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3-16
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은 성도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잘 아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잘 아는 말씀이지만 이보다 더 많은 오해를 하는 성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16절에서 ‘착한 행실’이라는 단어 하나를 잘못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1. 착하다의 의미.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도의 착한 행실은 전혀 다릅니다. 여기 착한 행실에서 ‘착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칼로스’입니다. 이 단어가 요10:11절에도 등장하는데,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여기 ‘선하다.’ 라는 단어가 칼로스입니다. ‘선하다. 착하다.’ 라는 단어가 동의어이고 또 주님이 착하다고 했으니 오직 주님에게서만 착한 행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착한 행실이란 주님 안에서의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열달란트와 열므나의 비유입니다.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에서의 핵심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달란트를 주었고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을 위한 것이었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주인에게 아낌없이 주었지요. 그리고 주인은 미안한 기색이 없이 종들이 바친 달란트를 전부 가져갔습니다. 종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과 시간을 허비하며 주인이 원하는 장사를 하다가, 결국에는 주인에게 다 돌려 드립니다. 그래서 그들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착하다. 선하다. 우리 주님이 주인이 그러하지요.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대로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 까지도 내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는 자기 주장이 없었고 그토록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을 때 그들을 피해 도망을 가시고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매여 삶을 사셨던 분이 주님이셨지요. 그 주인의 그 종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다 빼앗기고 오직 주인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착한, 선한행실이라는 것입니다.
2. 소금의 의미.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말씀하는 소금의 역할을 생각해 보지요. 빛과 소금의 의미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팔복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팔복의 마지막은 의를 인하여 박해를 받는 것인데, 그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박해를 받게 될 것임을 언급하신 후 그 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을 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빛과 소금의 역할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일이 아니라 핍박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소금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소금-변치 않음.
소금의 의미를 생각합시다. 일반적으로 소금! 그러면 쉽게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짠 맛입니다. 소금은 떤 상황, 조건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고 짠 맛을 유지하는 것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고대 동맹국이 계약을 맺을 때에도 소금을 친 고기를 함께 먹었는데 이는 소금을 친 음식이 변하지 않듯이 동맹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 같은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렇게 성경에서 소금은 변하지 않는 것을 상징합니다.
대하 13:1-5절에서 유다왕 아비야가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왕과 군사들에게 다윗 왕가에 대한 반역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후손들에게 위를 약속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유다를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언약을 거부하는 반역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비야는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을 소금언약이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소금의 성질은 변하지 않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싸움의 결과 북이스라엘이 패배하여 50만이 죽임을 당합니다. 소금언약의 불변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금언약이 영원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소금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소금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군요. 그러면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은 창세전 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소금언약은 창세전 언약입니다. 여러분 창세전 언약이 무엇입니까? 엡1장이지요. 창세전에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양자를 삼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 그 피로 말미암아 죄인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래서 언약을 말할 때 마다 거기에는 죽음이 있고 피가 있습니다(창9:12-16).
2) 무지개 언약.
창세기 9장의 언약을 ‘무지개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럼 무지개 언약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무지개를 봅시다. 무지개를 영어로 rainbow.입니다. rain- 비. bow- 활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럼 그 활이 어디를 향합니까? 땅이 아니라 하늘을 향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누가 희생을 당하여 날 때부터 악한 자가 살아나는 것을 무지개 언약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이라는 말이지요.
그럼 왜 이런 무지개 언약을 할 수 밖에 없을까요? 사람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사람은 어려서부터 날 때부터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교훈을 준다거나 혼을 내준다거나 하는 방법으로는 사람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기에 하나님이 희생을 당하지요. 8장 20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이렇게 노아의 무지개 언약의 배경은 정결한 제물이 부정한 제물들을 살리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사건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나서 무지개언약을 내리세요.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 그러니까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서 거저 살아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그 구원의 은혜성에 초점이 있는 겁니다. 그게 소금언약이에요. 영원한 언약. 창세전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사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3. 제사장과 관계가 있다.
민18장 19절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들어 올려 나 주에게 바친 거룩한 제물은, 내가 너와 너에게 딸린 아들딸들에게 영원한 분깃으로 모두 준다. 이것은 너와 너의 자손을 위하여 주 앞에서 대대로 지켜야 하는 소금 언약이다." 여기에서는 모세가 소금언약을 설명하면서 그걸 제사장의 분깃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제사장에게 영원히 주신다고 약속하신 언약이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제물을 드려 그들을 속죄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백성들은 제사장의 봉사와 희생을 알아주어 그들을 대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소금언약입니다. 그렇다면 그 제사장은 자신을 제물로 바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백성들은 그 은혜를 아는 자들이 변치 않고 그 분께 감사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변하지 않는 소금. 소금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는 그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희생과 봉사, 그 십자가의 그 희생 그 공로를 영원히 대접해 주는 자로 살 수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기 부인이 있는 겁니다. ‘나는 야곱과 같이 간사한 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 구원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것이 소금언약이고, 이 땅에서 우리가 소금으로 살아가는, 변치 않는 소금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금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