들수록 더 간절한가보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혜택을 다 누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주는 훈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님께 갈 날이 가까워 오는데 주위 사람들이 무엇이 필요한 지를 살펴보는 것도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과감히 주는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성경에는 말씀하고 있다. 그들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고 하였다. 욕심보를 늘려서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서 하나님과 사람들이 기억하는 노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도르가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리어 구제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녀가 병들어 죽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슬퍼하자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녀를 살려 주셨다. 돈은 날개가 달려 있어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는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선행과 구제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칭찬과 상급을 받는 보물이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회개하자. 지금부터라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부지런히 섬기며 봉사하는 일들을 하자. 받는 것에 더 익숙해진 우리들의 행동과 생각을 버리고 주는 것에 더 익숙해지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는 훈련을 힘을 써서 하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관심과 사랑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해주는 믿음의 노인들이 되기를 바란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주님의 종들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보를 채우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 노인들이 섬기는 것을 가르치며 솔선수범해서 모범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젊은이들에게 영적인 교훈이 될 것이며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공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젊어서부터 주는 것을 훈련하지 못하면 늙어서는 더 힘들다. 자녀들과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진 것이 많아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나누어 주자. 주는 자만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윤택하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하고 가치있는 삶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남은 인생을 더 값있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실천하여 신령한 복을 이 땅에서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한평생 주님의 자녀로 살면서 하나님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는 복을 받아서 남은 인생의 여정을 활기차고 기쁘게 살아서 후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5. 독서를 통해서 어휘력을 향상시키라
노인들의 특성 중에 하나가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해서 하는 습관이다. 자녀들이 가장 많이 부모들에게 한 말 중에 하나가 ‘한 번만 더 들으면 백번이다’라는 것이다. 좋은 말도 자주하면 귀찮은 것인데 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것은 짜증나게 만드는 일 중에 하나일 것이다. 노인이 한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미래가 불투명하여 과거에 집착하는 삶을 살기 때문인 것 같다. 늘 과거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한들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말이 늘 ‘공부 열심히 하라’ 그리고 ‘TV를 많이 시청하지 말고 책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것을 우리 노인들에게 적용하고 싶다.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하는 습관을 길렀으면 한다. 늙었으니깐 공부하고는 나하고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뇌를 사용하는데 20%밖에는 활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머지 80%는 언제 사용해야 하는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우리의 뇌를 사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 않을까? 그런 뇌를 늙었다고 방치하면 치매에 걸리기 쉬울 것이다.
노인들의 지혜를 더 잘 살리기 위해서는 책을 통해서 간접경험을 계속해야 한다. 삶의 경험으로만 얻어지는 지혜가 아니고 좋은 신앙서적과 양서들을 읽으면서 두뇌 활동을 좋아지게 만들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폐쇄적이고 모든 일에 소극적이게 된다. 될 수 있으면 모든 일에서 손을 놓으려고 하는 마음이 들기가 쉽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좋은 습관들을 길러야 한다. 옛날에는 노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들은 곧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이들보다 오히려 노인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세대에 살고 있다. 은퇴 후에도 창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를 주어서 사회에 공헌하는 노인들이 의외로 많다. 성경에도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였고 영국에 처칠 수상은 81세에도 수상의 일을 하였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80세에도 설교를 매일했다고 하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가?
수십년간 목회하면서 설교하신 목사님의 설교는 당연히 진리의 말씀에 푹 빠지게 하는 큰 은혜로 다가올 것이다. 늙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생각은 쓰레기통에 버리자.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시 92:12-15). 늙어도 과실을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늘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성숙한 삶을 통해서 노인들에게 주신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젊어서는 직장생활 하느랴 바빠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늙어서는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다. 성경공부도 하고 노인대학에 나가서 창의적인 것들을 배우며 소일거리를 찾아나서야 한다. 또한 책을 가까이 하는 노인들이 되어서 풍부한 어휘력을 발휘해서 선한 말들을 한다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늙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잘 늙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삶의 질을 높여서 매사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믿음의 노인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집중력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독서는 반드시 멋진 노인들이 되게 할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살아온 삶의 경험과 함께 책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의 여정이 될 것이다.
6.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7-18). 어릴 때부터 백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개무량이 따로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하며 더 성숙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비쳐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육체는 점점 쇠약해지지만 영적인 것은 점점 깊어져야 하며 진리의 말씀이 삶의 목표로 이루어지는 단계가 노년기이다. 부모들도 나를 떠나고 자녀들도 결혼해서 가정을 떠나지만 변함없이 우리 곁에서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인생의 여정이 행복한 것이다.
노년기의 삶을 더 보람있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신령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삶은 부끄러운 삶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을 덧입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될 수 없다. 세상의 것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믿음의 용장들로 변해가야 하지 않겠는가?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젊은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노년의 삶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총이다. 장수의 복은 주님의 것이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장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론 기억력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분별력과 판단력은 젊은이들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들에게 인생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예수님의 관해서 기회가 주어지는 데로 말해 주어야 한다. 세상은 결코 하나님의 대해서 말하지도 않고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젊은 부모들의 바쁜 삶으로 인해서 믿는 가정에서조차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쉽지가 않는 현실이다. 이럴 때 노인들이 손주들을 앉혀놓고 진리의 말씀을 말해 주어야 한다. 물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존경받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늙음을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늙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할 수 없는 영적인 일을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서 해야 되지 않겠는가? 조부모가 살아계신 것이 손주들에게 큰 복이요 은혜임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기도의 습관을 들여야 한다. 노인들의 특성은 너무 염려와 걱정이 많다. 생각이 갈수록 좁아지고 삶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염려와 걱정은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고 삶의 의욕을 뺏어가는 나쁜 습관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노인들이 실천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어내야 할 때이다. 노인의 쾌쾌묵은 냄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려면 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주름살이 많아지고 몸은 점점 굽어지고 육체는 시들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노인들의 모습일 것이다. 성령의 충만한 삶은 나이가 들수록 더 간절하게 사모하는 것이라야 한다. 연약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늘 주님 생각으로 가득차야 한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죽은 영혼들을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간다면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지런히 찾아내어 주님의 품으로 안기게 해야 한다.
노인들은 귀도 잘 안 들리고 눈도 잘 보이지 않고 몸도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 더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쁜 자식들에게 하소연해봤자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많지가 않다. 오히려 노인들이 더 따뜻하고 온유하게 겸손함으로 자녀들을 감싸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자손들에게 잘 전해주어야 한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시 71:15). 노인들이 될수록 세월을 더 아끼고 종일토록 주님만 의지하며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담대히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7. 축복을 해주는 삶을 살라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 47:9-10).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바로 왕이 험악하고 고된 삶을 살아온 야곱을 축복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야곱이 모든 것을 가진 왕을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것이 믿는 자의 사명이다. 특히 긴 세월을 살아 온 연로자의 사명은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복을 담대하게 전하는 일이다.
신체 중에서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 부분이 혀라고 한다. 다른 신체는 늙어지고 약해지고 갈수록 쓰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혀는 평생 주름이 없이 늙지 않는다고 하니 과연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말하고 속사람을 새롭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 말에는 인격이 담겨있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격을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요즈음같이 험악한 말들이 오고가는 세대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말이 공손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의 말은 욕이 곧 대화가 되어 버린 지가 너무나 오래 되었다. 어른들도 다듬어진 말이 아니라 입에서 함부로 쏟아내는 말투가 되어서 듣기가 거북하다. 한국말은 영어와는 달리 참으로 존칭어와 다른 사람들을 높여주는 존경어가 있다. 말의 힘은 놀라운 것이다.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고 격려해 주는 언어사용은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어려운 세월과 고통의 시기를 거친 노인들의 삶을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에 늘 위로를 받으시고 입으로 하는 말은 다시 담을 수 없음을 알고 함부로 말하는 습관을 고쳐야 한다. 가진 것이 없다고 노인들이 무슨 힘이 있냐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것은 결코 물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어린아이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말해 준다면 그들에게는 엄청난 영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노인들의 말의 덕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교인들의 사생활을 아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도 없는 자리에서 덕스럽지 못한 사생활을 들추어서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도들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노인의 지혜가 아닐까?
특히 목회자의 가정과 사생활을 잘 보호해 주었으면 한다.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말해서 일을 크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요즈음은 목회자의 ‘수난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을 많이 살아온 어른들의 지혜가 너무나 간절히 필요할 때인 것 같다. 교회 안에서도 함부로 말하는 것 때문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더 많이 들은 노인들이 늘 말씀묵상을 통해서 입으로 나오는 말들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처럼 하는 경지에 올라가야 한다. 이것은 노력이 없이 저절로 되어 질 수 없는 영적인 것이기에 늘 깨어서 기도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복을 빌어준다면 노인들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겠는가? 내 주위에 늘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한다면 그보다 더 행복하고 복된 삶이 어디 있을까? 하루 종일 아무도 못 만나고 외롭게 세월을 보내는 노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말해 주는 자에게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더욱 더 힘써서 영적인 것을 누리고 사는 건강한 노년의 삶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8.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이 되게 하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죽음이란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무식한 자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손님이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죽음을 경험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시다. 성도들은 죽어야지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노인이 되었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기에 죽음을 친한 친구로 여겨야 한다. 죽음을 잘 준비하라고 오랜 세월을 살게 하신 것이 아닐까? 노인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친구부터 시작해서 때로는 한평생 같이 살아온 배우자의 죽음을 비롯해서 자녀들의 죽음도 지켜보는 마음이 찢어지는 경험을 하는 경우도 많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기에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잘 사는 것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죽음도 잘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자기들하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목사님이 노인들을 심방할 때 자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녹음을 해둔다거나 글을 써 놓으라고 한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기에 자녀들에게 미리 말해두라고 하지만 그 말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선진국에서는 죽기 전에 유서를 미리 써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변호사를 통해서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서류로 만들어 둔다. 또한 교회 뜰 안에 무덤이 있다. 죽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나도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인식을 늘 하게 한다. 과거에는 40세가 넘어도 죽을 준비를 했고 환갑이 지나면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을 모든 사람들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듯이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는 먼 나라에 이야기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는 대학에서도 죽음교육의 학과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죽음이 곧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은 형제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소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기쁨의 시간이요 부활의 승리가 있는 곳이다. 누구나 찾아오는 죽음을 담대하게 침착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며 준비하는 성숙한 모습이 노인들에게서 풍겨나야 하지 않겠는가? 폴리갑 목사님께서는 86년 동안 나에게 늘 신실하셨던 주님을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로마법관의 말에 응하지 않고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셨다. 종교개혁가인 존 낙스 목사님께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라고 임종 시에 유언하셨다. 인생을 마감하는 시기에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죽으나 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노년의 성숙함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가 들면 모든 육체가 약해지는 창조의 질서를 배우면서 노인은 노인다워야 아름다운 것이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 20:29).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 46:4). 노인들도 하나님께서 아름답다고 하셨으니 늙은 것은 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많이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백발이 되기까지 안아주시는 경험을 하면서 믿음의 신실한 삶을 살아가시는 노인들이 되시기를 소원한다.
- 진리의 깃발 통권 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