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을 통하여 누리는 기쁨/요한일서 1:1-10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퀴즈를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성냥개비의 생환’이라는 제목이 붙은 다음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PPT 참조) 힌트➀ 코로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힌트➁ 다음의 문구를 참고하십시오. “누구 하나가 거리를 둔 덕분에 모두가 살았다” 답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입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코로나 확산세가 멈추지 않는 가운데 세계 각국이 코로나 백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시간이 더디기만 하고, 코로나를 예방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는 서로 만나지 못하여 마음도 멀어지는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역당국의 생활 속 거리두기 개인방역 5대 핵심수칙에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코로나 확산방지라는 명분으로 모든 교회의 소그룹 모임과 식사 제공을 금지시키고, 정규예배도 온라인으로 드리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에 집단 확진 사례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철저하게 환기 및 소독을 실시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를 두고 착석하여 예배드리고 있는데 불구하고 이런 조치를 몇 달째 강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통하여 깨닫는 것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귐을 통해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는 말씀에 저의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사도 요한 당시 교회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이단의 출현으로 저들과 치열한 영적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사귐을 통해 기쁨을 누릴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이 말씀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와 저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 종류의 사귐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사귐, 다음으로 성도들과의 사귐입니다. ‘사귐’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서로 얼굴을 익히고 가깝게 지냄”이라고 정의합니다. 진정한 사귐을 위해서는 가까이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첫걸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아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의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자 결단하고 실천합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과의 사귐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1-2절에 “태초로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초로부터 있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1:14) 즉 태초로부터 있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게 계시다 함이라”(마1:23)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3년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고, 자세히 살피며 만지기도 했습니다.(1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을 눈으로 보거나, 그 분의 음성을 귀로 듣거나, 그 분의 옷자락을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지금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평안과 위로, 치유, 기도에 대한 응답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부득이하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소그룹 모임도 중단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그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전망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그렇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기를 사모하고 힘을 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6절)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 어둠과 죄악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한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1-2)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절)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용서함을 받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과의 사귐
교회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거나, 지연 혈연 학연 등으로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와 자매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는 영적 가족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며 섬기는 법을 배우고 실천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임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되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 만남은 더욱 성숙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영원한 생명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이 말을 듣는 자들과 함께 사귐이 있게 됩니다.(3절)
그리고 우리가 어둠의 죄악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빛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할 때 우리의 사귐은 더욱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7절)
저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교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아멘~ 다같이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미가엘1572) 찬양합시다.
사귐을 통해 누리는 기쁨
본문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을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하였습니다. ‘누림’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마음껏 즐기거나 맛보다”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성도들간에 아름다운 사귐을 통해 우리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이 가지고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 최고의 구두쇠 중 한 사람 히티그린이란 노파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다리에 병이 나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를 안 주어서 다리를 결국 자르고 말았습니다. 외아들은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습니다. 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묽은 죽만 먹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의 병명은 영양실조이었습니다. 죽고 난 다음 유품을 정리하다가 할머니의 통장이 발견되었는데 통장에 120억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도 아들은 다리 수술을 안 해서 장애인이 되고 자신은 안 먹어서 영양실조로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할머니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써 엄청난 축복을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나는 못한다, 나는 없다, 나는 못 믿는다 하고 굶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을 싸우라 해도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제가 언제 받았나요? 하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가면 승리가 있는데도 이것을 믿지 못하고 앉아만 있고,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4절)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 행복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죽음과 저주,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방향도, 목적도, 사는 이유도 알지 못하고 동물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삶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회복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고, 우리의 죄 용서함과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구별됩니다. 그 기쁨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며, 완전하고 충만한 기쁨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완전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통한 진정한 사귐도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교회에 와도 기쁨이 없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졌거나 성도 사이에 사랑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귐을 통해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윤성화 목사의 설교 동영상 : 유튜브 [구미새소망교회]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